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 캄보디아에 거주 중인 친구가 여행에 합류했다.
피로를 푼다고 호텔 수영장과 사우나를 이용하고선 깊이 잠들어 밤늦게 호텔에 도착한 친구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노숙할 뻔 했다. 호텔 직원을 대동하고 방문을 쿵쾅쿵쾅 두드리는 소리에 간신히 잠이 깼더니 문 밖에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그 친구가 서 있는 거다. 밤에 도착하면 무섭기도 하고 길 찾기가 어려울테니 아침에 미리 도착한 내가 역으로 마중나가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는데 이럴 수가.....
이틀에 걸쳐 프놈펜과 방콕, 헬싱키를 거쳐 베를린까지 오는 긴 여행길에 나선 친구는 길가에서 휴대폰마저 꺼져버려 밤 10시에 짐을 끌고 우왕좌왕하며 간신히 호텔을 찾아왔는데 설상가상 문이 열리질 않는 거다. 호텔 방문을 안에서 이중으로 잠가버리면 밖에서 직원도 열 수가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랜만의 조우가 늦은 밤까지 공포체험담으로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구나, 소연아.
이날 이후...한국에서 로밍을 잘못해간 내 폰은 데이터 부족으로 초과요금 폭탄을 맞을 뻔한데다, "아이폰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사진이 전혀 찍히지 않는 사태가 발생해서 아이폰이 거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여행길 내내 동행한 친구의 구글링에 모든 걸 의존해야 했다. 덕분에 친구한테는 미안하고, 나로선 세심하게 찾아보고 돌아볼 수 있는 내용들을 조금은 놓친 느낌이 있고, 다시 한 번 폰 없이 살 수 없는 "앱등이"의 현실을 처절하게 인지했던 순간이었다.
우여곡절을 딛고 꿀잠을 잤는지 아침 일찍 눈을 뜬 우리는 일어나 아침 산책을 했다.
생각은, 살짝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들어와 쉬었다가 나가자는 거였지만 한 번 숙소 밖으로 나간 여행자의 발길이 다시 돌아오기란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의지도 없이 목적지도 없이 흐린 하늘을 배경삼아 상쾌한 도심의 아침을 걷다 보니 슈프레 강가에 이르고 강 건너편에 보이는 저것이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임을 알게 됐다. 성수기에는 2주 전 예약이 필수라는 이곳은 유리돔에 올라 내려다보는 베를린 시내 조망과 일몰이 아름답다고 친구가 저녁 6시30분에 예약을 해두었다.
이곳 역시 전쟁 때 방화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60년대에 재건축했고 1990년대 통일 이후에 유리돔을 추가로 설치하고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유리돔으로 만든 것은, 의회 활동을 시민들이 감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뜻을 담았다는데 저녁 때 이곳을 방문하고 온 친구 말로는 그 자리에 서니 맞은편 의원 사무실 건물이 환히 들여다보여 말 그대로 감시가 가능할 만큼 개방적인 모습이었다고 했다(하루종일 걷다 지친 나는 일몰이고, 조망이고 다 필요없다는 생각으로 숙소로 들어와 뻗어버리고 성실한 여행자 친구 혼자 그곳엘 다녀왔다). .
강가를 산책하다 보니 마주하게 된 모던한 건축물들은 의원회관 빌딩이었고 각종 정부 부처들이 입주해있는 정부청사였다. 어쩐지 이곳에선 세종시 정부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누가 봐도 관공서인 듯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들과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 디자인이 세종시의 느낌과 닮아있었다.
무심코 걷던 건물들 사이로 낡은 벽체가 전시되어 있어서 이것이 "베를린 장벽"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바닥에는 동서독을 가로질렀던 장벽 선이 길게 표시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부수지 않고 남겨둔 장벽의 흔적들이 기념물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날 이후 2주 내내 이 분단의 선을 때론 바닥에서 보고, 벽으로 보고, 도로에서 건너다니기도 했지만 여전히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를 반으로 가로질러 동과 서로 나누고 처음엔 그저 지키다 어느 순간 철조망을 치고, 한줄 두줄 콘크리트 벽을 쌓아 올리고 마침내는 이쪽과 저쪽을 완전히 차단하는 장벽을 세웠다는 게 영화로는 그럴 듯했는데 오히려 그 현장에 서니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리고 이 장벽과 똑닮은 모습의 장벽이 2023년에도 여전히 지구상의 한 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 역시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 현실의 아픔이다.
