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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51211a (말씀의 주권)―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2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다윗의 씨로 하면 반드시 죽어야 될 이유가 성사가 되는 겁니까?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왜 다윗의 씨로 안 죽고 살아 있으면서 왜 죄인을 구원하지 못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다윗에게 주신 언약, 약속에 따라서만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창세전, 사전에 이미 의논된바가 있어요. 어떻게 의논하느냐 하면 언약 주어진 대로만 구원되기를 그렇게 되거든요. 다윗에게 언약 주어진 대로 하기, 어떤 의미에서 나를 구원하고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고 언약 자체를 건져 내기 위한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언약을 가지고 저를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언약이 덮쳐버리고 언약이 삼켜버리면 언약 구원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만약에 공사장에 포클레인이 있는데 공사장에 그런 일이 있거든요. 사람이 술 먹고 넘어졌다고 하면 그게 포클레인 아니면 못 건진다고 할 때 포클레인 기사가 술 먹은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내서 살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당신은 포클레인 기사이면서도 그렇게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높네요. 라고 할 때 그 포클레인 기사가 하는 말이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작업장에 가서 일 해서 일당 받아야 되는데 당신이 술 먹고 공사장에 엎어져서 오늘 일당 다 날렸어! 당신 때문에 손해 많이 봤어! 굉장히 기분 나빠! 라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칭찬은 그 사람의 심정도 모르고 칭찬한 샘이 되죠.
그 사람은 이 포클레인 가지고 자기 업무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술 먹은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이미 사전에 언약되었는데 언약대로 실시하는 게 더 중요해요. 인간의 구원이 중요했을 것 같으면 애초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번 실수 할 수도 있지 그 선악과 따먹었다고 추방해 버리고 두 번 다시 그것도 얼마나 다지고 다집니까? 행여나 다시 돌아올까 싶어서 아주 확답을 주잖아요.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생명나무와 선악과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훼손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생명나무 남았죠. 이거 손 타지 말라고 주께서는 막는 겁니다. 이래도 인간이 중요합니까? 인간이 중요해요? 생명나무가 중요해요? 생명나무가 더 중요하잖아요. 생명나무가 생명나무의 값을 하기 위해서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피조물, 인간이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1장 16절에 분명히 나와 있죠.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을 비롯하여 마귀까지 모든 피조물은 창조된 겁니다.
강의 시작한지 3분밖에 안됐어요. 이것 가지고 세상에 나온 모든 신학들을 비교해 보세요. 방금 이야기한 짧은 것, 인간위주가 아닌 생명나무 위주, 이것을 가지고 시중에 나와 있는 기독교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전부 다 비교해 보세요. 그들이 맞는가? 다 틀렸죠. 뭐 성경 가지고 오묘한 신학과 교리를 만들어 봐야 하나님이 딱 한마디 합니다. 그거 왜 만드는데? 그거 왜 공부했지? 누구 좋으라고 공부한 거야? 너 좋으라고 공부한 거야? 누구 좋으라고 공부한 거야? 그런 질문에 인간은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네가 신약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했다는 그 의도 안에는 하나님께서는 추방하시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라는 것이 안 들어 있다고 생각되나? 내가 보기에는 들어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인간을 추방했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작대기를 그것도 참기름 부은 작대기를 미끄러운 작대기를 어쨌든 붙잡아서 기어이 내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작대기만 살살 올려주시면 이 지옥 같은 질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라는 그런 강력한 집념 같은 것이 교리나 신학에 담겨 있습니다.
강도가 어떤 교리를 알았죠? 거지 나사로가 무슨 교리, 어느 신학교 나와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 세리와 창기가 신학교 몇 년 공부했어요? 그 삭개오라는 세리는 평소에 신학을 많이 했겠어요? 삭개오가 알게 된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돈만 챙기고 돈만 아는 이 세리라는 직업조차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주께서 의도해서 만든 것 맞죠? 이런 마음자세뿐 이었어요.
신학을 하던 하지 않던 관계없이 지금 내 이것은 주님의 솜씨입니다. 라는 고백, 예수님이 옴으로서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은 이 집이 세리 네 집이 아니고 처음부터 누구의 집이었다? 예수님의 집을 주님이 접수해 가는 겁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던 마르다 마리아는 것을 몰랐어요. 오빠가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되살아난 뒤에 그래서 그것을 간파한 겁니다. 아, 오빠는 안 죽을 수 있는 오빠가 아니라 필히 죽어야 했고 거기 누이동생 마르다와 나는 반드시 거기 예수님에게 항의해야 했고 그 틈에서 예수님은 철없는 우리 때문에 울어야 했고 주님께서 오빠를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셨다는 것, 바로 이 사실을 요한복음 11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윗 언약인데 왜 꼭 죽어야 되죠? 살아서 죽음 없이 죽음을 보지 않고 다윗 언약을 완성시킬 수 없었단 말입니까? 완벽한 주님이고 완벽한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신데 그 말씀 다 지키면 되잖아요. 왜 죽음이 필요냐 말합니까? 왜 다윗의 씨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로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체결된 그 언약 자체가 더 중요한 겁니다. 이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잡겠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말씀의 주권”입니다.
말씀의 주권이라는 말을 잘 안 쓰는 단어처럼 느껴지죠.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의 주권이라는 말 대신에 무슨 주권을 많이 사용하느냐 하면 주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다른 주권과 차이 나는 것을 알고 난 뒤에 이 말을 써야 돼요. 그러면 주님의 주권과 뭐가 비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가 아니면 달라야 되는가를 달라야 된다면 그 차이점이 뭔가를 알고 주님의 주권을 써야 돼요.
이 차이점을 모르고 쓴다면 주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쓰던 주의 주권을 쓰던 같은 뜻이잖아! 아무거나 쓴다고 해서 어느 것이 맞고 틀렸다는 것이 가능하냐? 이것이 궁금할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에 현재 우리가 있는 입장에서 보지 말고 반드시 성경 속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수용을 하고 그 이스라엘 속에서 이 성경을 봐야 돼요.
왜?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이니까요. 이방인들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돌 감람나무입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야 구원돼요. 로마서 11장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참 감람나무가 어디 입니까? 이게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데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지난날의 이스라엘로 모든 의미가 다 했다는 것도 아니에요.
이미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같이 자신의 현재의 전 모습을 지나 간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를 대신해서 다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무엇을 펼쳐 보여 준다는 말이냐? 이스라엘이 그들이 하나님의 무슨 주권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이 말입니다. 주님의 주권이겠어요? 하나님의 주권이겠어요?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여러분이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되신, 주라고 오신 예수님이 유대인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은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주님의 주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이죠. 그러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누구를 죽였다? 주님의 주권을 짓밟은 게 되죠.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말이죠. 요새 한국교회 보세요. 전부 다 하나같이 전통이라고 주장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하잖아요. 순 순복음도 마찬가지이고 전부 다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을 또 달리 이야기해서 그들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고 합니다.
뜻을 알고 사용해야죠. 뜻도 모르니까 사용하죠. 성경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아니에요. 예수님 중심 사상이에요. 그러면 왜 그들은 하나님의 중심 사상을 생각하느냐? 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교리? 삼위일체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시아버지 세 명 섬기니라 바빠요. 성부 섬기면 성자, 성령이 상대적으로 소홀해 질것이고 성자를 높이면 상대적으로 성부, 성령이 삐질 것이고 성령 섬기면 성부, 성자가 삐지고 이 어느 장단에 균형을 맞춰야 됩니까?
