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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으로 다가온 시적 담론들
_김명학 · 김정옥 · 박수원 · 김금란 · 김지란 · 박수림 · 정경미 · 한성천 · 곽문호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일상의 가치를 생각하며 바라보는 곳이 각기 다른 삶의 지향과 바탕에서 비롯된다.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인들이 시를 통해 다른 공감과 파장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시라는 동일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이라는 용어는 낯설지 않다. 시를 통해 다양한 주체’가 사유한 시적 내면과 의미를 살펴보고 천착해보고자 한다. 어차피 시의 정서는 시인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개별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동일한 상상력일지라도 이완과 팽창을 거듭하여 어느 순간 시인들마다 개별적인 시의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뷔퐁이 말했듯이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했을 때 변별성으로 구조한 아래의 시들은 그런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시인들이기에 시의 속에 함의된 세계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시가 지향하는 의미까지 살펴보고자 했다. 세상 물정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함께’라는 느낌이 앞서는 것은 아직은 우리의 문학적인 열정이 소진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그런 과정이 자연의 변화를 보여주는 천이遷移와 같다. 높은 산이 맨 처음의 모습인 평지로 돌아갔다가 서서히 골을 드러내듯이 우리네 문학적인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 먼 훗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며 묻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한 미래의 모습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어 현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훗날 돌이켜보면 시대의 한 부분을 견고하게 담당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사회적 기여를 담보로 견인해온 삶의 또 다른 모습인 시를 통해 아름답게 변해가는「숲속시」시인들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견지한 것도 큰 보람이어서 ‘숲속’ 나무처럼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공감을 의지로 이해했다. 다들 빠르게 흘러간 세월을 탓하지만, 아직도 당도해야 할 지점은 너무 멀기에 조금씩 서둘러야 하는 조바심도 없지 않다. 이미 경험했기에 지금껏 행한 행보보다 빨라져야 한다는 의미는 더 큰 운동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응당 알기에 그에 맞춰 변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은 형태만 다르지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발현되기 전 불면의 고통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거쳐 환기된 사유들이지만, 발화된 시적 세계는 시대와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게 된다. 문학을 통해 구현해갈 사유의 중심은 정신적인 자유에서 비롯하여 현실적인 고뇌를 추동하여 이룰 수밖에 없다. 그런 여지마저 확신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도래할 그 시간을 위해 희망을 놓지 못한다.
거북이는 늘 탈출을 꿈꾸었다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꼭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곳에 가면
모두 다 만날 수 있을 텐데
고무통에 갇혀서도
제 몸 만 한 돌멩이에 올라선 채
늘 탈출만 꿈꾸었다.
외롭게 만난 몸체 작은 아내 거북이
저를 밟고 올라서보세요
그럼 혹시 길이 보일지 모르니
당신이라도 먼저 탈출하세요.
늘,
그런 모습으로
고개만 내민 채 꿈꾸던 탈출
어느 날
베란다로 옮겨진 기회를 틈타
고무통을 넘는데 성공한 거북이
그토록 꿈꾸었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밝은 세상
베란다 밑으로
저기일까
저기일까
탈출
꿈에서도 그리던
탈출에 성공하여
4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거꾸로 뒤집혀져 죽은 거북이
그 거북이 시체 위로
며칠간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
그날 이후 근 4개월여 혼자 남은 아내 거북이는 잘도 견뎌냈다.
먹이도 잘 먹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게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거북이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먼저 간 남편 옆에 묻어주던 날 그날은 하얗게 눈이 내렸다.
그 거북이를 추억하며 쓴 글이 '혼자 남은 거북이'다.
-<거북이의 탈출> 전문/ 김명학
