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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성경 본문 : 시편 46편 4절-6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4년 3월 6일 수요일>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46편 4절-6절 말씀입니다.
4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절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절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4절 말씀에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우리 행복한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교훈성의 성질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되어 있다면 이 말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내가 나뉘어 흐른다는 것은
세상 육적 복을 받으라는 게 아니라
구별과 분별을 시켜주는 진리 생명의 말씀을 준다는 것입니다.
환난의 때는 혼란이요 혼돈이요 혼성이요 혼합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 때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영과 육의 환난을 당하게 되는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구별하게 하고 분별하게 해서
거룩하게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
한 말씀이 있어. 한 교훈이 있어. 한 교회가 있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구별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 속의 모든
생각을 구별해 내고. 또 세상 마지막 시대에 거짓 교훈 거짓 목자가 많은데
이들이 외치는 말이 선과 악인지 구별해 냅니다.
이런 종들의 외침. 이 운동을 하는 교회의 운동. 이런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에 붙잡고
구원역사를 하십니다.
지금이 말세입니다. 교회도 다 타락이 됐었습니다. 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런 진리운동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능의 실력을 부지런히 키우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아직까지 생명이 붙어있고.
육신을 움직일 수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널 데리고 갈 런지 모른다.
세상이 언제 불식간에 끝날 런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 네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이니
부지런히 준비를 하라.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지극히 높으신 자’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데.
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고 했는데,
성경에 보면 하늘의 성소도 있는데. 이 ‘하늘의 성소’란 실상 계에
실존하신 하나님. 또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존하신 이의 성소’란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장막을 말한다.
즉 진리가 있는 곳이 성소다. 하나님의 법궤(말씀)가 있는 곳이 성소다.
지상의 장막은 임시적으로 거할 수 있는 거처지요 바람 불면 날아간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에 성소가 있는데. 이 성소 안에 있던
법궤가 없어진지 오래 됐었습니다. 이 법궤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된 돌 판과. 만나 담은 항아리가 들어있고. 또한 마른 막대기가 있다.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은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이 말씀이 새겨진 것을
의미하고. 만나 담은 항아리가 있는데. 항아리란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몸은 질그릇과 같아서 쉽게 깨지는 존재다.
이 항아리 안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진 만나가 들어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 깨달음은 목사가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니다.
목사는 말씀을 깨달음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질 때 순전히
하늘의 것으로 깨달아져서 우리 속에 담겨지는 거다.
또 뭐가 있느냐?
마른 막대기가 있는데. 이 마른 막대기에 꽃이 피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마른 막대기 같은 인생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이 중생이 되었고.
그 다음에 이룰 구원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는 존재가 되었다.
남이 볼 때는 마른 막대기 같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꽃이 피는 거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룰 구원 성화구원의 역사가 활짝 피어난다.
신령한 눈으로 보면 우리의 속에서 이 일이 이뤄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다.
법궤는 광야의 가시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의 속에서
이 역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장막 성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 이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아지는 것을 말한다.
진리 이치가 나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인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이 뜻은 우리로 당신처럼 온전 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이를 위해 진리 이치의 말씀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설교는 목사가 하는 거지만 그 말 속에 말이 있으니
우리는 이걸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세상 복 받아라’ 라고 한다면 이 말은 누가 한 거냐?
목사가 말을 한 거지만 그 말 속의 말은 누가 한 거냐?
소리는 목사가 내는데 그 말 속의 소리는 세상이 말을 하고 있구나.
그러니 이게 누구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목사 속의 주격이 누구냐?
세상이다. 세상이 주인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세상이 주인이 된 그 정신에
의해서 말이 나오는 거니까 세상이 말을 하는 거다.
그러면 이게 성소에서 나오는 말이냐. 땅에서 올라오는 말이냐?
땅이다. 하늘성소에서 나오는 말이냐. 무저갱에서 나오는 말이냐?
무저갱이다.
무저갱이 뭐냐? 밑이 없는 항아리다.
그러니까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그 말의 성질이 불에 타질 세상 것을 말하게 되면
이것은 바닥이 없는 교훈이다.
이런 소리는 백 날 들어봐야 믿음 건설이 안 되는 거다.
바탕이 없는데 어떻게 건설이 되겠느냐?
이런 소리는 백 날 들어봐야 그 속에서 연기만 올라온다.
왜냐? 보나마나 불에 타지는 것이니까. 불에 타지는
그 연기가 나오는 거다.
세상소리는 아무리 들어봐야 사람이 허망해진다.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세상소리를 듣고 아무리 충성 봉사를 하고 노력을 해도 믿음이
자라는 게 없다.
그러니 사람이 허탈감에 빠지고 허망해지는 거다.
자기가 열심히 장만해 놓은 것이 불에 다 타버리면
사람이 허망해지고 미쳐버리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 저것은 하늘의 성소에서 나오는 음성이구나.
