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근이 이야기]
내 친구 태근이는 고등학교 ‘일진’ 가운데 하나인 경진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경진이는 나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니 결국 셋은 중학교 동창인 셈이다. 태근이는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경진이에게 3일 내로 나를 찾아내라는 수배령을 내렸다. 경진이는 사전만큼 두꺼운 고등학교 동창회 명부를 찾아서 결국 내 주소를 알아냈고, 어제 우리는 술을 마셨다. 태근이와는 30여년만의 만남이고 경진이와는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한 번 만난 이후였으니 12년만의 만남이다.
태근이는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중학교 때 집을 나와, 우리 집 부근에서 자취를 했고 나는 태근이의 집에서 십 원짜리 짤짤이를 하거나, 뻐끔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셨다. 연탄 위에 찜통을 얹고 라면을 한꺼번에 10개까지 먹는 내기도 했다. 태근이와 나는 원룡이라는 친구와 함께 근처의 여대생 선생님 집에서 함께 과외를 했는데, 우리는 공부보다 과외선생님의 짧은 치마와 민소매 사이로 드러난 젖가슴을 훔쳐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태근이는 실업계로 진학했고 나는 인문계로 갔다.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학교를 마치면 중앙파출소 옆에 있는 심심다방으로 가서 태근이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당구를 500이나 치고 오락실에 앉으면 겔러그(갤러그인지 분명치 않다)라는 게임을 100원을 넣고도 1시간씩이나 하던 경식이었다. 내가 이삼천 원을 오락실 기계 아가리에 처넣을 동안 경식이는 100원 만 썼다. 결국 나는 경식이의 오락을 지켜보거나 당구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지겨워져서 심심다방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가지 않았다. 경식이는 몇 번의 사업 실패 끝에 성서공단에 다니다 결국엔 기계에 감겨 죽었다고 했다. 경식의 아내는 혼자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내가 중학교 때, 태근이와 원룡이와 함께 동촌유원지에 배를 타러 가서 나보고 말을 걸어보라고 해서 내가 ‘꼬신’ 여중생이었다. 흰 운동화를 ‘빠개’ 신었는데, 그런 약간의 불량끼가 나는 좋았던 것 같다. 교복치마를 얼마나 잘 다렸는지, 치마 선에 손을 베일 것 같은 아이였다. 향교 옆에서 세탁소를 하던 아이였다.
태근이를 통해 만난 응철이는 곱상하기 그지없는 친구였다. 응철이의 책가방엔 책이 없고 가발과 사복이 들어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심심다방에 오면 응철이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춤을 추러갔다. 응철이 옆에는 자기보다 대여섯 살 많은 여대생도 많았다. 응철이는 결국 전공을 살려 춤 선생을 하는데, 얼마 전에는 자기가 가르친 제자가 무슨 스포츠댄스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단다. 아직도 미혼인 응철이는 이제 원 없이 놀아봤으니 대구로 올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말이 없는 태근이 조차 “새끼야, 술 만 마시지 말고 말 좀 해봐라” 했던 얼굴이 까맸던 진석이도 술을 너무 먹어 죽었다고 했다.
태근이를 만나게 해준 경진이는 중학교 때는 작은 키에 참하게 생활하던 모범생 아이였다. 자기가 어떻게 고등학교 때 일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나에게 들려줬다. 고등학교 때 싸움은 거의가 화장실에 이루어졌고 싸움을 1, 2분 안에 끝냈다고 했다. 자기는 몰랐었는데, 자기의 ‘대가리’가 참으로 단단하고 머리를 이렇게 써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 깨달았다고 한다. 아, 드디어 나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는구나, 감탄했다고 한다. 써니텐 병이 박살나도록 머리에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야기, 해병대 이야기, 건축과 실습을 나가, 교수 앞에서 실습장의 간판을 집어던진 이야기, 씨름부 선수와 붙어서 멱살을 달랑 잡혀 밤새 끓어 앉아있었던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경진이는 건축과 여학생 선배언니들로부터 “돌아온 해병대 복학생 꼴통, 경진이라는 남자만 피하면 된다”는 금언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던 여학생을 결국 지금의 자기 아내로 만들었다. 건설경기 호시절엔 하룻밤 술값만 2천만 원을 쓰기도 했지만 2008년에 70억 원의 빚을 지고 지금 재기를 준비한다고 했다. 웃음이 아직 애기 같았다.
태근이는 음료회사에 다니다가 7년 만에 때려치우고 슈퍼를 시작해서 한참 잘 나갈 때는 200여 평이 넘는 대형마트를 서너 개를 경영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포항 양덕에서 큰 마트를 하고 있는데, 부근에 하나로클럽이 들어서면서 고전중이라고 했다. ‘체어맨’이라는 세단을 타고 연애질도 해 보았지만, 좋은 차 타 보니 ‘딴생각’이 나서 아예 큰 트럭을 한 대 사서 그걸 타고 다닌다고 했다. 대형트럭에서 무슨 짓을 하겠느냐고 중학교 때처럼 말을 더듬었다. 하루에 한 삼만 원 정도만 벌고 산에서 약초나 캐러 다니고 싶다고 했다.
프루스트에게만 ‘잃어버린 시간’이 있는 게 아니었다. 소년, 불량소년으로 악동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여름밤은 눅눅했고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나는 어제 태근에게 명령을 받았다. 원룡이를 찾아야한다. 동촌유원지에서 흰 운동화를 꺾어 신은 세탁소집 딸을 함께 꼬셨던 원룡이를 찾아야한다. 찾느라 밤을 샐지도 모른다.
첫댓글 '하루에 한 삼만 원 정도만 벌고 산에서 약초나 캐러 다니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도쳐에 숨어있군요....
우리 나이때 동창회에 나가면 죽은 이들의 소식들이 들려오지요....그게 불혹의 나이인가 봅니다.
동창회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듯 묘사가 잘 되었습니다. 다 읽고보니 친구계보도가 좀 복잡한듯... ㅋㅋ
잘 읽었습니다.
원룡이를 찾기에 관한 다음 이야기도 궁금하다는 미풍같은 생각.
그러니 나도 원룡이란 사람이 궁금해지는군.... ㅋ
마치 소설같은이야기로군 !! 내 친구이야기와 닮은것이 우리는 결국 소설속의 주인공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해보게하는 글이네 다음편도 기대!!!
수상이형글이 인기짱! 이군요... 근데 주인공이 어딜가고 다시 들어오지를 않네.... 아마 원룡이를 찾으러 갔나봐요... ㅋ
아! 이거 <다음>의 '미즈넷' 보다 더 중독성이 있네요.. 혹시 미즈넷의 그 이름난 꼴통 논객이 혹 님!
초면에 반갑습니다. 마약같은 좋은 글 자주 올려 주세요.
느티나무님도 중독성있는 글을 잘 써는걸로 아는데... 좀 올려주시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