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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 진리 (9)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잠 16:9
I. 서론
“Life is C between B and D.”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란 B와 D 즉, Birth (출생)과 Death (죽음) 사이에 있는 C, Choice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장 폴 샤르트르가 한 말입니다. 샤르트르는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다. 사물은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펜의 본질은 “쓴다”는 것이고, 의자의 본질은 “앉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이 만들어질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샤르트르의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틀린 부분도 있고,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1)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틀린 부분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샤르트르는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사물은 인간이 그 사물을 만들 때부터, 존재의 본질이 정해져 있다고 봤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도록 사는 것입니다.
2)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면서 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한적이라고 말씀을 드린 이유는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 것인가, 어느 부모를 만날 것인가, 유럽인, 미국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어느 인종으로 태어날 것인가, 남자로 태어날 것인가 여자로 태어날 것인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장애인으로 태어날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요소들이 결정되어 태어나지만, 인간은 여전히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선택을 하면서 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선택은 중요한 것도 있지만, 어떤 선택은 중요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까? 내일 골프를 칠까 말까? 이런 것들은 중요한 선택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를 먹든 만두전골을 먹든 그것이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내일 골프를 하루 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인생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선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노년을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서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선택들은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심을 하고, 상담을 받기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는 것은 그 선택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인간이 계획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인간이 계획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이 세우는 계획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역할, 선택, 책임)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 (혹은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억지로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는 것은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역할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어도, 인간이 거부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재미 있는 것은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에 손을 드느냐에 따라서 장로교 교인이 되느냐 감리교 교인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신학과 감리교의 신학이 여기에서 나누어지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장로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고, 감리교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더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장로교 신학이고, 2) 예수님을 믿을지 안 믿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감리교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몇 백 년 동안 싸워왔습니다.(길게는 천오백 년 이상)
그런데,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신학 모두 성경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지 말고, 그 신학이 가지는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기를 권면드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장로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고 인간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감리교에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한 쪽 신학만으로는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 신학을 모두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먼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고, 아브람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까?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 살았던 단군을 왜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할지를 결정한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토기장이” 비유를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렘 18:1-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항아리를 만들지 밥그릇을 만들지 요강을 만들지 자신이 결정을 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냐고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에게 중요한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구원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 6:37-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으로 수요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으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은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엡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혹은 선택)을 강조하기 위해서 4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이야기 하고 있고,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성경에 너무나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명확히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자들에게만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 신학이 이러한 성경 구절 위에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감리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 인간의 자유 (혹은 선택)를 더 많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감리교 신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성경을 자세히 봐라. 하나님의 뜻은 몇몇 사람만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기 원하신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감리교 신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복음을 듣고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선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감리교 신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믿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로교 신학과 감리교 신학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요?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둘 모두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3. 마지막으로, 두 요소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혹은 선택)를 조화시키는 것은 모순되게 보입니다. 한 쪽을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쪽을 포기하는 것보다, 두 요소가 가지는 장점을 동시에 붙잡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두 요소 모두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요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피해야 할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로교 신학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의 견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감리교 신학처럼 인간의 자유를 강조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성화”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성화의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삶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웨슬리가 18세기의 영국을 부흥시키고 감리교를 창설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 않습니다. 웨슬리가 살던 당시, 일반 서민의 평균 수입이 연간 30파운드였을 때, 그는 최대 1,400파운드까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평생 검소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웨슬리는 연간 소득이 30파운드였을 때, 28파운드로 생활을 했고, 2파운드는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연간 소득이 3배가 되었을 때에도, 28파운드로 생활을 했고, 3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연간 소득이 90 파운드가 되었을 때에도, 28파운드로 생활을 했고,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연간 소득이 1,400파운드가 되었을 때에도 웨슬리는 여전히 30파운드 정도로 살았으며, 1,400파운드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1791년, 웨슬리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재산은 그의 주머니와 옷장 서랍에 있던 동전 뿐이었습니다. 웨슬리가 남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언제라도 내 책들을 내 뒤에 남겨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책 이외에 다른 것들을 남겨 놓는다면, 나 자신의 두 손이 나를 고발할 것입니다.” 웨슬리가 일평생 이렇게 검소하게 산 이유는 그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웨슬리가 옥스퍼드 대학에 있는 동안, 자신의 방에 걸어둘 그림을 사기 위해서 상점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하녀 가운데 한 명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몹시 추운 날이었지만, 그녀가 입은 것이라고는 얇은 마직으로 된 옷 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불쌍한 마음에, 하녀에게 코트를 하나 사 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자신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으로는 코트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림을 사기 위해서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웨슬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돈을 쓰는 방식을 좋아하시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과연 나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실까? 가난한 여인을 추위로부터 막을 수 있는 돈으로 내 벽을 장식하는데 사용하고 말았구나!”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웨슬리는 자신을 위한 경비를 제한하고 일평생 산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신의 결단을 유지하고자, 1775년부터, 언약갱신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언약갱신예배가 한국으로 와서 “송구영신예배”가 된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한 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갱신예배 때, 드린 기도가 바로 “언약 기도”인데, 그 내용이 오늘 주보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당신의 것입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맡겨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곁에 두소서. 저를 활동하게 하시거나 고난 받게 하소서. 당신을 위해 저를 사용하시거나 쉬게 하소서. 당신을 위해 저를 높이거나 낮추소서. 저를 꽉 차게 하시고 저를 텅 비게 하시며 제게 모든 것이 있게 하시고 아무 것도 없게 하소서.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이 기쁘신 대로 쓰시도록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영광스럽고도 복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당신은 제 것이며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지금 이 땅에서 맺어진 언약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2) 이제, 우리가 피해야 할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할 때,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죄를 좀 지어도 천국에 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뉴스를 보면, 비리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 중에 장로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왜냐하면, 한국에서 큰 교단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신학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굳이 힘들게 전도하지 않아도 그들은 어차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전도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고, 성령의 생각이 아니라 사탄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이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선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감리교 신학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강조할 때도,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인간의 역할을 신학에서 강조하다보니, 내가 얻는 구원은 결국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만큼 헌신했기 때문에 교회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과 내 노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나중에 치매가 걸려서 내 신앙에 대해서 헛소리를 하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는데 내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장로교 신학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자리에 오시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장로교인이고, 내가 선택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시면, 감리교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둘 다를 지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곳에 올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그런 환경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결정을 해서 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억지로 끌어다가 앉혀 놓은 것은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감리교인은 내가 계획을 세우는 것을 강조하고, 장로교인은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장로교 신학자들에게도 욕을 먹고, 감리교 신학자들에게도 욕을 먹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목양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은 감리교 신학을 따르고, 구원은 장로교 신학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세우는 계획은 여러분이 세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내가 세운 계획이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내 개인과 가정의 앞날을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