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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장. 아름다운 이별
첫 눈이 녹고 날씨가 좋아지자 제일 먼저 흑수채를 떠나게 된 사람은 은의소소와 주은비였다.
하루가 다르게 은의소소의 상태가 호전되고 이젠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데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한 가지 염원이었던 통천문에 이르는 무공을 천호에게 전해주고 나서는 추위가 더 깊어지기 전에 살던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딸에 대한 유자추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말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게 된 것이 첫눈을 맞이하게 되었다.
은의소소의 그런 마음을 알게된 유자추가 천호와 능소빈, 소혜 등과 함께 의논한 후 며칠 동안 조용히 준비를 하였고 흑수채의 장정들 몇 명을 대동시켜 올 때 타고 왔던 마차와 함께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돈이면 대장간 하나는 차릴 수 있을 것이오! 바우라는 사람 솜씨가 무척 뛰어나던데 그 솜씨로 열심히 일 한다면 머지않아 부자가 될 거요!"
유자추가 주은비에게 전표와 작은 보퉁이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유공자님! 지금까지 받은 은혜만도 태산과 같은데 어찌 또 그런 은혜를...."
주은비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받으시오 주소저! 이건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두령과 진소저가 주는 것이오! 소저의 효심이 하늘에 닿아 얻게 된 결과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마시오!"
유자추가 전표를 주은비의 손에 쥐어주고는 보퉁이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보퉁이에는 소저 어머님께 다려드릴 약초를 조금 담았소! 집에 도착하거든 다려 드리시오. 기력을 북돋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오!"
"공자님...!"
주은비가 양손에 들린 전표와 약초보퉁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동안 유자추가 흑수채 근처 온 산을 헤집고 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무당산 혈투에도 유자추만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 모녀를 보살피기 위함이었으리라!
"이만 떠나보시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발(去者必發)이라 하지 않았소! 만남이 있었으니 헤어짐이 있는 것이고 헤어짐이 있으니 또 만나게 될 것이오!"
유자추가 빙긋 웃으며 태연한 척 문자를 읊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이 녹아있었다.
"흑흑... 공자님!"
주은비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리다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마차 안에서는 은의소소도 눈을 질끈 감은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차위로 한 발을 올리려던 주은비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이 울렸다.
"공자님의 마음을 몰랐던 건 아니에요! 제가 짐승이 아닌 이상 어떻게 유공자님의 눈빛을 모를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유공자님 품에 안긴다며 바우 오라버니가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애써 아무것도 모른 척 했었답니다! 흐흑..."
주은비가 마차를 잡고 오열했다. 그동안 주은비의 효성에 감복하고 유자추의 사내다움에 탄복한 산채의 모든 무리들이 두 사람의 별리를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속 깊고 사려 깊은 소저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소! 다 알기 때문에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이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시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오!"
유자추가 손짓을 하자 마부석에 앉은 사내가 고삐를 흔들었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산을 내려가고 모퉁이를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석상처럼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유자추의 곁에서 다른 사람들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병신! 머저리자식! 죽 쒀서 개 줘라!"
철도정이 괜한 고함을 지르며 제일 먼저 땅을 걷어차고 안채로 들어갔다. 그것을 신호로 한 사람 두 사람 소리 없이 흩어 졌다.
"그만 들어가요! 유공자!"
조화영이 유자추의 팔을 다정스럽게 끌며 다독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가슴이 아플거면서 왜 보내요? 유공자가 절대로 못 보내주겠다고 했으면 주소저도 처음에는 바우란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프겠지만 결국 유공자 사람이 됐을 거잖아요!"
조화영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유자추를 바라보았다.
"칼을 들고 피보라를 뒤집어쓰는 나보다는 바우라는 사람이 훨씬 더 주소저 어머님을 잘 돌볼 것이고 그런 사람 품에서라야만이 주소저는 행복을 느낄 겁니다. 내 곁에 있다면 평생 노심초사하며 살게 될것이오! 그리고 내년 봄 이후에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고...."
유자추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대장간을 차려서 행복하게 잘 살겠지요? 그렇지요 누님?"
"그럼요! 그렇지 않는다면 누가 하늘을 우러러 보겠어요! 유공자의 이런 마음은 저 하늘을 통해서 고스란히 주소저에게로 전해져서 주소저를 지켜줄 거예요!"