거북이가 꼭 바다에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적 지향 체體인 거북이가 돌아가야 할 지점은 ‘바다’다. 그 바다 생태계가 거북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것이다. 문제는 자유롭게 ‘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 현재의 고립된 곳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어떡하든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곳에 가면/ 모두 다 만날 수 있을 텐데”라며 ‘바다’로 돌아가면 ‘모두(가족)’와 헤어져 살아온 단절의 고통이 일거에 해소될 것이란 희망을 내비친다. 안타깝게도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거북이는 집안의 고무통에 놓여있다. 그 거북은 바다를 본 적도 없기에 본능 속에 실재한 바다가 맞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실패한 탈출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도전하는 거북이를 보고 화자는 DNA(유전성)에 내재한 바다를 지향하는 속성으로 이해한다. 고무통 속에 갇힌 답답한 현실을 알기라도 하듯 매번 거북이는 탈출을 위해 통속에 넣어둔 작은 돌멩이에 올라가 그곳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것이다. 번번이 실패한 어느 날 기어이 “탈출/ 꿈에서도 그리던/ 탈출에 성공하여/ 4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거꾸로 뒤집혀져 죽은 거북이”를 보게 되었고, 그 ‘사체’를 통해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으로 끝이 난 ‘탈출’의 결말은 처참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 거북이 시체 위로/ 며칠간/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며 가슴 아파한다. 소중한 거북의 죽음을 상기하면서 사람의 생으로 비유하고 있다. 결국 화자가 바라본 고무통 속 거북이 가족을 통해 유사한 사람들의 처지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거북이의 ‘사체’를 ‘시체’라고 말한다. ‘시체’란 말은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어 암컷의 거북을 ‘아내’라고 환기하고 있다. 먼저 떠나보낸 거북이의 탈출을 지켜본 “그날 이후 근 4개월여 혼자 남은 아내 거북이는 잘도 견뎌냈”지만, 이내 죽음을 맞고 만다. 결국 삶의 고통 속에서 탈출은 성공했지만, 온전한 성공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며 끝이 났다. 김명학 시인은 현실 속 상처한 아픔을 가슴에 담고 있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을 가족애에 대한 간절함으로 환기한다.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일까
저마다
그 틀이 다를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마저도 태워버리는 석양 앞에선
다들 발을 멈춘다
그리고
그 자리 위에 모두들 마음을 올려 놓는다
경건하게
일렁이며
가라앉는 오늘 하루를 보며
온몸이 붉은 솜털이 된다
만약, 저 해를 다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함께 붉어질 수 있을까
저 붉은 노을이
내일을 불러올 수 없다면
기다림이라는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여운을 가질 수 있을까
진다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또 다른 밝음이라는 것을
밤이 있기에 아침을 기다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나 기다려 봐도 될까
너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숲속 동인지 2호 대천 모임을 끝내면서)
-<노을 속에서> 전문/ 김정옥
일상처럼 펼쳐진 삶의 전선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얻기 위해 찾아간 대천 바닷가에서 장엄하게 번져오는 수평선의 일몰과 맞닥뜨렸다. 그런 광경은 오직 자연만이 연출할 수 있는 대서사시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풍경도 그렇지만, 압도해오는 감정의 변화는 황홀경에 신비적인 감동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화자도 그런 감정의 몰입도를 경험하면서 몰려오는 환희를 시적으로 치환한 것이다. 가슴으로 밀려온 감동은 “저마다/ 그 틀이 다를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마저도 태워버리는 석양 앞에선/ 다들 발을 멈춘다”라며 대자연이 보여준 웅장한 변화력에 경건한 마음을 담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위대한 발명을 이뤄 세상을 변화시킨다 해도 그것은 아주 국지적이거나 부분에 한정하고 만다. 하지만, 대 자연의 변화력은 태초 이래 유지해온 거대한 ‘틀’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다음날도 여전하게 해가 뜨고 지고 난 뒤에는 어제의 달이 다시 뜨는 반복이 진행된다. 그렇게 하루도 어김없이 도래하는 대 자연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현실을 깨달았을 때, 경건한 마음은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화자는 그런 서해 일몰 앞에 가슴이 붉어졌다며 만약에 잘못되어 위대한 풍경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를 우려한다. 화자의 가슴 안에 임재한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통해 일상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화자의 전향적인 자연관으로 본 “저 붉은 노을이/ 내일을 불러올 수 없다면/ 기다림이라는/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여운을 가질 수 있을까”라며 반문하며 내일이란 희망으로 다가올 풍경을 상상하고 있다. 결국 내일로 떠 오를 소망은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의지를 진동한다. 해가 서해 바다를 건너가면 뒤따라온 어둠이 바다를 덮고 만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은 불모의 공간이 아니라 다시 솟아올 미래를 잉태하는 시간이다. 그 시, 공간 속에서 떠 오를 아침 해처럼 “나 기다려 봐도 될까/ 너처럼”이라고 말하며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대하며 소망한다.