기껏 하는 것이 성부 성자 성령께 다 영광 돌립니다. 하면 성령이 순서 왜 나를 세 번째에 하는 거야? 김영삼 대통령 죽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의식을 천주교부터 할까요, 기독교가 할까요? 원불교가 할까요? 가위 바위 보 한 겁니까? 어느 순서대로 해야 돼요? 뭐 동등이라고요?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 낸 상징 세계에서 순차라는 것은 기본인데 똑같이 한다고 그게 동등이 될까요? 먼저 내 민 그것이 아무래도 뉘앙스로 우선인데 인간의 언어에서 인간의 인식 자체가 서열 세우는 인식이에요. 순서 세우는 인식입니다.
엄마는 형이 좋아? 내가 좋아? 그야 엄마는 다 같은 자식이니까 형 좋고 너도 좋지! 하면 그러면 동생이 뭐라 합니까? 왜 형을 앞장세우는데? 그래그래 그럼 바꿔 줄게! 너도 좋고 형 좋지! 마침 그때 형이 들어왔다면 엄마, 왜 나를 뒤에 세우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의식이 순서적이고 앞장서야 성공이고 뒤에 서면 패배라는 의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야곱으로 하여금 요셉의 두 아들을 자리 바꿔서 한 것이 아니고 자리 안 바꾸고 어긋맞게 했잖아요. 왜 어긋맞게 했습니까? 그 의미가 뭐겠어요? 이렇게 바꿔서 해도 되는데 므낫세 저리가! 에브라 이리와! 둘째를 밑에 세우고 할 수 있는데 왜 남들 다 보는데서 둘째를 둘째 자리에 첫째를 첫째 자리에 해 놓고 왜 바꿔치기를 하는데요?
언약과 인간 사이에는 이게 어긋맞은 쉽게 해서 안 맞은 충돌, 다툼 그리고 왜곡, 곡해, 오해가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려면 오해를 거치고 난 뒤에 그 내용을 다시 수용을 해 줘야 돼요. 논리상 맞죠. 오해가 있으면 오해를 건너뛰고 그 오해를 넘어서 그 진짜를 진리를 수용해야 되는데 인간이 그렇게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안돼요.
왜냐, 오해를 건너가면서 절대로 자기 오해를 오해라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아, 이게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나는 부족합니다. 해서 부족한 것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니 내가 얼마나 참 제대로 된 사람이야! 라는 생각이 이게 사라지겠어요? 아니면 없어지겠습니까? 사람 속에는 자기를 어떤 식으로 부정하는 요소에 대해서 그것을 극히 거부하는 요소가 최후에 담겨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이 말을 우리가 감히 덤벼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 있는 자리를 내가 시작한 자리를 내가 출발한 자리를 이미 틀려먹은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내 생각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틀려먹었다면 안 틀린 나는 뭐냐를 따로 구비되어 있어야 되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생각의 전부 인데 내가 만약 틀렸다면 무슨 기준이 있어서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 안 틀린 것을 알고 그 다음에 틀린 것을 말이야 되는데 안 틀린 것을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안 틀리는데 어떻게 틀린 게 나오느냐 이 말이에요.
틀린척해서 하는 것이 틀린 것이죠. 드라마에 보면 짜증나서 잘 안 보는데 정말 짜증나서 보는 게 있어요. 네가 돈 받고 은실씨를 죽였잖아! 그러니까 돈 받고 했다. 핸들 같이 꺾었다고 돈 10억 받고 했다. 뭐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해도 기어이 나는 끝까지 잘못 없다고 하는 겁니다. 누가? 드라마 이야기하는 겁니다. 금복이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늦게 들어와 모르지만 돌아온 황금복이 오늘 이 시간 마지막 회 끝났어요. 7시 15분부터 SBS에서 합니다.
그렇게 잘못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잘못을 안 했데요. 괴물이 들었다고 해야 이해가 돼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처음부터 내 주인이 내가 아니었다는 그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다윗의 언약에 보면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죽이는 방법이 본인이 하나님 본인이 죽이는 방법 밖에 없어요. 다윗의 씨로 인하여 죽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교리니 언약이니 신학이니 어떻게 하면 열심히 하면 구원받겠다! 하는 이 모든 구원에 대한 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전부 다 추방 대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본문 보면 다 지옥 가는데 성경에 주기는 왜 줬느냐? 이게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말씀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주권은 왜 뺍니까? 주님의 주권은 그냥 나오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주권이 십자가에서 부정당하는 현장에만 주님의 주권이 나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래요? 주님의 주권을 믿을래요? 주님의 주권을 믿을래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주권은 주님의 말씀의 주권에서 그 안에서 나타나지 않는 한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진 비밀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어디에 도달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주원에 도달돼요. 하나님의 주권, 이것은 마귀의 복음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주권이거든요. 주님의 주권이 같지 않은 이유가 하나님의 주권을 외쳤던 그 나라 사람에 의해서 주님은 죽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 하면서 그 현장에만 등장하는 것이 주님의 주권이에요. 그 주님의 주권을 외칠 때 주님을 알았던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마르다 마리아도 시체를 찾으러 왔지 주님의 주권에 의해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는 주님의 주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주권의식이 있음을 파헤치면서 주님의 주권이 함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할 때 오는 거예요. 아하,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주님의 주권이구나! 그리고 내가 내 인생, 내 옛 사람, 내가 죽어야 할 육신이 요구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을 원하는 구나!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이냐 주님의 주권이냐 하는 사이에 뭐가 날아갔느냐 하면 말씀의 주권이 날아가 버렸어요. 말씀의 주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주님의 주권 이것만 있으면 되지 기어이 거기 틈새에 말씀의 주권을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고 인간들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는데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주권이 있으면 말씀으로 이어지면 그게 말씀의 주권이 맞잖아? 라고 막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말씀의 주권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씀의 주권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주님의 주권에서 오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누구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니까요.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땅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거예요.
너도 인간이냐? 인간이다. 그러면 너는 주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은 영원한 비밀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말씀의 주권, 주님의 주권 모릅니다. 아, 그러면 목사님, 성령이 임했다고 치고 이야기합시다. 치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할 때는 나에게 임한 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완성을 통해서 언약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도 같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소유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버티고 있으니까 이렇게 음료를 준비한다 말이죠. 준비하는데 그러면 제가 없어지면 준비하겠습니까? 오늘 안 오셨답니다. 그러면 이 음료수는 치워져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주권과 말씀의 주권은 뭐냐 하면 내가 없는데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저를 주시려고 주셨죠?” 아니, 네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면 너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던 그로인하여 예수님은 살았고 우리는 죽은 자가 된 그 입장을 보여 주는 그 주님의 자리를 위하여 이 음료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자리를 탐을 내고 내 자리로 삼으려고 자꾸 이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이게 어디를 끼어들어! 하면서 저리가 저리 안가! 하면서 내 쫓는 겁니다.