조화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처절한 고독을 가슴속으로 갈무리한 채 연인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주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유자추의 모습을 옆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철효민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주은비 모녀가 떠난 후 두 번째로 흑수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조화영과 한영이었다. 물론 모든 계획과 준비는 진소혜와 능소빈이 맡고 있었다. 임신 중인 조화영이 긴 여정에 무리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준비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보수를 두둑이 주고 근처의 의원도 한 명 대동하기로 했다. 이런 세심하고 사려 깊은 준비에 조화영은 몇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다 소혜에게 핀잔을 듣고 눈물을 그쳤고 한영도 깊숙한 눈빛으로 소혜와 능소빈의 준비를 거들었다.
"이젠 준비도 다 끝났으니 여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두령과 소혜도 이참에 동정호 구경이나 실컷 하고 돌아오세요!"
능소빈이 준비를 끝내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언니! 꼭 남말 하듯 하고있어!"
"으응? 내가 뭘....?"
소혜가 꽥 하고 고함을 지르자 능소빈이 왜 그러냐는 듯 소혜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만 갔다 오라니! 그게 말이 돼?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언니도 같이 가야지!"
"소혜 집에.... 나까지 간단 말이야?"
능소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버지도 만나보고 같이 동정호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그래도 어떻게..... 이번에는 그냥 두 사람만 갔다 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언니 안가면 나도 안가! 천호 오라버니 혼자 다녀오라고 해요!"
소혜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해요. 능소저! 소혜성격 잘 알잖아요! 능소저가 안가면 정말 안 갈거에요! 그럼 우리라고 어찌 갈 수 있겠어요!"
조화영이 미소를 머금고 거들자 능소빈이 아무 말 못하고 천호의 눈치를 살폈다.
"아유 언니! 그 멋대가리 없는 사람 쳐다보면 무슨 떡이라도 하나 던져줄 것 같아요? 아무 생각 말고 같이 가요!"
그렇게 해서 조화영의 악양행 준비도 끝나갔다.
"우리도 이참에 사문과 집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소 두령!"
화천옥과 신도기문, 정휴가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행의 뜻을 밝혔다.
"그렇게들 하시오! 모두들 궁금해 할 것이오."
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공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동생분도 오셨으니 같이 떠나는 게 좋지 않겠소?"
천호가 철도정과 철효민을 바라보고 의향을 묻자 철도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보다도 너희 둘은 어쩔 거야?"
구겨진 얼굴로 핑계거리를 찾던 철도정이 유자추와 형일비를 바라보았다.
"네놈 집에 가는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릴 걸고 넘어지느냐? 우리야 어떻게 하든 네놈 일은 네놈이 알아서 할 일이지!"
형일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한 곳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고 이곳 흑수채에서 제 맘대로 술 퍼마시고 늦잠 자는 생활이 몸에 익은 철도정은 엄격한 자기 가문의 법도를 따라 생활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온갖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알아챈 유자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다시피 점창과 공동은 여기서 너무 멀다! 가는데 만도 두 달이 넘게 걸리고 도중에 폭설이라도 만난다면 도착해서 인사만 드리고 와도 내년 봄이다. 그러니 여기서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무슨 사단이 나도 날 테니 그때 합류할 생각이다!"
유자추가 시종 미소를 지으며 철도정의 표정을 살폈다. 유자추의 말과 함께 구겨졌던 철도정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펴지며 완전히 득의에 찬 표정이 되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지?"
"그러든 말든 그게 네놈과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형일비도 철도정의 의중을 짐작하고 어떻게 나오나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놈들아 내가 니놈 둘만 이곳에 남겨두고 마음이 안 놓여 어떻게 발길이 떨어진단 말이냐?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네놈들 같이 고지식한 놈들이 무슨 수로 대처를 하겠느냐! 당연히 이 형님이 남아서 너희 두 놈을 보살펴야지!"
철도정이 청산유수처럼 내 뱉었다.
"기도 안 차는군!"
형일비가 헛바람을 내쉬었다.
"누가 누굴 보살핀다는 거야 지금! 여기서 오빠보다 더 모자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는 소리야!"
철효민이 쌍심지를 돋구었다.
"어쨌든 난 못 간다! 백여우 너는 두령 일행과 함께 내일 떠나라! 그리고 중도에서 헤어져 가문으로 돌아가라!"
철도정이 팔을 내저으며 꽁지를 말았다.
"그러면 나도 안가! 혼자 돌아갔다가 할머님 역성을 두고두고 무슨 수로 다 받아내란 말이야! 그러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철효민이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계집애가 어디서 죽치고 있겠다는 말이야! 잔소리 말고 넌 내일 떠나!"
"안 가!"
"떠나라니까!"
"안 간다니까!"
막상막하! 용호상박! 난형난제였다!
"어이구 내 팔자야!"
한참을 실강이 하다 씨도 먹히지 않자 철도정의 화살이 과녁을 바꾸어 날아갔다.