추분이 어제, 오늘 아침 7시는
소소한 안개의 바다
바다도 없는 이 이안의 아침은,
이미 태풍의 눈속에 들어간 고요의 바다이다
해안가 스치는 해무가 너울너울 올라와 날개깃을 펼치다가 일렁이다가
슬픔보다 진한 몽환의 안개
이안을 감싸더니 금시에 삼켜버린다
재 너머 성황당 삼신할매 전설도
이안교의 나즈막한 난간도
벼 이삭 여물어가며 내뱉는 소리도
상주 옹기장네 빛바랜 팻말도 첫 가마 든 옹기마냥 낯가리며 숨는데
흐늘대는 해조에 감긴 개 짖는 소리만이 컹컹컹,
버뮤다 삼각지대로 근접하는 중일까
그 괴물이 삼켜버린 해저 동굴엔
동네를 담가 놓은 벽화가 울음을 참고 서있다
무르익는 광란의 바다처럼
머지않아 소용돌이 칠 폭풍우 맞으며 퍼 올릴 난파선 몇 척, 아마도 한 배엔 작년 여름 배나무 가득 달렸던 하이얀 고깔이 폭락한 배 값처럼 나뒹굴지라도, 아마도 한 배엔 허리 굽혀 일하다 결국은 드러눈 공검댁 머리맡, 함께 아파하는 황구만이 웅크려 지킬지라도 슬픈 낭만의 으스름 저녁, 냥이들 애절한 울음이 누구 집 갓난애 울음이라 착각해 반색할지라도
아픈 이야기도 묻혀서 아름다운 때 이때든가
표류하며 파도 다독이며 되돌아올 지친 이들이여,
타국살이 서러워 훌쩍였던 베트남 새댁 앙티엔도 싣고 지난 추석, 애비 통장에 돈 몇 푼 덜렁 부치곤 비행기여행 떠난 용구네도 싣고 동구 밖 400년째 지키는 느티나무 그 쓸쓸함에 통곡하던 김초시네 장손 내외도 싣고 역마살 끼었는지 사방 떠도는 삼태 녀석도 싣고
용총 찾아 닻을 올려라, 이안의 아침바다로
-<이안의 바다> 전문/ 박수원
‘이안의 바다’는 감각으로 다가온 풍경을 심상 안에서 재구성한 장소로 설정했지만, 현실 속에 실재한 곳이다. 그날의 풍경은 묘해서 보는 것으로 말 수 없다는 이미지의 상상적 발화다. 마침 ‘추분’이 어제였다며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계절의 특징을 시간으로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느낀 시각적 감상과 ‘이안’이 갖는 지리 환경적 풍경의 절묘한 분위기가 절기를 통해 부풀어 오른 것이다. “해안가 스치는 해무가 너울너울 올라와 날개깃을 펼치다가 일렁이다가/ 슬픔보다 진한 몽환의 안개/ 이안을 감싸더니 금시에 삼켜버린다”고 한 그때 마침 몰려와 산을 가리듯 덮은 안개는 신비한 기운을 더했을 것이다. 마치 고요한 바다에 당도한 듯한 환상적 착시는 화자를 충분히 들뜰 만하게 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제 화자는 경북 내륙의 ‘이안’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안’의 바다에 당도한 것이다. 그 바다는 지금껏 있었던 과거로 회귀하는 시간이면서 추억의 공간으로 재현된다. 그 안에 오롯하게 존재한 비밀에 잠겨 잊힌 유물을 발굴하듯 하나하나 끌어 올려진다. 그 기억은 고유한 것으로 지나온 경로와 나아갈 항해의 좌표를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다. 저 깊숙한 바닷속에 실재했던 사람과 동네를 기억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황당’이 있던 곳의 ‘삼신할매’ 전설과 ‘이안교’를 오가며 들녘으로 나가던 길목의 익어가는 벼들의 노랫소리와 ‘상주 옹기장네’ 가마터 장작불이 이글거리며 어둠을 불 사를 때 산골 마을 안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마저 또렷하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동네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안개에 의해 사라져 버렸을 때의 심리적 공황은 마치 긴 항해 끝 희망을 앗아가 버린 ‘버뮤다 삼각지대’를 통과하다 난파해버린 배들처럼 “그 괴물이 삼켜버린 해저 동굴엔/ 동네를 담가 놓은 벽화가 울음을 참고 서있다/ 무르익는 광란의 바다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 ‘이안’의 바다다. 잘 살아보겠다고 우직하게 불철주야 농사만 진 배값이 폭락해 그만 드러눕고만 ‘공검댁’도 저 안 있고, 희망을 품고 온 베트남 새댁 ‘앙티엔’이 비통하게 침몰한 ‘이안’의 바다다. 그 바다를 화자는 안개의 시간 속에서 복기하듯 현실 속 실상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 안에 복원된 삶은 지금껏 이루지 못한 것들의 완성으로 현실 속의 바다와는 상관없는 먼 과거만이 실재한다. 희망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실을 ‘이안의 바다’를 통해 통해 상기시킨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도 그 안에 있다.
아침 뉴스에서는 슬픔도 없이
오늘도 누군가의 죽음에 꽂힌 칼날의 깊이만을 이야기했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에 쪽방이 젖었다는 내용과 허락도 없이
꽃들의 몸을 더듬고 간 불온한 바람의 행적과
술 취한 자동차가 도로를 거꾸로 갔다는 뉴스 따위는
식은 믹스커피처럼 텁텁했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붉은 사과를 들고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식탁 앞에 앉아 사과 한입을 베어 물었다
붉은 잇몸 속에 숨겨진 칼날처럼 사과를 물고 있는 이빨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비릿한 슬픔,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은
어디에다 울음소리를 숨겨 두었을까
적당한 단맛과 적당한 크기 적당한 안도와 적당한 거리_
모든 적당함으로 포장된 수많은 하루가 아침 뉴스 자막처럼
쓸쓸하게 스쳐 가고
슬픔도 없이 내일은 또
어떤 울음이 소리를 숨긴 채 사라질까
먹다 남은 사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서 입을 헹구며
문득,