이 논리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낮에도 그 이야기를 해서 비난 비슷한 것을 들었는데 당신이 가는 곳은 모든 곳은 더 악하게 버려놓습니다. 듣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당신이 가는 곳은 모든 것을 다 더 악하게 버려놓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딱 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뭐 형제니 자매니 했다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갑자기 기분이 탁 나빠지는 거예요. 이게 당연한 거죠. 남이 나보고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이 말이 진실이거든요. 이게 진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당신은 내가 복음만 전하고 내가 가면 온화하게 만들고 이런 게 있는데 왜 더 나쁘게 만듭니까? 하고 반발하는 자체가 반발하고 싶은 그 자체가 처음에 제가 강의 한 것처럼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서 있어야 된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어야 진짜 하나님이라는 의식이 이미 내 속에서 자생되어서 나왔던 겁니다.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참 좋은 소리이네! 참 은혜롭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나님! 백날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받아 챙기는 그 바탕에는 여전히 그 원리가 먹히지가 않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알았으니 나는 얼마나 나는 고귀한 존재냐? 이것을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계속 지속시키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한방에 “당신이 가는 곳은 전부 다 상황을 악하게 만듭니다.”하는 소리에 발칵 하고 기분나빠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이 말이 이것은 특정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좀 더 해 봅시다. 우리 교회에 이근호 목사가 하면 이 교회 버리다. 이게 맞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0.1초에 내가 우리교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라는 말을 톡 튀어나오게 말하게 돼요. 그러면 나는 결국 뭐냐 하면 뭔가 지킬 만한 것을 따로 챙기면서 이것만큼은 누구한테 양보하기 싫습니다. 라는 나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겁니다. 라는 것을 지금 유지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오늘 무심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제가 곰곰 했어요. 이게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보는 유일한 안목이 이거에요. 너 때문에 세상을 다 버려 놨다. 하지만 난 너를 구원한다! 이거거든요. 우리는 아멘이 절로 나오는데 문제는 이게 비현실적 현실만 쥐고 있는 겁니다.
비현실적 현실, 현실이 두 개에요. 제가 울산에서 뭐라 했습니까? 현실1과 현실2로 나누었죠. 현실1은 뭐냐 하면 시내산 밑에서 주님이 없는 상태를 현실1이라 했고 시내산 위에서 모세가 보고 있는 현실을 현실2라 했죠. 이 현실1과 현실2가 서로 사이좋게 화합이 될 수 있냐? 이 말입니다. 화합이 안돼요. 화합이 안 되니까 돌판이 깨졌잖아요. 화합이 안 된 증거가 뭐냐, 십자가 죽음, 돌판이 깨짐, 주님의 상처, 도마가 주님의 얼굴보고 주님인줄 알았어요? 뭐보고 알았어요? 상처, 손에 난 못 자국, 영원히 박혀있는 못 자국, 나한테 있는 상처의 자국은 조금 있으면 원상복구가 되지만 주님한테는 영원히 박혀있는 못자국과 영원한 창 자국, 그게 영원하면 우리의 보는 시선도 영원해요. 완전히 확정되고 고정되었습니다.
네가 있는 그것이 너로 인하여 더 악하게 만든 너희 존재들,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면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로소 주님과 함께 있음을 현실1과 현실2가 만나면서 또는 비현실적 현실과 진짜 현실이 만나면서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핵심어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은 죽음 없이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는다. 죽음 안에서 만 말씀을 주어주신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고 누구의 죽음? 언약적 죽음, 곧 십자가 죽음에서 이야기 하신다. 그러면 십자가 죽음은 지난 2천 년 전 사건이냐? 아닌지 지금 현실이냐? 지금 현실 전부가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타나야 되고 발생되어야 할 상황들입니다.
옛날 촌에 중국집에 가게 되면 아직도 이런 것이 있어요. 손님이 왔는지 알려면 중국풍으로 키높이 만큼 위에서 구슬 넘기죠. 모르고 들어가다 보면 구슬이 찌르릉 소리 나죠. 이게 매트리스처럼 세상 전부가 주의 말씀의 구슬 조각이라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전부 다 거추장스런 말씀의 사슬에 우리는 촉감, 즉 체감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자기 집에서 큐티 한다고 말씀이 아니고 진짜 말씀은 그냥 직장생활하고 밖에 나오고 그냥 길에 다니면서 모든 상황 속에서 실제로 말씀을 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현실적 현실이 아니고 진짜 현실 속에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이 현실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뭐라 했느냐 하면 이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아이 목사님 사도의 고난이죠. 아니에요. 사도의 고난 이전에 주님의 고난으로 이해하는 자만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요. 주님의 고난 따로 있고 내 고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고난은 고난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고생이라 합니다. 참 고생하죠. 하지만 그것은 고난이 아니에요. 왜? 단독자, 나라는 단독자의 힘든 생활이기 때문에 고생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고생을 하는가? 마음을 낮추지 않아서 고생하는 거예요. 내가 내 마음을 낮추지 않아서 고생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낮추면 고생을 안 합니까? 죽기까지 낮추어야 고생 안 하죠. 죽으면 고생안합니까? 죽으면 고생안 하죠. 죽으면 다른 사람이 고생하죠. 아이고, 왜 죽었나? 하고 다른 사람이 애달아하고 다른 사람이 안타까워하지 본인은 느긋해 하죠. 그러니 인간은 죽을 때 까지 남한테 해코지하고 남을 힘들게 하는 존재에요. 죽은 사람, 본인은 하나도 안 아파요. 안 죽어봐서 모르지만 본인은 몰라요. 그냥 무책임하게 가요. 그 죽은 사람에게 정을 주고 사랑을 줬던 그 사람들은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이고, 이 영감아! 날 두고 왜 먼저 가느냐? 영감이 벌떡 일어나 너한테 물어보고 죽나? 말씀의 사슬에 걸려서 죽는 거예요. 죽으리라는 신호 때문에 죽는 거예요. 신호는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죽을 때가 됐네! 하고 죽여 버리는 겁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참새한테 물어보고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주님의 뜻에 의해서 떨어지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마태복음 10장 30절을 봅시다.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대목이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2절 13절에 그대로 나오죠. 그래서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2절 13절을 하려면 마태복음 10장의 이 대목을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제가 미리 말씀을 드릴게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라서 쉽게 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성경 말씀을 해석을 못합니다. 미리 말씀 드리죠. 해석이 안 됩니다. 적용만 될 뿐이에요. 왜냐하면 해석이 되면 이것은 우리한테 신앙이아니라 하나의 추억으로서 기억으로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아무 짝에도 효력이 없어요.
나, 마태복음 10장 말씀 이거 안다. 기억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기억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 죽이면 안돼요. 이것밖에 더 돼요? 말씀이 주님의 주권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하나의 주권용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고 도리어 주권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실을 훼방하게 돼 버려요.
그러면 마태복음 10장, 누가복음 2장은 우리가 해석을 못합니다. 뭐 다른 것은 해석 될 것 같아요? 다른 것도 해석 못해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해석된 결과가 우리에요. 말씀이 말씀대로 뭔가 일을 저질러 놨는데 그 저지른 일이 뭐냐?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것은 주께서 하실 문제이지 제가 할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이렇게 믿어지는 것, 말씀을 보면서 이것 지켜야지 가 아니라 지키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마태복음 10장의 말씀대로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믿어지는 것, 이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믿음이에요. 이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해야 될 질문을 하죠.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예수를 믿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누가요? 내가요. 내가 어떻게 살면 돼요? 라고 물으면 그 나라는 것은 주님이 만들지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라는 것은 주님이 만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만들어 진 것을 가지고 나라고 내가 만들었다고 그 가짜가 계속 나와요. 잡채를 엄마가 했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친구한테 잡채 내가 만들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은 마귀가 애초부터 거짓말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었는데 마귀는 이 말씀 지키고 저 말씀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거짓되게 유포하고 교육신학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한 거예요. 안 해도 되는데 막살아도 막사는 게 아닌데 조심스럽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조심이 사는 것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조심이 화근입니다. 주어진 상황이 조심해서 만든 상황입니까? 여러분 조심해서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
여러분들이 충동으로 살지 조심히 사는 게 아니에요. 충동으로 해 놓고 뒤에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을 것이 그게 누구이냐 하면 가짜로 섬겨버린 내가 뒷수습을 하는데 허겁지겁 수습을 해 가지고 나는 아직도 가치 있다, 고귀하다 나는 남한테 유익한 존재이지 남한테 피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행세하려고 그것이 우리 선 배되는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 짓을 해 온 겁니다.
