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장에서 16절, 16장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의 질문한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이렇게 답변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목회적인 질문을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에게 한 것이고 사도바울은 편지에 그 내용을 담아서 고린도교회에 전달했습니다.
8장에서 16장까지는 총 11개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중에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우상의 제물에 관한 거예요. 8장 1절부터 11장 1절까지 우상의 제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답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8장 1절에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이라고 해서 8장 1절을 시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지금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됐을까요? 사도행전 15장 29절과 요한계시록 2장 14절, 20절 이렇게 세 구절을 보면 초대교회는 분명하게 우상을 섬기는 것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금지했어요. 이렇게 금지한 사실이 분명한데 이 고린도교회가 또 이렇게 물은 겁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 하면 고린도 교회가 있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상황과 많이 긴밀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인 거예요. 고린도 교회와 같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파는 고기들은 어떻게 유통 과정을 거치냐 하면 신에게 의식을 한 이후에 그 물건을 시장에서 이렇게 팔아요. 워낙 신전이 크고 그리고 신전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사제들이 많아서 신전에 제물로 바쳐지는 양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을 다 소화 못하고 시장에 내어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신전을 유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되느냐 먹지 않아야 되느냐.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이 당시에 대부분의 우상을 섬기는 신전들에는 도축장이 있었어요. 도축장 얼마나 많이 고기를 잡았으면 도축장이 있었겠어요?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그러니까 길드라 그러죠 길드 직업동맥 이 당시에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길드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각 길드가 섬기는 그러니까 직업동맹 단체가 섬기는 우상이 달랐던 거예요.
우리 상인 일종의 상인회죠. 우리 상인회는 누구를 우리 상인에는 누구를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재물이 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 재물은 상업과도 연관성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상인들이 상인들이 하나님 우상에게 드렸던 재물들의 유통 권한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유통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그 드렸던 제물을 유통을 시켰던 거예요.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인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격년제로 도시 대항 운동회인 이스미안이라는 운동 경기가 있었어요. 대회가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가을 올림픽 같은 이런 대회가 세계 4대 축제와 축제 중에 하나가 이스미아. 근데 이스미아는 우리가 잘 들어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 축제에 참석하고 또 축제는 당연히 신전의 제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신전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를 드렸던 고기들을 많은 참여했던 사람들이 먹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고린도교 도시에 살면서 우상에게 들여진 제물을 먹지 않기란 어려울 정도로 이건 상업과도 연관되고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고 종교와도 연관되어 있던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아요. 분명히 이제 초대교회는 금했어요. 우상숭배를 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금했지만 이게 도시 가운데 너무 만연이 되고 나니까 이 문제가 자꾸 대두가 되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양심이 같이 읽을 일이고 신앙적으로 되게 괴로웠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식적으로 바울에게 문의를 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지식이 있는 자들의 이야기인데, 이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었어요. 어떤 지식이냐 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지식이 있는 믿음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리 크리스찬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그 우상의 제물이 그리스도인들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주로 이 부류의 사람들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약한 자들인데 이들은 옛날부터 우상을 섬겨왔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다가 예수를 믿었지만 이 우상을 섬기는 습관을 못 버린 거죠. 앞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상 습관을 버렸어요. 버려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심지어 이 우상의 제물이 자기를 더럽게 하는 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계층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우상숭배에 대한 문화를 못 끊어버리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져 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신앙이 있으니까 이런 거죠. 우상숭배 예물을 끊을 수 없어요.
왜 직업적으로 길드라는 상인의 조직 안에 자기가 속해 있으니까 그들과의 인연을 끊기도 어렵고 도시 문화가 즐기는 문화 축제도 거리를 두기 어려워서 축제에 참석하기도 하고 유통되는 것이 우상의 재인 줄 알면 먹긴 먹어요. 먹는데 문제는 자꾸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됐던 거예요. 차라리 누가 명확하게 말을 해주면 좋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더 나아가서 이제 세 번째 그룹이 등장하는데 이 세 번째 그룹은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이에요.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가만히 봤더니 구조를 다 알잖아요. 즉 우상의 제물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이게 분명히 우상을 금지하라고 새 가족 교육을 받았어요. 근데 정작 고인들은 우상의 죄를 막 먹어요. 그러니까 이 새 가족들이 시험에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문제가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고린도 교회에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되게 간단합니다. 약한 자들을 위해서 지식이 있는 자들이 자유나 자기의 지식을 따라서 행동하기보다는 약한 자의 유익을 위해서 결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한 자가 시험 들지 않도록 약한 자에게 유익하도록, 약한 자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이 내린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인 겁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경위에서 지식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결정했어요. 8절에 보면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지 못하느니 또 9절에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미 우상의 제물을 금했지만 이 삶의 형편상 상황상 우상의 제물을 금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 문제가 교회 안에 서서히 대도적으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해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물었을 때 사도바울의 결론은 지식을 따라 결정하지 말고 연약한 자의 삶을 따라 그들의 믿음을 따라 결정하라는 거예요. 내가 모든 지식을 다 가졌고 우상의 제물이 나에게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먼저는 예루살렘 공예의 결정을 잘 따르고 그 따름 위에 연약한 자들이 시험 들지 않도록 결정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주일도 자유가 있는 날이에요. 모두가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나누면 다 자유로워져 날에 매이지 않아요. 원칙적으로 그리고 날에 매이면 안 돼요. 절기에도 매이면 안 되고 왜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구석으로부터 다 벗게 한 거예요. 구약은 우리를 절기와 날들에게 다 묶은 거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기본적으로 이 묶여 있는 것들이 다 풀려야 돼요. 그래서 자유자가 되는데 이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들이 나는 지식이 있고 나는 믿음이 있어서 나에게는 아무 해가 되지 않지만 교회의 운영이나 연약한 줄의 믿음이나 이게 문제가 된다면 그 행동을 멈출 만한 더 성숙한 결정과 성품을 가지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인 거예요.