미안하단 말을 배운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아침에 먹는 사과> 전문 / 김금란
사과는 붉다. 그 속은 붉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맛까지 붉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붉은 사과를 고르면서 사과가 갖는 풍미를 동일시한 착시현상이다. 습관처럼 아침에 일어나 한가한 시간을 틈타 TV를 켜고 접시에 담긴 사과를 깎았을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 비친 아나운서의 보도 내용에 감정이 없듯, 사과도 붉고 덜 붉고에 관계없이 맛에는 큰 차이가 없다. 사과의 맛이 덤덤하게 느껴지듯 간밤에 일어난 사건들도 내용에 따라 약간의 차이뿐으로 일상과 무관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아나운서가 전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감정의 동요 없이 나와 상관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윤리성의 상실에 대한 자각일 수 있다. 사실 슬퍼할 만한 일에는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욱 “아침 뉴스에서는 슬픔도 없이/ 오늘도 누군가의 죽음에 꽂힌 칼날의 깊이만을 이야기했다.”며 사건을 법의 범주 내에서 이해하고 도덕적 윤리와 상관없는 무감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개개인의 소중한 생명과 삶의 일상이 너무나 하찮게 다뤄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킨다. 특히 지난밤 있었던 죽음은 당연하고 “간밤에 내린 소나기에 쪽방이 젖었다는 내용과 허락도 없이/ 꽃들의 몸을 더듬고 간 불온한 바람의 행적과/ 술 취한 자동차가 도로를 거꾸로 갔다는 뉴스 따위는/ 식은 믹스커피처럼 텁텁했다”며 하루 사이에 발생한 중요한 일상들이 잡다한 사건으로 보도될 뿐이다. ‘쪽방’은 빈곤층에게 삶의 보루인데 그곳마저 폭우에 잠겨버렸다면 삶을 영위할 희망을 잃은 엄청난 불행인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젊은 여성에 대한 성범죄를 암시하는 “꽃들의 몸을 더듬고 간 불온한 바람의 행적”마저 뉴스 시간을 채우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술 취한 자동차가 역방향으로 질주하여 사람을 죽게 하는 것마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심각성으로 인식하지 않고 망나니가 빚은 해프닝으로 치부한다.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전한 뉴스가 무덤덤하게 다가오듯 화자도 그런 사회적 합의에 동화된 듯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그저 잘 깎인 사과 한쪽을 베어 물고 TV 화면을 바라볼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붉은 잇몸 속에 숨겨진 칼날처럼 사과를 물고 있는 이빨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비릿한 슬픔”이 본성을 자각하게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반성이 가슴속에서 조용한 파문처럼 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이자 잘못된 사회에 대한 경고와 함께 감정이 없는 사회의 기형적 병리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종화동 부둣가
안강망 선원들 육지로 발을 내딛는다
파도에 깨지고 바람에 부서지다 들어오는
바다 사내들을 위로해주는 조금 때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마중물
한 사나흘 분분히 일어나는
바다의 소문에는 레이더를 거두고
물살 센 이곳에 다시 닻을 내려
새로운 그물을 투망 해놓았다
만선의 꿈과 해풍에 달궈진 심장은
어군 탐지기 대신 사람들의 눈만으로 관측이 된다
만년 허기진 바다 사나이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속말들
세류에 휩쓸리고 부글거리다
기어코 한바탕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게 사람 사는 거라 위로하는
맥주 거품이 넘쳐흐르는 곳
출렁거리는 세파 위에서 만선호프호
다음 사리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들의 어창에는
환한 보름달이 가득 찰 것이다
-<만선호프 > 전문 / 김지란
‘만선호프’가 실재한 곳은 육지다. 만선이 갖는 의미는 배의 어창을 가득 채운 어부에겐 최고의 행복이자 간절한 소망이다. ‘만선’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의 상징적 이미지가 실재한 체험으로 환기되었기 때문이다. 김지란 시인은 여수 화양 외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갯내 물씬 풍기는《가막만 여자》란 시집을 통해 여수를 상징한 바다 이미지를 시로써 보여주었다. 우리가 알지 못한 밀물과 썰물을 타고 드나드는 뱃사람만의 운명 같은 애수마저 담담하게 일렁인다. 바닷가의 삶이 그렇다고 꼭 슬프거나 고통스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삶의 질곡을 파도 타듯 즐기며 잘 살기 때문이다. 화자는 안강망 어선을 타고 나간 이십여 명의 어부들이 조업을 마친 뒤 ‘물 때’에 맞춰 귀항하는 것을 매번 봤을 것이다. 안강망 어선의 어부들도 다국적인으로 필리핀과 베트남, 한국인이 뒤섞여 바다에 갇힌 보름 동안의 시간은 육체적 피로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향수가 더 간절할 것이다. 어부들의 피로를 풀어줄 보름 만의 귀환은 휴식 그 이상의 활력을 보충하는 기회다. 그들이 하선한 곳은 “종화동 부둣가/ 안강망 선원들 육지로 발을 내딛는다/ 파도에 깨지고 바람에 부서지다 들어오는/ 바다 사내들을 위로해주는 조금 때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마중물”로 그날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어부들의 마음속에 뜬 그믐 달빛에 비친 시간의 파도를 타고 넘어 다다랐을 만선을 위한 보름간의 노고는 생사와 바꾼 고투 그 자체다. 