여러분, 우리 금식합시다. 우리가 금식을 안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예레미야에게 책망 받았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책망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정신 바싹 차리고 금식하고 회개합시다. 이게 에스라 느헤미야가 했던 일이고 세례요한 할 때는 우리 물속에 들어갑시다. 회개합시다. 그게 세례요한이 주동해서 했던 일이에요. 그래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게 구원이던 가요?
조심스러운 사람 예를 들게요. 마리아가 임신하고 난 뒤에 그 옆에 가장 조심스러운 사람 있었죠. 그게 구원이던가요? 호들갑 떨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일을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이죠. 잘 했습니까? 아주 착한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조심해서 다뤄야 될 일이 아닙니다. 천사가 왕립 해 줘야 알아채는 일이에요. 누가 봐도 저거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오해할 건데 그야말로 종달새처럼 종달새인지 뭔지 자기가 낳지도 않은 새끼를 둥지에 놓고 키우는 종달새입니까? 뭡니까? 새 이름이 뭔지 하여튼 결국은 예수님 때문에 소급해서 자기 인생은 다 날아간 거예요. 몽땅 다 날아간 거예요.
자기의 가치를 유지 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박살난 겁니다. 여자 하나를 잘못만나서요. 집안에서 얼마나 따지겠습니까? 집안에서 여자를 알아보고 사귀라고 하니까, 엄마 천사가 찾아왔어! 얼마나 네가 답답했으면 헛것을 보겠느냐? 이게 뭐냐, 세상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된 거예요. 서로가 비현실이에요. 동방박사에게 천사가 와서 길을 밝혔잖아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동방박사가 착각했겠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하여튼 우리로 하여금 일체 신앙적인 생활을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그런 세계의 미련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게 우리가 수상하기 짝이 없죠.
훌쩍 떠나면 될 것을 가지고 그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 타협을 해야 되니까요. 마태복음 10장을 설명 드리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여기 시인이라 하는 것은 결과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작품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만 시인이에요.
인정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서 나는 주님을 시인합니다. 한다고 시인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시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 기존에 있는 내가 만든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아직 다윗언약에 죽었다가 살아난 그 요소가 지금 빠져있는 거예요. 죽었다가 산 그 요소가 빠져있다니까요. 빠져 있으면 옛날 있던 내가 그대로 예수님을 시인함으로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되어 버리면 주님의 죽음이라는 그 정보, 그 새언약은 그 사람 속에 있어요? 없어요? 세상에 새언약 없이 구원 받는 게 어디 있어요? 나라 자체가 천국 자체가 새언약 나라인데요. 아들의 나라인데요. 안되잖아요.
제가 하는 말은 이겁니다. 여러분 내부에 여러분이 어떤 착한 짓을 해도 그것을 죄라고 지적 하는 그러한 언약요소가 삽입되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 그것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바뀌는데요? 이렇게 바뀝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언약대로 하셨습니다. 그래 놓고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에서 나온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다 이룬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자를 살린다고 했죠.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면 부활됩니까? 천국 갑니까? 천국 못갑니까? 그 사람이 성령이 있는데 나쁜 짓을 했다면 천국 가죠. 보세요. 성령이 있다는 것은 성령 그것만 묻지 다른 것은 묻습니까? 안 묻습니까? 다른 것은 안 묻습니다. 그러면 나쁜 짓을 안 해야 되는데 그 사람은 왜 하느냐? 하게 하셨지! 누가요? 주님이요. 목사님 저는 예수 믿고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나쁜 짓인지 아닌지를 기준을 누가 이야기합니까? 말씀 주권이 해야지 우리는 나쁜 짓이다 아니다를 누가 주권 합니까? 내가 이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 라고 내가 판정을 내리면 이것은 나의 주권자가 되는 것이지 말씀이 주권자가 안 되는 겁니다.
말씀의 주권자는 주님의 주권이 확립되고 난 뒤에 말씀의 주권자가 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할 때 사도행전 적으로 보게 되면 이게 오순절 이후잖아요. 오순절 이후이면 사람들에게 누가 옵니까? 성령, 예수님의 영이 오죠. 예수님의 영이 왔을 때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나 이 사람은 무엇을 전했습니까? 말씀을 전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를 빼 버립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뭘 하게 했다? 그게 사도인지 누구인지 관계없이 성령은 뭘 전한다? 말씀을 전하게 된다. 그 관계가 말씀의 주권이 되는 겁니다. 말씀을 전한 것과 내가 전한 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내가 전해 버리면 선교의 실패가 되고 성공한 사례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말씀을 전해 버리면 그 자체가 성공과 실패의 의미가 날아가 버려요. 우리가 인생을 하루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에요? 하루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 있으면서 온 몸이 피곤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몸이 피곤한 것도 힘들지만 오늘 하루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그 성공 실패 의식이 사람을 완전히 스트레스 받게 합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어요. 남한테 나쁜 짓하고 실패했어도 잠을 못 이루지만 좋은 일 있어도 잠을 못자요.
좋은 일이 있으면 왜 잠을 못 이룹니까?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었어!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 감격 먹어서 자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흐뭇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한 마디로 죽을 수가 없어요. 잠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인데 죽을 수가 없어요. 그 기분을 내일 새벽까지 계속 가져가려고 합니다.
반대로 내가 죄를 지었다면 남한테 해코지를 했다 양심에 가책이 되었다. 또 잠 못 이룹니다. 왜? 나는 양심의 가책을 못 견딜 정도로 나는 평소에는 착한 존재인데 이번 일로 큰 흠집이 났는데 그 흠집을 또 무슨 일로 땜질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나저러나 자기 가치에 대한 지속이죠.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동질성 사수라고 합니다. 자기의 가치 있는 것을 사수하는 거예요. 성공이냐 실패이냐 실패냐 성공이냐 계속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을 야기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사랑보다도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사랑아! 저리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할 거야! 이것은 주님의 주신 작품을 자기가 화적질 하는 겁니다.