"야 이놈! 자추! 너 내 동생 어쩔 거냐?"
"무슨 소리야?"
웃음을 참으며 한참동안 철도정 남매의 대결을 지켜보던 유자추가 갑자기 날아오는 철도정의 뜬금 없는 질문에 얼른 웃음을 지우고 답했다.
"너 이놈! 며칠 전 내 생일날 아침에 우리 가문에서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셔질까 애지중지 키운 내 동생을 한참동안이나 안고 서있지 않았느냐?"
철도정의 한마디에 유자추와 철효민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어디서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퍼뜨리고 있어!"
유자추가 정색을 했다.
"흠흠! 그렇지? 얼토당토않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철도정이 만면에 승리감이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그 날 아침 망루에서 망을 보던 산적들이 모두 목격하고 온 흑수채가 다 아는 일이다! 오죽하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겠느냐? 그러니 이제 어떡할 작정이냐?"
철도정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유자추와 철효민이 날벼락을 맞은 듯 허둥거렸다.
"그건 미쳐서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는 날 구해주려다 그런 거지 무슨...."
말을 하던 철효민이 황급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막았다. 엉겁결에 자기 입으로 모든 사실을 시인한 꼴이 되어버렸다.
"어라? 난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망보던 놈이 말하길 아침부터 깊은 산 속에서 두 남녀가 다정하게 안고 있길래 유심히 봤더니 바로 너희들이라던데!"
철도정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몰아붙이자 철효민이 기가 막혀 발을 굴렀다.
'저 악마구리 자식!'
형일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지만 자신도 흥미진진하기는 남들과 마찬가지였다. 진소혜, 능소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형일비와 비슷한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을 지켜보며 애타게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단지 조화영만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내며 철효민과 유자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냐 이놈아? 온 산채가 다 알고 내년 봄이면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도 다 아는 사실이 될 텐데 어쩔 거냔 말이다?"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머리회전을 하는 철도정을 유자추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몰라! 앙앙...."
급기야 철효민이 밖으로 뛰쳐나가자 철도정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십년 먹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군!"
철도정이 트림을 커억 했다.
"에라 이 자식아!"
형일비가 철도정의 뒤통수를 냅다 갈겼고 트림을 하다 목에 걸린 철도정이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정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 도정동생?"
조화영이 깊숙한 눈으로 철도정에게로 다가왔다.
"아까 본인이 직접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철도정이 덤덤히 말하다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시오 누님? 누님이.... 누님이 월하노인역을 해 주시겠소.? 아이고 누님!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시오! 그래서 저 기집애 누가 좀 업어가게 해 주면 내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소!"
철도정이 조화영의 손을 두 손으로 덥썩 잡고 무릎을 꿇으며 조화영의 손에 고개를 파묻고 청승스럽게 주절거렸다.
퍽-
"나가 죽어라 이놈아!"
이번에는 신도기문이 철도정의 어깨를 걷어찼다. 철도정이 털썩 옆으로 쓰러지면서도 하던 짓을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조화영의 발끝을 잡고 다시 청승을 떨었다.
급기야 실내에 일장대소가 터졌고 더 견디지 못한 유자추도 온통 얼굴을 찡그린 채 밖으로 나갔다.
안채에서 달려 나와 뒤쪽 잡나무 숲에 당도한 철효민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온통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발을 동동 굴렸다. 두 사람만의 비밀이 될 줄 알았던 사실이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어 버렸다. 그 동안 흑수채에서 지내면서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왔다. 불가항력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 큰 처녀의 몸으로 사내의 가슴에 덥석 안겼으니 그 심정이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고 침착한 유자추를 볼 때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고생이 심했지만 유자추는 그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듯 무심히 행동하여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이유가 주은비소저 때문임을 알았을 땐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림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며칠 전 사랑하는 그녀를 위하여 찢어지는 가슴을 묵묵히 다스리며 진정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며 떠나보내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로부터는 잠자리에 들 때면 말에서 떨어지기 직전 그 사내의 품에 안겼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은밀한 즐거움이었는데 원수 같은 오빠 때문에 그것마저 빼앗겨 버렸다. 이제부터 당장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할 것이고 짖궂은 눈초리로 자신들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시선들은 어쩌란 말인가!
'어이구 원수!'
철효민이 발을 구르다 옆에 있는 나무 둥치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빚은 꼭 갚아 주고 말 거야 이 원수 덩어리!"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철효민이 나무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자신이 나온 조금 후 안채에서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오고 있는 유자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자추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 잠시 안채를 돌아보며 머리를 흔들던 유자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주은비가 떠나가던 길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깥채 한쪽 바위 위에 앉은 유자추가 망연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바위의 일부가 되어갔다. 필시 주은비를 생각하고 있음이랴!