간간이 들려오는 바다의 소식이란 것은 물빛 가득 고인 윤슬조차 잦아든 적막한 외로움이 전부다. 그 고독한 객기의 서러움을 어디다 풀어놓을 것인가? 그들이 벗어난 바다보다 더한 격랑이 출렁이는 곳이 육지란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들의 들뜬 상륙도 만만찮은 파랑을 예고한다. 그들 나름대로의 준비를 철저히 해 “물살 센 이곳에 다시 닻을 내려/ 새로운 그물을 투망 해놓았다지만,” 쉽지 않다. 바다에서는 그물로 물고기를 끌어올리지만, 이제는 “만년 허기진 바다 사나이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속말들/ 세류에 휩쓸리고 부글거리다”는 그들이 사냥당할 시간이다. 그 고통 또한 그들이 감당할 일이다. 파도에 시달린 허기는 배를 채우면 그만이지만, 육지에서의 허기는 거품 가득 올린 500cc 맥주가 최고다. 연거푸 들이 켠 맥주 탓이 아니다. 취기가 돌 때쯤 눈을 비비며 다시 바다로 나가기 위해 몸을 배에 실어야 한다. 사위가 잦아든 밤바다에 뜬 ‘환한 보름달’이 그날따라 아른거린다. 며칠 전 ‘만선호프’의 구석자리에서 은근슬쩍 눈길 건네던 그녀의 얼굴이 달무리처럼 번져온 것은 한참 뒤다. 달이 날마다 크기를 달리하듯 사람마다 깃든 애환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잔 술 에게도 따를 수 있는 변명이 있고 그대의 삶에도 바람 부는 방향이 있는데요 내 존재 밖의 것은 다 행복해 보이고 넘치도록 가득해 보이는데요 닫힌 문 열어보면 넋두리 한도 끝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뱉어내고 쓸어 담고 왼종일 싸리 빗질 하는데요 마음 내려놓으면 열리는 가슴 길은 풍경이 아름다운 국도처럼 결코 만들어 질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인데요 속은 온통 상처투성이라네요 오히려 그 모습이 오랫동안 우려낸 연륜처럼 담백한데요 바라볼수록 슬픔의 깊이가 아립니다 숨 쉬며 살아가는 동안은요 세상으로 나를 버린 그날부터는요 자유는 없어요 발 버둥치며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냥 이 모습 이대로 뭘 어쩌라구요 채워가는 달처럼 비워가는 달처럼.
-<적절한 이유> 전문/ 박수림
세상이 죄다 그냥 굴러가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하찮은 것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유가 아니라 해도 그 나름 합당한 사유를 갖고 있다. 사람이 살며 겪는 수많은 난관과 알 수 없는 일들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내면엔 또 다른 비밀을 안고 있다. 외부로 표출된 모습과 달리 심리적 고통은 사회를 의식해 내면 속에 억압된 것이다. 화자가 보여준 모습은 일부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그 사람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술 한잔을 마시며 거기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말문을 연 시적 발화는 충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속내를 숨기고 충분히 마실만 한 이유가 있었다는 항변이다. 거기에 “한 잔 술 에게도 따를 수 있는 변명이 있”다며 술을 마시게 된 빌미가 된 ‘그대’란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으로 “내 존재 밖의 것은 다 행복해 보이고 넘치도록 가득해 보이는데요/ 닫힌 문 열어보면 넋두리 한도 끝도 없습니다”라며 바깥으로 드러낸 것은 겉치레에 불과한 착시현상이란 것이다. 그렇게라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틈틈이 속을 뒤집어놓은 화병 같은 울화를 다스리기 위해 그만의 방법을 찾아 활용한 것이다. 술 한잔에 취기가 돌면 넋두리 같은 회한을 풀어놓았을 것이고 그도 안되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뱉어내고 쓸어 담고 왼종일 싸리 빗질 하는데요”라며 애꿎은 집 마당을 사나운 대 빗자리로 비질 핑계 삼아 휘젓길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막힌 속이 생각만큼 뻥 뚫린 것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평상심을 되찾곤 했을 것이다. 자신을 아무리 지키려 노력해도 아름다운 수채화가 될 수 없단 생각을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본다면 “속은 온통 상처투성이라네요”라며 드러낸 모습이 진면이 아니란 것을 재차 강조한다. 결코 보이는 것의 전부가 자신이 아니란 것을 확인해준다.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 ‘슬픔의 깊이’란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사는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며, 시간의 경과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심리적 변화는 긍정과 초월로 진전된다. “숨 쉬며 살아가는 동안은요 세상으로 나를 버린 그날부터는요 자유는 없어요 발 버둥치며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냥 이 모습 이대로 뭘 어쩌라구요 채워가는 달처럼 비워가는 달처럼.”이라며 항변하는 화자의 심정이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을 ‘벌’로 인식하지 않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가 저러했듯 그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듯하다. 현실 속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초월적인 관조를 연륜으로 보여준 한 편의 시가 크게 다가왔다.
비에 대해 생각해 보네.
태생부터 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것들은 타인을 만나야 소리를 낼 수 있지.