얼굴팩 하고 얼굴의 차이점이 뭡니까? 너무 쉬운 건데 얼굴팩하고 얼굴의 차이점은? 얼굴팩은 20분 뒤에 떼어낼 수 있죠. 얼굴은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안 떨어지죠. 그래서 인간은 얼굴보다도 얼굴 팩을 더 좋아합니다. 이제는 민낯으로 다닙시다. 주께서 붙여준 이 작품을 그대로 감사합시다. 얼굴팩 하지 마시고요.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1211b (말씀의 주권)―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2장을 오늘 본문을 읽어보게 되면 보는 순간 본문의 예상되는 순간을 누구나 그리게 되어 있어요. 본문의 예상되는 상황을 인간은 누구나 그리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있었는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내 몸은 옥에 갇혀도 말씀은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은 너희에게 전파된다. 부디 너희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한다는 상황을 누가 봐도 이것을 그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을 그려 낸다는 그것이 내가 그런 식으로 어떤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에 이게 바로 현실 자체라고 단정 짓게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것, 옛날에 두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하나는 바울이고 하나는 디모데인데 둘이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분들이 얼마나 착한지 내가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하기 위해서 후대 사람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서 내가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다. 너희들은 내가 전한 복음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나처럼 영원한 영생을 얻습니다. 용기내시고 힘내시고 불굴의 의지로서 이겨 내시고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은 옛날 말씀이 돼요. 옛날 그 당시 말씀이 돼요. 그 당시의 말씀을 오늘날 적용시키려면 적용시키겠다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것을 흉내를 내고 모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내가 사실은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빼먹고 있어요. 살아 있는데 보다 괜찮은 존재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말씀대로 사도바울처럼 우리가 행동해야 돼 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이 바쁘면 어떻게 합니까? 직장 생활에 바쁘면 어떻게 합니까? 바쁘면 나중에 휴직하거나 퇴직하고 난 뒤에 이 말씀에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면 되겠죠. 평소에 가정을 위해서 직장 생활한다고 바빠서 이 고생을 못했는데 이 말씀을 복음대로 살라고 고난 받으라고 했으면 고난 받는 대목은 나중에 퇴직해서 한가할 때 교회에 와서 봉사하면 되겠죠. 그러한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가짜 현실이에요. 성경 말씀하고 전혀 다른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려면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반발하는 속성이 우리 내부에서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올라오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우리가 고난을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까? 그런 식으로 나올 수도 있고 여기 12절에 보면 우리가 참아야하는데 만약에 10번을 참았는데 11번째 못 참으면 우리가 구원의 탈락이냐? 하는 그런 문제도 생겨나고 우리가 주님의 평소에 부인을 안 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어떤 급작스럽게 부인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부인한 것으로 쳐줄 것이냐 아니면 저주한 것으로 시인한 것으로 쳐줄 것이냐 아니면 부인했지만 나중에 후회돼서 벌칙을 따로 추가 하게 되면 부인에서 시인으로 바뀔 것이냐 그런 아이디어가 우리에게 막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게 모든 것이 전부 다 가짜현실을 내 몸에서 계속해서 방출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이 제목을 지금 수억 명이 봤을 겁니다. 방금 읽었던 대목을요. 수 억 명이 보면서 한결같이 생각했을 겁니다. 옛날에 디모데와 바울이 이렇게 고생했기 때문에 우리도 본받아서 말씀에 의해서 순교하고 고난 받자!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성경의 바른 뜻, 다시 말해서 이 본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다는 생각이 눈에 안 띄어 진다 이 말이죠. 지키면 지킬 수 있는 말씀이 되지 이 말씀은 원초적으로 너는 바로 죄인이야 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고! 글쎄요. 성령 받아야 아는데, 이 말씀을 누가 알겠어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대로 살지 마세요. 주께서 이 말씀대로 이끌어 가실 거예요. 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어야 될 그것을 우리가 행동하게 내용으로 가져 오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는 잘났는데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은 세상이 나쁘고 하나님이 나빠서 그렇고 세상 자체가 더러워서 그렇지 나는 괜찮은데 나는 건전한데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나의 가치는 여전히 건재해 라는 자기 수호밖에 안됩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 한 짓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주권에서 어디로 가면 돼요? 하나님의 주권에서 주님의 주권으로 가야 돼요. 주권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9절 봅시다.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죄인에 매인 것같이 고난을 받았으니”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이 나오죠. 하나님의 주권이 엉터리거든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게 없어요. 하나님이라고 주권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납득이 되는 내가 주권을 받쳐야 될 그 하나님으로 누가 상대하느냐, 내가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되는 겁니다.
신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이게 여러분들이 충분히 이해될 겁니다. 평소에 그렇게 살기 때문에 이해될 겁니다. 하나님, 저의 찬양을 받으옵소서! 이게 하나님의 접근이잖아요. 저의 기도를 받으시고 저의 헌금을 받으시고 저의 순교를 받으시고 저의 예배 태도를 받으시고 저의 마음을 받으옵소서! 이게 뭔 뜻입니까? 전부 다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주의 주권이 아니에요. 그러면 주의 주권이 뭡니까? 복음으로 인하여 복음 때문에 내가 뭐가 되어야 됩니까?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헌금하는 죄인, 선교하는 죄인 강의 하는 죄인, 강의함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그런 죄인, 헌금함으로서 교회를 돈만 밝히게 만드는 그런 죄인 선교함으로 말미암아 선교한 그 뿌듯함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는 그러한 잘난체하는 나, 이 모든 것이 내가 원래 죄인인 것을 죄인으로 들추어내는 작업에 말씀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주님이 언약으로 개입으로 하신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 하나만 알면 됩니다. “내가 죄인이다”그것만 알게 되면 행복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왜 자꾸 나는 머리가 빠지는데? 죄인이거든요. 그러면 머리카락 남아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잖아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제 아내가 잠을 자는데 숨을 쉬고 있어요. 숨을 쉬니까 숨 하나하나가 누구의 것이냐? 주님이 인공호흡하고 있어요. 그것을 영어로 "thing"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게 사물이에요. 물체인데 호흡을 줘버리니까 이게 숨 쉴 때만큼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호흡은 누구의 것입니까? 호흡은 제 것입니까? 제 아내 것입니까?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죠. 그러니까 은혜 덩어리가 옆에 누워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알까요? 본인은 몰라요. 나도 모르죠.
내 몸이 내건데 내가 숨 쉰다고 생각하지 주님이 호흡 주신다고 생각을 못하잖아요. 마음을 낮추어서 호흡마저 목숨마저 내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낮추게 되면 죽음의 자리에 있을 때 높은 히말라야 가서 숨 못 쉬고 산 밑에서 살아 있는 것도 주께서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알 때 내가 죽음의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 왔었고 그동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속성, 그게 바로 내가 죄인으로서 주께서 나를 죄인 만드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어떻게 고난을 받습니까? 본인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본인이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죄인을 부르러 왔고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병든 자를 위하여 오신 거예요. 그런데 내가 병에 안 들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병든 자가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리면 주님은 그 순간부터 우리한테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쓸데없는 나를 쓸데없이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밖에 더돼요.
우리는 평소에 내가 스스로 홀로 건강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해서 그렇지 내 인간 자체는 괜찮은 인간인데 상황이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내가 허겁지겁 하면서 이 힘든 세상을 살고 있다고 내가 원래 좋은 나라가서 정말 건전하게 살 사람인데 한국 땅 신곡 시장에 살다보니까 내가 비참하게 이 세상 돈에 주눅 들어 산다. 아이고,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닌데 자꾸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은혜는 은혜대로 날아가 버리고 복음도 귀찮고 그저 복음 믿어 줄 테니까 돈이나 주세요! 이런 식으로 자기 가치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고 그래 놓고 이 본문이 나오니까 나중에 한가할 때 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오고 또 이야기하면 옛날 사도바울 하고 디모데 고생 데게 했네! 아이고 그분들 존경스럽다! 존경은 표할 줄 알고 이게 본인의 지금의 현실인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복음에 의해서 죄인으로 매인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시냐?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사셨어요. 주님이 죄인으로 살았는데 우리는 뭐라고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런 건방을 떱니까?