더 성숙한 결정, 더 성숙한 결정들을 하는 고린도 교회가 되어서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우상의 제물 문제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다. 완전 다른 여러분 우상을 숨겨도 죄를 짓지만 우상의 제물의 문제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건 그것도 죄 짓는 거라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다고 해서 함부로 행해서 이 세 가족의 요즘 말로 하면 세 가족 세 가족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도 죄니까 그런 말과 행동을 멈추라는 것이 바울의 변론입니다.
13절에는 자신은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우상 제물을 먹지 않겠다. 그러니까 형제 사랑이 십자가가 더 큰 거예요. 율법보다 십자가가 훨씬 더 커요. 말씀보다 십자가가 훨씬 더 커요. 사도 바울은 이걸 알아서 이 답들을 고린도 교회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우상은 숭배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에요. 제물을 먹어도 아무 영향을 못 끼쳐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낙심을 가져온다면 그 행동을 하는 것도 멈추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형제들의 사랑에 의해서 형제 사랑에 의해서 제한당하는 게 정상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믿음이 성숙했고 여러분이 모든 결정에 양심을 따라서 결정을 잘할 수 있는 단계가 올라갔어요. 근데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위치가 못 돼요. 작은 것에도 시험에 들고 실족한다면 형제 사랑을 위해서 우리의 그 자유를 좀 멈추라고 바울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집중해야 되고 이웃도 잘 살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결과적으로 결국으로 그래서 교회를 다니다 보면 의외 그것 때문에 시험 드는 사람이 많아요. 저것 때문에 시험에 들까 여러분 다 통과하셨지만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는 되게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하고 조심해야 된다.
심지어 바울은 우상 제물의 문제 다른 문제가 아니라 우상 제물의 문제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건 결국 죄다 범죄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못한다는 성숙한 믿음을 가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 앞에 떳떳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어요. 이것으로 새 가족이 시어머니를 들었다면 이건 범죄라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사랑이라고 표현해 사랑하는 관점에서 하지 말아야 된다. 하지만 바울은 좀 더 세게 이건 죄다 딱 규정하는 거예요. 죄다 너희는 하지 말아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고 있는데 다음 주 한 번 더 하고 이렇게 마치게 돼요. 여러분 우상은 타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됩니다. 단 우상의 귀물들은 신성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상의 기물을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장소도 그렇고 그들이 사용하는 기물도 그렇고 신성한 게 아니에요. 거기에 신성성을 부여하거나 제물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인 거예요.
바울은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도 금해야 되지만 재물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험을 두고 서로 낙심한다면 그것 또한 조심하고 주의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상이 무섭거나 우상의 재물이나 우상의 기물들이 신성하라고 여긴다는 믿음이 아직도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로 못 돌아간 거예요. 인간이 만든 것들을 두려워하고 인간이 만든 신을 숭배하는 것이 결국 신인 거잖아요.
근데 그것을 그들이 섬기는 장소를 두려워하고 기물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주 우리의 믿음이 담대하지 못하거나 연약함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워낙 귀신 문화에 많이 노출돼 있어서 그런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오후 예배를 기점으로 다 끊으세요. 우상의 제물에는 신성성이 없습니다. 우상의 기물에도 신성성이 없어요.
그래서 가끔 우리 교회 여기 왔을 때도 그랬는데 처음 예수 믿는 분들이 집에 뭐 잔뜩 있잖아요. 굳이 그걸 자기들이 깨면 되는데 목사 보고 깨달라는 거예요. 가서 이상 단지죠 단지도 깨고 불에 태우고 해요. 왜요? 그 사람들은 거기에 신성성을 두는 거예요. 재물의 신성 기물의 신성성이 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사실 잘 마음에 새기고 신앙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