처음에 벽은 타고 넘을 수 있을 만큼 낮았고, 사람들이 자꾸 이 벽을 넘자 벽은 그 높이를 키워갔고 그럼에도 이중 삼중으로 인간 사다리를 올라 타고 사람들은 벽을 넘었다.
벽 이편과 저편에는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가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 거리에서 사람들은 바라보며 애를 태웠다. 그리움이 통곡이 되자 장벽 쪽을 바라보는 창문은 모두 폐쇄되었고 마침내.....이편과 저편은 단절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벽을 넘었다.
강을 건넜다.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죽었다.
통일 이후 장벽이 있던 곳에는 폭력에 반대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의미로 나무들을 심었다. 그리고 벽을 넘다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기렸다.
나무들을 심고 희생된 이들의 추념물이 있던 곳에서 우린 은행잎 상징을 발견한다. 여기 심겨진 나무들이 아직 잎이 나지 않아 은행나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날 이후 베를린 곳곳에서, 아니 라이프치히와 바이마르 등 독일 각 곳에서 우리는 은행잎 상징을 목격한다. 심지어 안나아말리아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도 은행잎 관광상품을 팔고 있어서 이게 너무나 궁금했다. 독일을 상징하는 나무나 국화가 아닌데 왜 각 곳에 은행잎 기념품들을 팔고 있을까?
그것을 바이마르 괴테하우스를 방문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60대의 노 작가 괴테는 서른 살의 유부녀를 사랑했다. 그녀에게 보낸 연애편지에는 은행잎 두 장이 곱게 붙어 있었다. 그는 둘로 갈라진 듯 보이는 은행잎이 사실은 하나의 합일된 존재임을 말하며 우리 사랑도 이와 같다고 썼다. 이때문인지 독일에서는 은행잎이 행운의 표식으로 여겨지며 특히 연인에게 선물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마르에 유독 은행잎 장식품과 관광상품이 많았던 것도 이곳이 괴테의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독일의 통일도 두 존재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니, 둘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인 은행잎의 사랑의 완성이 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쩌면 이 장벽에 은행잎을 그려 넣었을까.
장벽은 아픔이지만 장벽의 흔적은 예술이 되고 추모가 된다.
강가를 거닐면서 우리는 또 저 멀리 세워진 "하얀 십자가(White Crosses)" 추념비를 본다. 단체 일행들이 합류하면 다시 방문할 곳이기에 이날은 가까이 가지 않았고 한 주 후, 일행과 함께 이곳엘 다시 들렀다. 1961년 8월13일 장벽이 세워진 후 장벽을 넘어가려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장벽이 세워진지 10일 후부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11월 전까지, 사망일자는 각기 다르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사살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이렇듯 베를린이라는 도시는....전쟁과 학살과, 이산과 희생의 고통이 스민 아픈 기억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정확히 일 년 후인 1990년 12월 저녁....동베를린 공항에 내렸을 때의 그 을씨년스럽고 서럽던 마음을 아직 나는 기억한다. 우리나라 시외버스 터미널 만한 규모의 작은 공항은 전기 공급이 부족해 저녁 5시가 되자 이미 캄캄한 어둠이었고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서베를린과 전화도, 기업간 연결도, 관공서조차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불완전한 공간이었다.
다음날 자동차로 달렸던 장벽의 사잇길들은 텅 빈 광장이었고 그 거대한 폐허에 사람들이 나와서 동독 시절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불과 일 년이었는데 그때 이미 장벽의 돌들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서 당국이 관리에 나섰다는 말을 들었는데...지금 베를린에선 여전히 장벽의 돌로 만들었다는 기념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짜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런들 어떠하리....
가짜면 어떠하리...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건 한때 이곳에 장벽이 있었고,
그 장벽은 우리 인간들이 세운 것이며,
결국 그 장벽을 깨부순 것도 인간들이라는 것.
그러니
우리가 손에 들어야 할 무기는 오직 희망이라는 망치 뿐.
희망이 있는 한 인간은 나아간다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들은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
그것만이 지금 내게 중요하다는 걸
여행에서 돌아와 멀리 한국의 시골에서 베를린의 돌 한 조각을 들고서 나는 생각한다.
"Wir Gedenken...."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