아까 돌아온 황금복 드라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 드라마의 주제는 해결의 철학하고 똑같아요. 해결 가 뭐냐 하면 상호인정입니다. 네가 나를 인정해 주면 내가 너를 인정해 줄게 그 인정이 주제에요. 모든 드라마의 주제는 뭐냐, 서로 인정해 주고 인정받기! 별에서 왔던 간에 땅에서 왔던 간에 모든 내용은 어떻게 하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가가 그게 주 내용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가지고 모든 사회문제라는 것이 인정받고 자 하는 거예요. 예수님하고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요. 사람들이 교회를 왜 오느냐?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표내기 위해서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 위해서 갑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서 죄인이라는 소리를 하게 되면 자기가 죄인 되기 위해서 교회에 오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인정하는 곳에 가겠죠. 이러한 상황은 오늘 본문의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말씀은 매이지 않고 지금도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겁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강의 하면서 666이 뭐냐를 생각을 했거든요. 사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 말씀에 666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666이 뭡니까? 라고 물어요. 참 그러니까 아무리 제가 설명을 해 줘도 돌아서면 또 질문을 해요. 666이 뭡니까? 666은 말씀이거든요. 말씀은 뭡니까? 말씀은 말씀이지 뭐에요?
우리가 말씀밖에 있으면 666은 뭡니까? 말씀은 뭡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이 되는데 우리가 말씀 안에 들어 있잖아요. 말씀 안에 들어 있으면서 말씀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이상하잖아요. 그러면 뭐라고 답변합니까? 네가 말씀이다.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전해야죠.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들어 있죠. 그러면 18절 내용이 뭡니까? 이것은 666이라 되어 있죠. 묻기를 666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자기가 마치 666에서 떨어져 있는 제 3의 자리에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답변 나왔잖아요. 666이 뭡니까? 그렇게 질문을 하는 네가 666이다!
아이고, 목사님 제 뜻은 그게 아니고 666이 뭐냐? 그게 뭐냐? 그게 궁금하다 이 말입니다. 라고 물으면 이근호는 뭔데? 그것은 제 이름이죠. 뜻 없죠. 누가 붙여 줬으니까 그렇죠. 그게 그 이야기입니다. 이근호 뜻 없어요. 아버지가 그냥 붙여준 거잖아요. 그러면 666도 씌어준 거예요. 666이라고 씌어준 겁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666이 666되도록 만들어진 게 나라는 겁니다.
왜 만들어 져야 됩니까? 그래야 내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의 들어보면 또 다 알아요. 논리가 뻔 하거든요. 모든 말씀은 말씀대로 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심지어 나라고 할지라도 뻔히 다 아는데 돌아서면 목사님, 666이 뭡니까? 방금 이야기 다 했는데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으로 해석이 종결되어야 됩니다. 왜냐? 알파요 오메가니까 시작과 끝이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함으로 그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한 그 주님의 주권에서 말씀의 주권이 나오고 말씀의 주권은 주님의 주권으로 되돌아감, 회기 되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다윗의 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내가 매인 봐 된 것을 볼 때 참, 사도바울 훌륭하다! 디모데 고생했다! 이렇게 보시지 마시고 그 사람들 참 훌륭하니까 이런 고생하는데 나는 믿음이 안 좋아서 고생 못해요. 봐주세요! 이렇게 나올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들을 사용해서 예수님이 말씀대로만 실천에 옮긴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사용했다면 오늘날은 집에 앉아서 아무 것도 안 해도 이게 뭐가 된다 말입니까? 이게 복음에 매인 고난이 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특집으로 해 주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도 기쁜 소식이에요. 집에 앉아서 아무 것도 안 해도 이게 복음에 매인 고난 받는 중에 있는 겁니다. 친구들 모여서 쟁반 짜장, 탕수육 시켜 먹으면서 고난의 떡을 먹으세요. 탕수육이라는 고난의 떡을 먹으라. 이 말이죠. 너무 비싼가요? 그러면 치킨을 시켜 드세요. 고난의 치킨을 잡수세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스스로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비행기 이코노미석으로 제일 값이 싼 데를 샀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마음을 낮춘 거예요. 그게 고난일까요? 이게 바로 우리의 평소에 나의 가치를 스스로 유지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 낮추기도 성사시키기 위한 그런 꼼수를 그런 식으로 쓰고 있어요. 그게 평소의 버릇이에요.
그런데 그런 꼼수를 쓰게 되면 나의 가치는 여전히 펄펄 살아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훼방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좀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할 때는 그냥 죄인이 될 수 없거든요. 죄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복음 또는 말씀 앞에 설 때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의 말은 말씀 보고 난 뒤에 죄인으로서 큐티해서 깨달읍시다. 이 말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것을 주께서 말씀대로 이루신 일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필히 죄인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 동반적으로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있는데 이번에 사법고시를 친다고 하면 뭐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어요. 간절하게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벌써 7수인데 나이가 35인데 됐으면 좋겠다! 했다 이 말이에요. 드디어 동생이 3차까지 합격을 했어요. 합격했을 때 성령을 받은 사람 같으면 이게 바로 뭐다? 동생이 이번에 합격한 이 사태가 나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시는 복음의 소식이 되는 거예요. 뭐 합격했으니까 기쁜 소식이네! 그런 뜻이 아니고 이런 나로 하여금 죄인 되기 위해서 내 동생은 보통사람 아니야! 내 동생은 이제 변호사할 거야 갑자기 우리 집안의 가치를 존속시키고 은근히 내가 노렸던 거예요. 내가 원했던 겁니다. 죄인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위대해 지기를 원했던 거예요. 우리 집안의 자랑꺼리가 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것이 이번에 성사될 때 얼마나 기쁘겠어요? 기뻐 한다는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죄인임을 들추어내는 말씀의 작용이 된다 이 말이죠.
성경을 본다고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느껴요. 나를 죄인 되게 했다는 그 말은 주께서 그 만큼 내 동생을 시험에 합격시키도록 시험관에게 압력을 주께서 넣었다는 겁니다. 그런 압력을 넣었으면 좋겠다마는 로또 되게 한 것은 주께서 그렇게 압력을 가하신거예요. 왜? 나로 하여금 돈에 미치고 환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죄인이라는 것을 발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막 사세요. 다만 말씀을 보고, 말씀은 왜 보느냐? 확인 차원에서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위대하다! 왜 갑자기 사도바울은 왜 나옵니까? 사도바울뿐만 아니고 사도바울하고 우리하고 다른 동네에 살 거예요? 사도바울은 천국 가는데 우리는 지옥 갈 거예요? 사도바울과 같은 동네에 간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사도바울과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지만 나를 어떻게 하든지 복음은 전파되게 했습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으니까 말씀은 매이지 않으니까요. 그런 고백을 했다면 왜 우리는 그런 고백을 못해요? 왜 교도소 안 가봐서? 뭐 채찍에 안 맞아 봐서 그래요? 뭐 치킨만 뜯어가지고 그랬어요? 탕수육을 먹던 그것도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의한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은 괜찮은 데커레이션 같은 거고 꿀맛 같은 고난이죠. 요즘 십자가 마을 사람들을 보니까 전부 다 꿀맛 같은 고난을 살아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조용해요. 와서 들쑤시는 사람도 없고 누가 알아서 다 싹 다 지워주니까요.