함석지붕, 베란다 난간대, 양동이, 떡갈나무잎,
바닥에 눕혀진 자장면집 간판, 백일홍 이파리
다다당, 당당당, 통도독, 후두둑, 줄줄, 추르륵, 사브작사브작
이쯤에서 자꾸 궁금해지네
‘너’라는 사람을 만난
‘나’는 어떤 소리가 날까.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걷다가> 전문/ 정경미
사물이 갖는 속성을 사물성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한 만물 중 그 나름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실존은 존재에 선행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고유한 사물성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화자는 세상을 바라볼 때 ‘나’가 아닌 개별적 ‘대상’이 주체가 된다는 것으로 인식한다. 당연히 인간이 주어진 삶의 주체가 되듯 바라본 대상도 그 시공간에서 실재한 존재로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주체적 자아로 인식하고 사물을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려 했다. 비가 내리는 풍경은 그저 자연의 변화 과정에서 이뤄지는 순환 현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된 기존에 대한 사유가 시간을 거슬렀을 것이다. 단순히 비 내린 풍경으로 끝나지 않는 시적 충동은 내면에 도사린 자아를 확신하여 형상화한 발현이다. 비의 형상은 있되 고유한 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일반적인 생각과 같다. 그렇지만, 비가 내리는 풍경을 통해 반응하는 개별성에 천착한 화자는 ‘비’에 대한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다. 다양한 물체와 충돌할 때 내는 빗소리를 듣게 되면서 ‘비’가 갖은 고유한 물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아예 처음부터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무 형상적 사물이 어느 순간 소리를 내면서 실재한 존재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 또한 아이러니한 것이다. 존재한 것이 분명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가 그런 유형이기 때문이다. “태생부터 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것들은 타인을 만나야 소리를 낼 수 있지.”라며 어떤 대상에 닿아야만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무수한 존재군 중 ‘비’뿐만은 아닐 것이란 상상력이 확장되었다. 본성으로 각인된 주체의식을 각성하게 하는 ‘타인’에 주목해야 한다. 형체도 없는 구름으로 존재한 시간과 냉, 온대의 물리적 충돌과 허공을 떠돌다 낙하하며 감당한 공포의 시간을 역산해봤을 것이다. 절망의 순간을 견뎌내야만 본성의 발현을 이룰 수 있다는 개연성에 도달한다. “함석지붕, 베란다 난간대, 양동이, 떡갈나무잎,/ 바닥에 눕혀진 자장면집 간판, 백일홍 이파리// 다다당, 당당당, 통도독, 후두둑, 줄줄, 추르륵, 사브작사브작”대는 무량한 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 것이다. 그 개개의 소리가 결국 비라는 존재로 실재한다는 것을 가능케 한 감각적 충동은 풍경으로 전이된 감상적 이미지를 실체있는 결정체로 구조해가는 과정이어서 화자도 그런 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력으로 빚어진 세계의 전언이고 문장으로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감각으로 촉발된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걷다가” 건너온 단상이 깊은 사유를 거쳐 삶의 의미로까지 확장된 것으로 ‘너’와 ‘나’의 존재 가치를 동일하게 인식하는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궁극적으로 닿고자 한 ‘나’에 대한 존재가 ‘너’로 확인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의 맥락을 정점으로 보여준 시다.
긴 장마의 끝에 빨대를 꽂은 소나기는
남아 있는 비구름의 한 방울까지 모두 빨아 버릴 기세다
언제 밥 한 끼 먹자던 옛 연인의 안부가 궁금했어
잘 지내고 있는지
해 반, 사람들 반, 비구름 반, 그리고
핸드폰의 결박을 푸니
결제를 기다리는 문자들 와르르 쏟아낸다
추억에도 갱년기가 있어서
끈적거리는 팔월의 습한 바닷바람 앞에 우두망찰 서 있곤 해
너에게 와 나에게로 떠난 추억이었지
당신에게 적절한 위로의 말을, 떠 올리기가 쉽지 않아
돌아누운 채 들썩이는 등을 차마 껴안아 주지 못했어
뜨겁게 달궈진 젖가슴을 헤치며 들이치는 소나기가
놓아버린 정신줄처럼 온몸을 휘감겨 올 때
당신의 그녀는 떠나가고 대천 앞바다에 남은 보령댁
-<보령댁의 퇴근길> 전문 / 한성천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해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들과 우산이 뒤집히고 젖은 옷이 찰싹 달라붙은 몸매가 통째로 드러나 불편해진 장마철이다. 비라도 그칠라치면 이어진 습도의 상승으로 불쾌감은 급속히 높아지고 까닭 없이 웃자란 가로수마저 마땅찮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마치 세상 끝이라도 볼 것처럼 먹구름을 장막처럼 둘러놓고 퍼 붙는 장대비에 꼼짝 못 한 채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슬렁슬렁 도롯가에 나뒹굴던 것들이 빗물에 표표히 떠내려갈 때 부풀어 오른 물방울이 동그랗게 물 위에 떠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 때 ‘그녀’의 “언제 밥 한 끼 먹자던 옛 연인의 안부가 궁금했어/ 잘 지내고 있는지”란 간곡함이 생각났고 이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화자를 둘러싼 변덕스런 날씨도 그런 기분에 일조했다. 진득하게 가던 길을 갈 수 없는 “해 반, 사람들 반, 비구름 반, 그리고/ 핸드폰의 결박을 푸니/ 결제를 기다리는 문자들 와르르 쏟아낸다”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 멈쳤다를 반복한 틈을 비집고 나온 해는 그야말로 끈적끈적한 마음을 더 꿉꿉하게 한다. 무언가 빌미를 찾기라도 하듯 핸드폰에서 쏟아진 문자들도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의 체납 통고엔 일말의 배려라곤 없다. 