사내의 뒷모습에서 피어나는 고독의 냄새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철효민의 가슴에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철효민의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파왔다. 그 아픔이 저 사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것이 안쓰러워서 인지 아니며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저 사내를 지켜보는 자신이 안쓰러웠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철효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만약 자신이 저 사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앞으로 정말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저런 사내는 쉽게 정을 주지도 않지만 또 쉽게 정을 끊지도 못한다. 어쩌면 평생을 가슴속에 그녀를 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사대세가의 한 곳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자신이 난생 처음 주은비라는 그 아가씨가 한없이 부러웠다.
내일 떠나는 두령 일행을 따라 떠나야겠다! 갈림길까지 열흘은 동행할 수 있다. 그 동안 진소혜와 능소빈 두 여자에게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것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저 사내의 가슴을 눈꼽만큼이라도 열 자신이 없다. 그러려고 했다간 오히려 저 사내의 가슴은 조가비처럼 완벽하게 닫혀버릴 것 같다.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많이 나아져 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뒤에서 지켜만 보지 않을 것이다. 철가장의 위명은 여자들로부터라는 말을 절실히 실감하게 해 줄 것이다!
철효민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바위처럼 굳은 유자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궁상은 내년 봄까지 뿐이에요! 나는 당신처럼 그런 멍청한 사랑은 하지 않는답니다!"
철효민이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 34장. 통천문(通天門)에 이르는 길
그대!
강함을 원하는가?
진정한 강자가 되고 싶거든 가슴속의 모든 것을 비워라!
분노도! 원한도! 복수심도!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흘려버리고 부드러움 속으로 녹아들어라!
일체의 집착을 놓아버린 부드러움만이 그대를 통천문에 이르게 할지니....
백회(百會), 대추(大椎), 명문(命門), 장강(長强)......
염천(廉泉), 천돌(天突), 옥당(玉堂)......
중정(中庭), 거궐(巨闕), 중완(中脘), 신궐(神闕).....
천부(天府), 협백(俠白), 척택(尺澤), 공최(孔最)......
"어헉!"
머리 속에 각인되는 울림으로 인하여 천호가 단말마를 지르며 잠을 깼다.
"무슨 일이오. 두령?"
악양으로 향하던 첫날 밤, 어느 객점에서 여장을 풀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던 한영이 놀라 일어나며 천호를 바라보았다. 땀에 흥건히 젖은 천호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꿈을 꾼 것 같소!"
"악몽이었던 모양이군요?"
한영이 천호에게 면포를 내밀었다.
"꿈이라기 보다는 머리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소! 머리 속이 온통 울리는 듯한 큰 소리였소!"
천호가 면포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방금 전 머리 속을 울리던 목소리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통천문!“
천호가 벼락 치듯 외쳤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소리 중 통천문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통천문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은의소소 모녀와 유자추 외 다른 사람은 통천문에 관한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한영 역시 영문을 몰라 하였다.
"얼마 전에 주은비 어머님으로부터 뭔지 모를 한 줄기 공력을 전해 받았소. 통천문에 이르는 무공이라 하였는데 그 부인도 내력을 잘 모르는 것이었소. 단지 내가 인연이 닿을 것 같다며 전해준 것이오!"
천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듯 벽을 응시했다 .
"통천문에 이르는 무공이라...?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두령의 무공에 무슨 상승효과를 더할 수 있는 무공인가요?"
한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천호를 보며 말했다.
"글쎄요! 무공이라기 보다는.... 어떤 한 가지 의념(疑念)을 진기로 만들어 그것을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게 한 것 같소.... 지금 내 느낌이 그렇소!"
천호의 설명이 계속 될수록 한영의 표정은 더 어리둥절해 갔다.
"생각을 전할 목적이라면 비급이나 서책으로 만들어 전하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모를 일이군요!"
한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오라버니?"
소혜와 능소빈이 걱정스런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고 철효민도 소혜의 손에 이끌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이른 새벽에 옆방에서 들리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소리에 잠을 깬 여자들이 서둘러 옷을 걸치고 건너온 것이다. 다만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조화영만이 세상 모르고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을 끝으로 문이 닫히자 한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군요! 두령의 말대로 무슨 공력도 아닌 의념을 글로 남기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전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설명을 들은 세 여자들도 한영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갈 모르겠으나 머리 속에 곧바로 전해진 생각인지라 어떤 문장이나 글 보다 더 확실하고 직관적인 것 같았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아주 강렬한 전달이었소! 아마도 그런 전달이 목적이었던 것 같소!"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그럼 통천문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있나요?"
