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30 교육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과외는 그렇게 전격 중단되었고 하루 7부까지 나눠 수업했던 나는 그날로 백수가 됐었지요. 살길이 막혔을 때의 그 막막함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지요. 도통 길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누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겠는가요. 당시 나는 어느 신문에 만약 어느 누가 1천 원을 준다면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할 용의가 있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조카들 밥을 해주며 8년 동안 그렇게 연명을 해야 했습니다. 88년 봄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에서 시다 생활을 1년 반쯤 했는데 최악의 상황을 겪었지요. 공장은 지하에 있는데 화장실은 2층에 있는 그런 환경을 다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알게 된 광진구 구의동 소재 정립회관 내 정립전자를 알게 돼 입사했는데 천국이었습니다. 휠체어 시설이 완벽했던 것입니다. 반년도 못 채우고 다리 수술을 위해 그곳을 떠났지만 잊히지 않는 곳이 바로 최초 복지시설이며 한국소아마비협회인 정립회관을 잊지 못합니다. 1975년 개관 이래 장애인 체육의 요람으로 몫을 다해온 그곳이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하루빨리 정상화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202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