아. 저것은 장막의 성소에서 나오는 음성이구나.
이걸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기 속에 말씀대로 한 시내가 나눠져서 흐르게 되어서
구별하고 분별이 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장막의 성소’의 또 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영이 중생된 성도의 몸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 몸은 사람이 죽으면 무너진다.
그런데 몸은 무너지더라도 죽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것으로 닮은 것. 성령님의 역사로 된 것.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는 것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까지 영원히 간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하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정통적으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신앙의 성질적으로 볼 때 그러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이
말씀 밖에서 빙빙 도는 것도 있고. 하나님 쪽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것도 있고. 또 하나님을 만난바 되는 성질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려고 찾는 것도 있는데. 이 마음도
층층이로 되어있으니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며
깨닫고 자 찾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설교시간에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은 없고 그냥 앉아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루해서
졸음만 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고 했는데,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했기 때문에 기쁜 거다.
기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그 말이다. 하나님과 접촉이
됐다 그 말이다.
이 기쁨은 환난 중에 물질의 해결의 기쁨보다. 사업성공을 이뤄낸 기쁨보다
성도 자기가 영능의 실력자로 순금 같은 믿음으로 나온 것을 알고
기뻐하는 거다. 진리성도가 이렇게 나오도록 도와주고 협조하고
인도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절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성이 어떻게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거하시게 된 것이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하면 거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고.
마귀가 그곳에 산다면 마귀가 그곳에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다.
자기 속에 무엇이 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으냐?
자기 속에 누가 살고 있느냐? 어떤 정신이 거하고 있는 건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보니 이 성이 구별성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인 마귀 집에
거하시겠느냐?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안 믿는 사람의 마음이 뭐가 좋아서
그 속에 거하시겠느냐? 맨 세상욕심만 부리고. 세상만 가지려고 하고.
남을 해쳐서라도 자기가 유익되게 하려고 하고. 거짓말을 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그 영은 죽어있는 사람 속에 뭐하려고 거하시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만 가득 들어있으면 세상의 것은 썩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서 썩는 냄새가 풀풀 난다. 썩은 것에는 똥파리가 날아오듯이
세상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에게는 마귀들이 달라붙는다.
잡된 생각이 많이 나온다 그 말이다.
우리 헹복한 교회 교인들이 이런 집에 살고 싶으냐?
밭을 가꾸지 않아서 풀만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면 이 밭의 땅에는
뱀. 만한 지렁이가 숨어있고. 두더지가 이 지렁이를 잡아먹느라고
사방으로 터널을 뚫어놓고. 뱀도 기어 다니고. 들쥐도 기어 다닌다.
사람의 마음 밭도 이런 게 있다. 이건 세상 밭이다.
세상으로 된 마음 밭이다. 하나님이 뭐가 좋아서
이런 사람의 마음 밭에 들어가시겠느냐?
우리는 구별 성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이 거하신다.
성령님이 거하면 생각 마음 정신의 모든 면에 구별성이 들어간다.
자기 속이 구별이 된다. 아무 거나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살아라’ 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신앙의 열매를 따먹고자 하는 것. 세상을 욕심내게 하는 것은
전부가 비 진리이다. 이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예수 믿어 복 많이 받아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 성령님은 이런 것이 진리인 것처럼
판을 치는 환난 중에라도 신앙 믿음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고자
신앙정조를 지키는 성도 안에. 이런 교인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그 성’이란 보이지 않는 성, 거룩한 성을 말한다.
‘거룩’은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집(예배당)만 덩그러니 있는 것을 거룩한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배당은 불에 타지는 거고, 그 안의 성도들이 거룩해야
거룩한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이 거룩한 성 중에 거하신다고 했는데.
내가 하나님의 온전을 닮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거하시고. 교훈적으로 거하시고. 소원 목적적으로 거하신다.
이 역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거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 안에 거하시매 이 성도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성은 무너지는 건데 여기서 흔들리지 않는 성’이란
성도를 말한다.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세상 넓은 길의 정신으로 나가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을 붙잡고 등 기대고 있으면 자기도 흔들림이 되는 거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어떤 성을 새벽에 도우신다. 흔들리지 않는 성도를. 신앙이 좋은
성도를 도우신다는 거다. 그리고 대낮도 아니고 저녁때도 아니고
새벽에 돕겠다고 한다. 흔들지 않는 신앙.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거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우신다. 여기서 ‘새벽에 도우신다’ 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새벽이 아니라 새벽같이. 일찍이. 남 먼저 그 성도를
도우신다. 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다 제쳐놓고 그 성도를 먼저 돕겠다는 거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싶으냐? 자기를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라.
세상정신 사상을 구별을 시켜라. 그러면 하나님이 도우신다.
환난 중에 잠을 자는 신앙은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신앙이다.