패배 했다든지 나는 졌다든지 나는 인생 망가졌다든지 낙오자라든지 그런 발설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십자가 복음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인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던 얽히고설킨, 불교용어로 말하면 인연들 아까 이야기한 얼굴팩 같은 것, 민낯을 가리는 진짜 낯을 가리는 얼굴팩을 두 겹 세 겹 한 그것을 주께서 뜯어내는데 드드득 뜯어내는데 아픈 거예요. 특히 털 많은 곳에 파스 붙여보세요. 예민한 죄도 없는 털까지 다 뜯기듯이 얼굴팩을 나인줄 착각한 거예요. 남들이 보는 나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여, 이거 떼어버리면 남들이 나를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게 더 걱정돼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수치를 가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짓고 난 뒤에 제일먼저 나타난 현상이 뭐냐 하면 스스로 자기를 가리는 현상, 자아의 출현, 자아의 시작입니다. 몸은 똑같은 몸인데 자아가 몸을 베려버리고 말았어요. 그 자아 때문에 생명나무보다 자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10절 끝에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으면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 완성을 구원이라 해요. 그래서 주님 안에, 예수 안에 택한 자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 옛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옛 사람과 바꿔치기해서 들어와야 될 새로운 자아에요. 옛 자아 말고 새로운 자아, 예수 안에 있는 이미 의인으로 완결된, 추가적으로 더 할 필요가 없어요. 완결된 완성된 의인을 우리 죄인과 같이 동반시켜서 이 땅에서 이 몸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왜?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기 때문에 이것은 제 솜씨가 아닙니다. 라고 노골적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의 혜택은 뭐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죠. 실패냐 낙오자냐 이런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예수님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낙오자였고 실패자이고 사형수였잖아요. 부끄러워했습니까? 주님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것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마치 노아가 탔던 방주를 우리한테 넘겨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필요한 것은 노아의 방주 밖에 없죠. 그 노아의 방주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처럼 이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그 복음을 우리 택하신 자에게 넘겨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핍박했던 세상은 여전히 유지돼 줘야 돼요.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싫어했던 그 세상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출렁출렁 넘쳐야 됩니다. 왜? 그래야 그 세상과 주님이 주신 복음의 윤곽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주셨구나! 그것은 십자가 복음뿐이야! 그것뿐이야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던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것뿐입니다. 주님은 그것뿐입니다.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이 신학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 신학이 자기의 수치를 가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게 가려집니까? 십자가 피에요? 아니면 신학입니까?
가리지도 못할 구원되지도 못할 신학을 교인들에게 이제는 유식한 척 하면서 가르칩니다. 왜? 자기가 갑이 되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을이 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속에 여러분을 죄인 되게 만드는 성령이 있다면 여러분 십자가뿐입니다. 제가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 십자가 다들 있죠? 십자가가 여러분을 여러분 되게 했습니다. 아주 남들 보기에 실패자로 낙오자로 인생 왜 사니? 그냥 죽지! 그러한 소리를 듣는데 예수님도 일찍이 예수님이 하신일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식으로 시험해 왔던 겁니다.
예수님 스스로 낙오자로서 부끄러워하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 했느냐 하면 참으라! 이 말입니다. 주님도 참았는데 모든 것을 참으며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참으라!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겪었던 세상 아직도 살아있다 하지만 이미 주님은 복음을 줬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것에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둘 이유도 없고 연연해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참으면 된다.
이것은 사도바울과 디모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무슨 주권입니까? 내가 뭘 받으시오 하는 주권이 아니고 주님의 주권이죠. 기도를 할 수도 있고 헌금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마저 누가 하셨다? 주님이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헌금하는 죄인, 기도 하는 죄인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게 했고 헌금하게 한 거예요.
혜화동 강의 할 때 제가 단독으로 했는데 그분이 마지막 한 이야기가 그거예요. 아, 헌금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사실 그전에 미처 몰랐어요. 그리고 제가 집중하라 했거든요. 내가 할 일이 복음에 집중해야 된다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눈 펄펄 오는 날, 눈이 얼마나 오는지 제가 눈을 좋아하는데 길을 걷는 것은 안 좋아하고 그냥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낮에 끝나면 못 볼 것 같아서 눈 오는 것을 찍으면서 강의를 했어요. 그 대목에 보면 지금 눈송이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하나라는 이야기 찍으면서 했어요. 그래서 혜화동의 사무실 빌려주는 혜화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이 왔기 때문입니다.
11절 봅시다. 미쁘다. 미쁘다는 뜻은 믿음직스럽다.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경고성은 없어요. 전부 다 명령입니다. 전에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요? 경고가 없어요. 명령이에요. 경고는 대비하라는 거고 명령은 이것은 네가 대비 못해! 이미 명령대로 어떤 결실물로 네가 될 것이라는 통보입니다. 믿음직하다는 말은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는 믿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달라졌어! 그런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너는 믿지! 그렇지? 이런 뜻이에요. 이것은 우리 보고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께서 아시나이다!”이렇게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지 마세요. 그것을 가지고 제가 믿음 없는 신앙이라 한 거예요. 믿음 없는 신앙, 진짜 신앙은 믿음 없는 신앙이에요. 안 믿어도 되는 것, 주께서 직접 손을 대는데 내가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라가 임신했다! 사라가 임신할 때 아브라함이 옆에서 얼마나 통성기도 했습니까? 주여! 주여! 통성기도 했습니까? 요즘에는 하도 30대 중반 분들이 애기를 낳는데 힘이 들어서 임신을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마지막 나올 때 까지 얼마나 기도를 해야 될지 노산이라서요. 그런데 사라가 임신할 때 노산이라고 아브라함이 그랬습니까? 이것은 기도차원을 넘었어요. 아브라함의 기도 빨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브라함을 무능하게 만드는 아브라함의 믿음마저 무능하게 만드는 믿음,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 은혜로 주는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의 노선입니다.
다시 한 번 걱정돼서 이야기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매 살면서 확인만 하세요. 중국집에 들어가서 찌르릉 찌르릉 구술이 맞닿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말씀이 주는 결실물을 늘 얼굴, 온 몸에 적시기바랍니다. 그러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실패와 성공 자체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절에 참으면 주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고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 하는데 이게 정말 귀하고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언약 자체가 구원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구원의 원천이 뭐하면 저주의 원천이거든요. 구원을 주는 원천이 곧 무엇을 주는 원천이다? 저주도 함께 주는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것 하고 오늘 본문하고 보면 이해가 딱 되죠?
주님이 구원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그 원천을 부인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1번 주님이 저주를 줬다 2번 내가 구원 얻었다. 몇 번입니까? 원천은 주님입니다. 반대말을 쓰세요. 하면 반대말은 어떻게 써야 됩니까? 주님에서 저주가 나옵니다. 이렇게 쓰면 틀려요. 뭐라 해야 합니까? 구원은 내가 행해서 얻는 것이 반대말입니다. 원천을 반대하는 말은 또 다른 원천을 제시하는 것이 반대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은 뭡니까? 나는 주님이 싫어요. 이게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게 바로 원천을 부정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사도바울처럼 이런 순교를 당하고 참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 받을 짓이 된다 말입니다. 뭔가 자꾸 하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하지 말라 하는데 자꾸 뭔가 꼼지락 꼼지락 하면서 하고 싶은 거예요. 아무 것도 안 하니까 뭔가 허전한 겁니다. 왜 그런가? 평소에 뭔가 해야 하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하면 주님도 손을 놓는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쉬는 것이 숨을 쉬라! 숨 쉬라! 이래서 숨을 쉬는 겁니까? 아무 것도 안 해도 숨을 쉬잖아요. 아무것도 안 해도 해는 빛나고 달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님그림자가 생각이 나는데 저만치 가는데 달은 비치잖아요. 달아, 빨리 좀 따라 오너라! 이런 이야기 안하죠. 그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민을 안 해도 어떻게 먹고 살까? 사투를 하지 않아도 주께서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면서 이 만큼 살려왔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고난이고 그게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된 모습입니다.