핸드폰 속 유일한 온기는 따스한 인정으로 꼭꼭 눌러쓴 ‘그녀’의 문자가 전부다. 오래전 ‘그녀’의 안부처럼 가슴 설레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둥둥 떠 어디론가 표표히 흘러간 물방울처럼 ‘그녀’가 ‘나’에게로 보내온 글도 저랬다. ‘그녀’와의 “추억에도 갱년기가 있어서/ 끈적거리는 팔월의 습한 바닷바람 앞에 우두망찰 서 있곤 해/ 너에게 와 나에게로 떠난 추억이었지”라며 서먹서먹한 표정 속 감춰진 속내는 못다 한 서운함일 것이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반가움 사이로 느껴지는 시간의 간극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을 메워줄 수 있는 어떤 변명도 허락지 않는 ‘나’와 ‘너’의 만남이지만, 이제 지난 추억의 긴 시간을 뒤로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흘러 가버린 과거를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그녀’는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그녀는 떠나가고 대천 앞바다에 남은 보령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토록 지루하던 장마도 조만간 끝날 것이고 더 혹독한 삼복더위가 몰아칠 것이다. 그 시간들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천 바닷가에서 상봉한 ‘그녀’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되레 가끔씩 도진 그리움의 통증마저 매섭게 잘라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추억의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시 속의 추억이 아니라 해도 가슴속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 바다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돌아누운 채 들썩이는 등을 차마 껴안아 주지 못했어/ 뜨겁게 달궈진 젖가슴을 헤치며 들이치는 소나기가/ 놓아버린 정신줄처럼 온몸을 휘감겨 올 때” 매몰차게 돌아섰던 그 기억마저 잊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일게 된 충동일까? 과거의 추억 속 오롯한 대천 바다가 스멀스멀 밀려온다.
느티나무 괭이자루가 시커멓게 멍들어
밭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다
넓적한 쇠 날은 반쯤 닳고 삭아서
더 이상 밭을 일구지 못할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다 농사일 손 놓으시고
아무렇게 내팽개쳐 둔 괭이다
고추밭 고랑
무밭 고랑
배추밭 고랑
부지런히 일구고 다녔는데 이제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괭잇날 심장은 누가 다 갉아 먹었는지
기억 저편 시퍼렇게 피가 돌던 날카로움도 문드러져 없어지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길 앞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근육질은 다 빠지고 허물어져버린 비쩍 마른 몸을
그저 지나는 바람에 맡겨두었나 보다
맨발 자국 꾹꾹 박힌 흙무덤 가에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아무렇게 자란 호박넝쿨이
초라한 괭이작대기에 몸을 감고 올라와
마디마다 노란 수꽃들이 듬성듬성 덧없이 피어 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길 어디로 가려는지
줄기 더듬이가 잡초 무성한 밭이랑을 지나 허공을 헤집으며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괭이> 전문/ 곽문호
시선이 그곳에 꽂혔다. 그것으로부터 전해오는 무언가를 의식하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밭 가에 놓인 낯익은 괭이자루가 풍화의 시간 속에서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단절된 시간을 말해주듯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해버렸다. 괭이로 촉발된 추억의 시간은 고된 농사일로 점철된 생애 속 아버지를 상기시킨다. 그 흔적은 괭이자루에 박힌 닳아 절반만 남은 ‘쇠날’을 보며 노쇠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떠 올린다. 세월과 함께 쇠날처럼 묵묵히 일만 하시던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다 농사일 손 놓으시고/ 아무렇게 내팽개쳐 둔 괭이”를 통해 당시 밭에서 일 하시던 아버지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보통의 농가에서 농사를 그만둔다 해도 농기구는 집안 헛간에 가지런히 걸어놓은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는 손때 묻은 괭이를 손에서 놓은 그 순간까지 오직 가족의 행복을 위해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했고 “고추밭 고랑/ 무밭 고랑/ 배추밭 고랑”을 살뜰히 가꾼 것이다. 곽문호 시인은 괭이를 일상으로 챙겨 나서던 아버지의 발길이 끊긴 밭을 찾아갔고 그런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에 잠겼다. “괭잇날 심장은 누가 다 갉아 먹었는지/ 기억 저편 시퍼렇게 피가 돌던 날카로움도 문드러져 없어지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길 앞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근육질은 다 빠지고 허물어져버린 비쩍 마른 몸을/ 그저 지나는 바람에 맡겨두었나 보다”라며 무심하게 흘러간 아버지의 세월을 애써 찾아봤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토록 좋기만 했던 밭도 사람 손이 끊긴 것을 무섭게 알아챈 것인지 온통 잡초만 무성하다. 밭 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흙 무덤가엔 발자국이 선명한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없이 호박 넝쿨만 무성하게 타고 올랐다는 무상감에 더한 아버지의 부재가 절실해진다. 호박넝쿨이 밭 안을 기웃대다 밭가로 기어 나오는 그것마저 부재한 아버지의 시간으로 환기된다. 아버지도 망막한 삶 앞에 무력해질 때마다 밭가를 수없이 서성거렸을 것이다. 그래도 보살펴야 할 가족을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거듭했지만, 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팽개친 괭이자루를 다시 부여잡았을 것이다.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세월을 감당한 괭이자루 끝에 박힌 쇠날이 눈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