능소빈이 두 눈을 반짝이며 천호를 주시했다.
은의소소의 말대로 천호의 몸에 쌓인 이질적인 두 가지의 공력이 섞이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라면 통천문에 들면 그것을 완성 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조바심이 일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통천문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는 듯 했는데 백회(百會), 대추(大椎), 명문(命門).... 등의 구절이 머릿속에 울렸소!"
"그건 몸속에 있는 혈도의 명칭이 아닌가요?"
철효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소! 그전에 분명히 통천문으로 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그 길을 일러주는 것 같았는데 엉뚱하게도 그건 혈의 이름이었소! 그렇다고 그 혈을 따라 무슨 진기가 흐른다거나 하는 느낌도 없었고...."
천호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난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꼭 그것이 혈도명 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아주 옛날에는 그런 이름의 지명이 있었을 지도 모르죠! 사람의 혈을 가리키는 이름 역시 아무런 의미 없이 지었겠어요? 그런 지명과도 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소혜의 색다른 발상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우리는 그것이 오직 혈의 명칭이라고 생각했지 소혜처럼 지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군요! 소혜는 무공을 모르기에 어쩌면 가장 선입견 없이 판단 할 수도 있는 일이에요!"
능소빈이 또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펼치며 설명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건 앞으로 천천히 더 알아보기로 합시다. 나 때문에 모두 새벽잠을 설친 것 같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자 두시오!"
천호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다는 사람들에게 좀 더 휴식을 취하도록 권했다.
"우리가 무슨 일어났다 머리만 기대면 다시 잠들고 하는 화영 언닌 줄 알아요? 이젠 잠이 싹 달아났어요!"
소혜가 웃음을 머금고 한영을 쳐다보았다.
"한영 아저씨나 저 방으로 가 보세요! 화영 언니는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데 그새 누가 업어갔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얘기나 좀 하고 있을 게요."
소혜의 말이 끝나자 한영이 겸연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그런 한영을 보며 세 여자가 모두 킥킥거리며 입술을 가렸다.
"이젠 잠도 더 안 오고 날이 새려면 멀었으니 오라버니에게서 훈련받던 때 얘기 좀 해 줘요. 정말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도진화나 언니까지도 개 몰듯 내몰았나요?"
소혜가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능소빈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말도 마! 그때는 개 몰이도 그런 개 몰이가 없었어!"
능소빈이 맞장구를 치며 입술에 침을 바르자 천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였고 철효민이 킥 하고 실소를 흘리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얘기를 경청했다.
지옥보다 열 배는 더하다 싶은 기간이었기에 지나고 보니 그만큼 얘깃거리가 많았고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고 하면 모두들 열흘 밤낮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능소빈 역시 마찬가지로 열기 띤 목소리로 얘기를 풀어갔다. 소혜와 철효민이 감탄사와 탄식을 섞어가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자 그곳에 더 있지 못한 천호 역시 한영처럼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그럼 그때 언니 손을 잡아 일으켜준 남자는 유자추 공자님 뿐이란 말이야?"
소혜가 슬쩍 유자추의 얘기로 말머리를 돌렸고 능소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이란 게 알고 보니 여자보다 훨씬 나약한 존재들 같더라구! 겁도 더 많고.... 특히 철도정 그 인간은 제일 겁이 많았어...."
"푸-후후"
소혜가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그렇게 애쓸 거 없어! 그 원수덩어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거야 이젠!"
철효민이 헤아려주는 사람이 있어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도 유자추가 제일 의연하고 늠름했었지!"
능소빈 역시 소혜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연스럽게 유자추의 얘기를 꺼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는 상황에서도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끌다시피 기어가서 우리들에게 물을 챙겨 먹였고 또...."
그렇게 능소빈과 소혜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며 유자추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가슴깊이 감추어진 아픔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 말했을 때 철효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고마워요 언니! 그리고 소혜!"
철효민이 눈물을 닦았다
"나 유자추 공자님을 사모하는 것 같아! 하지만 주은비 소저만이 가득 담긴 유공자님의 가슴을 열 자신이 없어. 그래서 너무 괴롭고 안타까워!"
철효민이 능소빈과 소혜에게로 쓰러지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넌 속도 깊고 용기 있는 기집애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려봐.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유공자님도 속이 깊은 사람이니 결코 네 마음을 저버리진 않을 거야. 사랑이란 물과 같아서 결국 더 깊고 넓은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야!"
소혜가 철효민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