주님께 했습니다. 한다고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 할게요 의인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고백하면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의인의 고백은 이미 원천이 따로 있고 일방적으로 제공한 겁니다. 세상에 내가 봐도 친절하다 이렇게 친절해도 또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게 틀린 말이에요. “내가” 나오면 틀린 말이 돼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을 한 것은 주께서 주신 원천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문장이 너무 길잖아요. 저는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짧은 것을 가지고 내가 했는데 사실 내가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아이고, 그만 1절만 합시다. 너무 깁니다.
잘라서 이야기해서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죄만 지었습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남들이 안 알아주잖아요? 주님이 어디 알아 줬기 때문에 십자가를 졌습니까? 못 알아줘서 십자가 지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남들이 못 알아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만 쏟아져 내라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전에 70이레 논문할 때 김00이라는 사람이 앉아서 못 알아듣겠다! 하는데 못 알아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속에서 굴뚝같아요. 네가 뭔데 알아야 돼? 네가 왜 알아야 돼? 네가 알아들어야 할 이야기 내가 왜 해야 되는데? 여러분 인터넷에 이근호 목사 쳐보세요. 이러니 말이 안 통하지 이렇게 욕한다고요.
왜 통해야 되는데요? 지금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셨다만 증거하면 되지 왜 우리끼리 통해야 되는데요? 통해서 뭐할 건데요? 사도바울 하고 통해서 뭐할 건데요? 만남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주선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선하면 어색해요. 참 어색해요. 십자가 마을 사람들 만나 보세요. 차타고 오는 4시간동안 내내 아무 말도 안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만남입니까? 침묵시위죠. 왜 말을 안 하는 줄 아세요? 말만 나오면 그건 복음이 아니고 하면서 양쪽에서 쏘아대기 때문에 무서워서 나중에 숙소에 와서 잠도 안 재우고 고문할 겁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설명한다고 하면서요.
왕노릇이라 하는 것은 이것을 넘보지 마세요. 왕은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무익한 종으로도 황공한 줄 알아야 돼요. 그게 왕노릇이에요. 왜? 세상에 비해서 우리로부터 뽑아낸 우리가 남겨진 그 세상, 축복은 반드시 저주 받은 사람을 남기는 현상을 동반시킵니다. 이게 연동현상이에요. 같이 엮여져서 동반돼서 같이 움직이는 현상입니다. 남은 자, 성도로 하여금 그 성도를 비난하는 남은 자들이 필히 발생되도록 그렇게 일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우리는 왕이 되는 겁니다. 왕이 못 돼서 시기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왕의 특징이 뭐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부지런을 떨어요. 그리고 늘 조심해서 살아갑니다. "be careful" 만날 조심해야 돼요. 징검다리 건너는 것처럼 조심을 하는데 이미 빠져서 조심을 해요. 우리는 빠졌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넉넉함이 있는 반면에 그들은 안 빠졌다고 여기고 조심하는 것 자체가 흙탕물에 빠져 있으면서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는 거예요.
지옥 간 부자가 나름대로 조심했어요. 아브라함이여! 나사로에게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저한테 오게 하소서! 얼마나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고 격식을 갖춥니까? 어이 나사로 빨리와! 이렇게 막 대한 것이 아니고 조신하게 대했거든요. 백날 해 봐야 지옥입니다. 또 얼마나 사람이 착한 지, 나는 이미 망했지만 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걔들은 내가 있는데 오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얼마나 신사적이고 조신합니까? 자기 부인, 남 배려, 그야말로 소통 아닙니까? 소통의 모델케이스 아닙니까? 해도 지옥입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시겠습니까? 조심스럽다. 신사답다. 그거 소용없는 그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오직 성령이 임하면 천국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네가 신사든 신사가 아니던지 무조건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시리라! 이거예요. 마치 흙탕물에 있는 어떤 아줌마가 정신이 약간 갔어요. 흙탕물인지도 모르고 곧 바닷물이 들어올 해변인지도 모르고 거기 앉아서 뜨개질하고 있다 이 말이죠. 치매 걸려 중얼중얼 혼자 웃어가면서 뜨개질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경찰이 와서 나오라고 말을 해도 안 들으니까 큰 포클레인으로 떠서 앉은 채로 떠내는데 그 치매 환자는 계속 앉아서 뜨개질하고 있어요. 그러면 뜨개질해서 구원받았습니까? 포클레인 때문에 구원 받았잖아요. 그 포크레인이 누구의 영이냐 십자가 영이에요.
십자가 혜택 안에서 뜨개질하고 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죄인이에요. 주께서 구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그 안에서 아직도 자기 가치를 유지 종속시키는데 평생을 거기다가 자존심을 다 투자 하는 겁니다. 중국 내려가고 포항도 주식 내려가고 기름 값 내려가고 주식 값 늘어가고 사우디아라비아 주식 값 빠지고 이럴 때 사람은 초초하죠.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30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야, 진짜가? 진짜가?”얼굴이 새파래졌어요. 나중에 보니까 중국 주식 폭락!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게 도박인지 인생인지 구분이 안돼요. 주식 내려가면 왜 안 됩니까? 자기 자존심 깨지잖아요. 자존심 깨지면 왜 안 되는데요? 자존심에다가 모든 인생을 다 걸었거든요. 자기 인생은 그 동그라미 그것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구원하는 넓은 예수 안은 없고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내가 추슬러 왔고 내가 이끌고 온 것이 그게 전부에요. 그들은 악마의 종이 되죠. 그에 대해 우리는 주님을 잘 만나서 왕이 된 겁니다. 따라서 왕 노릇을 할 것이요 라는 것은 경고가 아니고 하나의 통보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우리가 실시하는 명령이 아니고 그렇게 될지어다. 하는 축복적인 명령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우리 힘으로 못 바꿉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면 못 바꿔요. 솔로몬이 지독스럽게 따라와서 그 어떤 술랍미 여인을 기어코 자기 사람으로 만들잖아요. 자기는 그렇게 많으면서도 천명이 되면서도 또 하나 꼬이려고 따라와서 기어이 심지어 죽음 가운데서 빼 내잖아요. 사랑으로서 그것을 어떻게 술랍미 여인 쪽에서 그 사랑을 변경시킵니까? 안되죠. 어떤 것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데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미 너를 구원하기로 작정한 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으면 그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랑을 그 누구도 탈취하거나 빼 낼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주님, 십자가 피 흘리신 주님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통보 해 준 거예요. 우리가 지킬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사시면 수시로 이것이 느껴 질 건데요. 누가요? 성령께서 오시면 이 말씀을 가지고 느껴지게 하실 거예요. 안 느껴지면? 기다려 보세요. 느껴 질거예요. 신호등은 왜 기다립니까? 마냥 빨간불은 고장 난 신호등이에요. 기다리는 이유는 언젠가 바꿔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호등은 자기는 안 바뀌고 바같이 바뀌지만 우리 자신을 바뀌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앞에 기다리죠. 언젠가 네가 바뀔 것이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오늘 본문 그대로의 모든 말씀을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 내가 이미 해 버린 사람으로 전환시켜 주시는 그 고마움, 또다시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이 시간, 성령께서 이 현장 다시 들추어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키려고 하니까 자꾸 뒤로 미루어집니다. 나중에 지키지 나중에 말씀대로 살지 지금 바빠서 못하지 자기 가치와 자기의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을 날마다 들추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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