또한 환난에 휘말려 있거나 환난을 주는 주동자들이기도 한다.
하나님 편이 아니라 세상 편이라 그 말이다. 주님을 돕는 편이 아니면
주님을 대적하는 편이 되는 거다. 이런 신앙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으냐?
영능의 실력이 없으면 반대자들의 이용물이 돼버린다. 아무리 똑똑해도
이용물이 돼버린다. 그러니 영능의 실력을 올려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껴야 한다. 날마다의 속에서 내가 이런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또는 안 도와주셨다’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첫째는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도와주신 게 아니라면 누가 도와준 거냐?
마귀가 도운 거냐?
두 번째는 신앙 깨달음에 있어서 풍부해지면
이게 하나님이 도와주신 거다?
어느 게 맞느냐? 두 번째가 맞느냐? 이게 정답인데,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냐?
믿음생활을 잘 하라고 하나님께서 덤으로 준 거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는 것을 원 핵심으로 잡게 되면
이것은 세상적 신앙이다. ‘내가 예수를 잘 믿으니 이런 거 저런 걸 주시는구나.
이게 참 복이구나’ 라고 한다면 이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각이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라고 했는데
첫 번째는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돕는다?
두 번째는 육의 기도라도 새벽에 기도를 하면 다 들어주신다?
세 번째는 아무리 영을 위한 기도라도 저녁에 기도를 하면 안 들어주신다?
어느 게 맞느냐?
보통 보면 어떤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면 잘 들어주신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많이 가진다.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기도의 장소나 형식보다는
기도의 내용이 문제다. 항상 기도를 하는데 그 내용이 세상 것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항상 들어 주시겠느냐? 안 들어주신다.
기도는 왜 하는 거냐?
기도를 할 때는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이 그 기도 안에 들어있는 거다.
간구성이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무슨 소원으로
뭘 간구하느냐?’ 이게 있는 거다.
어려움을 만났느냐?
‘하나님, 이 일을 하나님 앞에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으면 ‘하나님 아버지.
성경구절의 뜻을 알게 해 주옵소서. 바로 알아야 하나님 뜻대로 살 게
아닙니까? 그러니 깨닫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이런 기도는 응답을 해 주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깨닫게 해 주시는 거고.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이런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고자 하는 것.
진리 이치를 깨닫는 것.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신다.
그래서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하시는 거다.
그런데 자칫 잘못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시는 속의 뜻을 모르면 껍데기만 가지고
자꾸 힘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고 녹초가 돼버린다.
6절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세상이 떠들썩하게 일어나는 것. 날마다 데모를 하는 것도 떠들썩한 것.
‘집값이 올라가네. 기름 값이 올라가네.’ 하며 떠드는 것도 떠들썩한 거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이 안 보이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떠들고.
또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며 떠들고. 자기가 잘났다고 하며 떠들고.
자기가 제일 크다고 하며 떠들고. 자기가 제일 부자라고 하며 떠들고.
자기가 제일 강하다고 하며 떠들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며 떠들고.
자기 비석이 크다고 하며 떠든다. ‘비석’이란 자기의 기념비를 말한다.
비석에 자기의 이력을 죽 써놓는 것은 ‘이건 내가 죽기 전에 해 놓은 거다’
라고 자랑을 하는 거다. 그리고 교회 안을 보면 ‘내가 죽기 전에 목사가
한 번 되고 죽어야 되겠다’ 하고 떠들고, 자기가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해놓고도 자기는 의를 행했다고 떠든다.
이처럼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부터 질서정연하지 못하고 원래부터가
떠드는 곳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로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네가 따먹으라고 했지 않느냐?’ 하고 떠들었다.
세상은 요란한 곳이다.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어떤 물체든지 녹으면 원래의 형체가 없어진다.
이 말은 세상이 하나님을 외면한 채 워낙 떠드니까.
워낙 잘났다고 하니까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진노로 심판을 하셨다는 거다.
불에 태워버렸다는 거다. 이 심판으로 ‘세상에서 내가 잘났네.
무엇이 잘났네’ 하는 사람들이 형체도 없이 다 녹아지더라.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지고 싶으면
세상적 비 진리적 인본주의적 육적으로 부지런히 커져서 진리의 성도를
무시하면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크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성공했다’ 라고
하라. 그러면 심판 주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시고 불속에서 녹게 해 주시기로
되어있는 거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이 심판을 당하고 싶은 희망자가
있느냐? 불속에 들어가서도 안 죽겠다고 떠들 희망자는 없느냐?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성도들을 도우면 자연은총의 혜택을 받게 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특수은총을 받게 된다. 진리의 성도들에게 환난을 주고
핍박을 주고. 복음운동을 방해하면 이것은 자살행위다. 거룩한 성도가 하는
주님의 복음 운동을 방해하면 이건 형체도 없이 녹아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