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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인 유튜브 동영상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 태어나 온전히 일제침탈기를 거쳐오면서도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과 천황을 찬양하는 시를 써달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와 민족적 자존감을 끝까지 지킨 신석정 시인의 일대기를 다룬 <석정문학관>에서 제작한 공식 영상이다.
고운 심장心腸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 ...
1937년 일제의 침탈과 억압이 점차 극을 향해 달리던 때 석정은 말했다. "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자칫 주저앉기 쉬운 너무도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심장의 살아 있음을 노래했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내 발길은 부안읍을 출발하여 김제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김제 만경읍까지 걷는 것인데, 날이 너무 덥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날... 그 날도 이렇게 더웠을려나. 하지만, 그날 광복의 기쁨은 이깟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것이다.
걷기 시작 전에 미리 염두에 두었던 석정문학관이 눈 앞에 나타났다. 커다란 흑비석에 그의 작품들이 오늘(8.15)을 노래하고 있었다. 서두에 내가 읇어 본 <고운 심장> 시비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특별히 석정문학관을 염두에 둔 이유는 '그가 오늘 광복절에 딱 어울리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석정문학관 홈페이지(http://shinseokjeong.com)에 '석정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어 간단히 옮겨 본다.
석정은 "슬픈 牧歌'속에 산 사색의 일생, 흙에 살다 흙에 묻은 고고(孤高)한 서정(抒情)을 지닌 사람"이고,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시인이면서 한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지조를 지켰"다.
석정은 1931년 그의 나이 25세 되던해에 고향인 부안으로 낙향후 3년동안 소작농으로 일한 삯을 받아 이곳 선은동 560번지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이름을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지었다. 석정문학관은 2011년 청구원 옆에 지어졌다.
아직 한낮이고 더워서 인지 청구원에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분히 이제는 유적지가 된 그의 집을 둘러보고 잠시나마 마루에 앉아 따가운 햇살을 피했다.
석정문학관은 시비와 청구원이 있는 야외 공간이 넓어 가벼운 산책을 할 수도 있다. 문학관은 2층의 단촐한 건물로 정면 벽에는 신석정 시인의 전신사진이 있다. 코로나로 인한 방문자 관리를 하고 있어,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약식) 연락처 등을 기술하고 체온을 잰후 소독약을 손에 바르고 입장했다.
전시관은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이 있고 별도로 세미나실이 있다. 서두에 보인 동영상은 세미나실에서 상영해준 것과 동일하다. 신석정은 1907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불의에 저항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시(詩) 정신이 없는 민족, 시 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 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신념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로 통하는 길이다."
그가 산 시대는 온전히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마침내 36년의 세월을 강점당한 시기였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미군정과 6.25동란 등이 연이어진 그야말로 암울한 시대였다. 그 힘들고 암울했던 시기를 석정은 온 몸으로 맞섰고, 그 시대를 밝힌 촛불로 자리매김 했다.
꽃덤풀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늬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1946.1.12 밤
志在高山流水 ... '뜻은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있다'라는 의미이다. 신석정시인이 즐겨 썻던 문구로, 그의 높은 지조와 기개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그는 목가시인으로 불리지만, 의외로 많은 시들이 현실참여적이다.
전시관 유리벽에 새겨진 그의 글은 신석정이 지녔던 평소의 시에 대한 관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시는 불행한 겨레의 멍든 마음을 되찾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그렇게 따뜻한 손길로 살았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다른 예술가들의 기념관에서 보이는 서재나 작업실과는 안에 갖추어진 집기나 가구들이 차이가 난다. 그래도 나는 신석정의 서재 모형이 더 정겹고 아름답게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한 그의 생애가 더 빛나서 그렇지 않나 싶다. 문득, 얼마전에 지나온 미당문학관의 미당 서재가 생각났다.
그의 작품 연보를 보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봐야 할 것이 있다. 사실 문학관의 작품연보란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단 한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 기간동안 실질적으로 절필을 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신석정은 <국민문학>이라는 친일문학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어떤 주제 어떤 내용일지는 뻔한 일... 신석정은 그 청탁서를 찢어 버리고 해방까지 절필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창씨개명을 안한다고 경찰서에서 출두령이 떨어졌고 신석정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1930년대 창씨개명을 안한 시인은 아마 신석정시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동영상에 나와 있다.
신석정시인의 작품들과 원고들이 유리 상자안에 전시되어 있다.
신석정시인의 시를 넣은 시화전이 있었던 듯 했다. 한쪽 복도에 시서화가 일렬로 서 있었다.
세미나 실에 아무도 없고, 잠시 들여다 본 바로는 특별한 것이 없어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안내를 하시는 분이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관람객은 나 혼자였지만, 10분 남짓한 서두에서 보인 동영상을 통해 시인의 뜻과 행적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아마 방학을 맞아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인 듯 했다. 잠시 모여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들은 후 흩어져서 여기저기 청소를 했다. 그들이 여기 온 김에 시인의 행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갔으면 금상첨화 아닐까 하는 나의 작은 바램을 가져보았다.
2층 옥상은 기둥만 있는 테라스가 있어 바람을 쐴 수 있게 되어 있다.
계단쪽에는 김종원이라는 분이 기증한 선사시대와 그 이후의 유물들을 전시한 방이 있었다. 잠시 가볍게 둘러보기 좋게 구성되어 있었다.
작은 조촐하게 생긴 북카페도 있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알맞은 책을 읽으면서 가벼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1층에서 작지만 기념품을 살 수 있었다. <석정문학회>에서 발간한 작은 시집과 1931년 8월에 발표된 시인의 시 '임께서 부르시면'이 씌여진 붉은 색 손수건을 구했다. 내게는 좋은 기념품이 될 듯 하고, 지금도 내 책상위에 놓여서 이 순간 빙그레 웃고 있다.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세상에는 많은 시인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렇고.. 일제 치하에서도 많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신석정은 홀로 빛나는 촛불처럼 어둠을 밝히는 시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부안을 지나면서 부안을 '저항의 땅이고 정신이 살아 있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 저항과 살아 깨어 있는 사람들의 맨 위에 신석정이 서 있었다.
이제 발길은 잠시 후면 '풍요로워서 서러웠던 김제땅!!!"으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