찰랑찰랑 파도에 좋아
쉬이 맘 드러내지 마라
바닷속 감춰진 파랑은 교묘한 것
욕진 밑창 뒤집으며
속 창아리 없이 다 퍼준 뒤
말도 없이 매몰차게 떠난 뒤태를
한없이 바라봐야 한 심사는 환장인거지
들물 따라 돌산 머리 확 밀쳐버리고
내 앞에서 이내 멀어졌지만
떠꺼머리로 마음 잡고 잘 되길 빌며
한 시도 널 내친 적 없다
여수 끝자락 망망한 불빛을 보며
간발로 놓쳐 따라 건너지 못했지만
밀친 바다를 탓하지 않겠다
파도 찰랑댈 때마다
스스로 무뎌진 칼 등을 돌려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낼 때마다
내 어딘들 편하겠느냐
잊겠다 떠나버린 꽁무니를 되돌려
다시 돌아오지도 않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려니 하며 원망하지 않겠다
첨벙첨벙 던진 말들이 살아나도
총총한 윤슬 슬어 안아 달래듯
후회한다는 내색 않겠다
-<여수 낭만 밤바다> 전문/ 박철영
박철영의 시 <여수 낭만 밤바다>에 대한 시평은 ‘이오우(시인, 문학평론가) 《시와문화》 22년 봄 61호’에 발표한 관련 글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해당 퍼온 글은(「 」)로 표시 했음. 「반짝이는 물빛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바람의 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입술들을 만날 것이다. 물은 수면으로 자신의 표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내면은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졌다. 생명의 시원을 투명한 기억으로 재생하는 빛을 가졌다. 아무리 거칠고 뾰족한 것이라도 유연하게 감싸는 몸이 꿈을 꾸듯 출렁인다. 경계를 허물며 꿈틀대는 내면의 숨소리를 들려준다. 그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잔잔하게 읊조리게 되는 추억의 미로가 있다.
여수 밤바다, ‘찰랑찰랑 파도에 좋아’ 절로 맘이 출렁이는 낭만의 자태를 가졌다. <버스커 버스커> 1집 앨범에 ‘여수 밤바다’라는 곡이 떠오른다. 감성을 자극하는 노랫말과 낭만적 분위기의 노래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함께 걷고 싶다는 정보, 우리를 ‘낭만’이라는 크로마키(chroma-key) 앞에 서게 한다. 피사체가 되어 상상의 배경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환상적 경험의 세계를 연출하는 마력을 가졌다.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노랫말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듯하다. 그러나 낭만이라는 세계관은 어쩌면 SF 영화처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현실이 물거품으로 망망해질 때가 있다.
「여수 낭만 밤바다」는 ‘알 수 없는 향기’가 아니라 “속 창아리 없이 다 퍼준 뒤/ 말도 없이 매몰차게 떠난 뒤태를 / 한없이 바라봐야 한 심사”를 말하고 있다. “떠꺼머리로 마음 잡고 잘 되길 빌며/ 한 시도 널 내친 적 없”는 자아의 무상함과 “파도 찰랑댈 때마다/ 스스로 무뎌진 칼 등을 돌려/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낼 때”를 환기한다. 부질없음을 탓하거나 후회를 내색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뱉는 자리다. 진정한 삶의 비늘은 ‘총총한 윤슬 슬어 안아 달래듯’ ‘첨벙첨벙 던진 말들이 살아나’는 순간을 쓸어 담는다.
박철영 시인의 시적 언어가 낭만적 순간의 환상적 경험과 허구적 로맨스를 새로운 우주적 질서로 재편집하고 있다. 미사여구가 아닌 질박한 생활 언어를 통해 경건함과 진정성의 포문을 여는 비기(祕記)를 보여준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삶의 환부를 뒤집듯 뛰어든 자리에서 제 목소리로 자신을 베어 물며 나아가야 하는 삶의 결연함이 맥동한다.」
말과 소리의 혼종에서 진화한 문학의 형식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라는 찰나를 지나면 소멸할지 모를 문장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 절망 같은 불면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움이란 지향을 표방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기반으로 한 소외가 당연시되는 풍조를 보여준다. 마치 공동체를 지지해주던 도덕적 우위가 법질서라는 규범에 맥없이 밀려나 버린 것처럼 허망하게 대체되는 현상을 문학의 영역 안에서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도 시인들이 행할 수 있는 불면은 고유한 관행으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실천 덕목이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개별적 여건에서 시적인 세계에 대한 탐험적 사유를 놓지 않은 시인들의 시를 일별하면서 느낀 감회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작지만, 시간을 물고 성장해가는 숲의 나무처럼 발화된 빛을 통해 광합성을 이루어 화학적 에너지를 축적해가는 나무들처럼 김명학, 김정옥, 박수원, 김금란, 김지란, 박수림, 정경미, 한성천, 곽문호, 박철영의 문학적 열정은 삶의 충만으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의 기운은 순수한 초심을 잃지 않고 온기 어린 서정을 지향하는 시적 영토를 묵묵히 다져온 의지의 결과여서 새롭게 평가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획을 그으면서 불면으로 지샌 시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부단한 투혼과 긍지에 대한 공감을 말하고 싶었다.
-《숲속시》2023년 봄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