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왕이 꾼 꿈에 대한 꿈 해석과 앞으로 이집트에 오게 될 풍년과 흉년에 대한 요셉의 제안에 대해 왕과 그의
신하들이 모두 좋게 여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바로의 마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한 대로 풍년과 흉년이 온 것도 아닌데, 바로는 이미 요셉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왕은 요셉을 곧바로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인장 반지를
빼내어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가장 좋은 세마포 옷을 입히고,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전차에 버금가는 전차를
내주어 요셉이 마음대로 쓰게 했습니다. 요셉이 전차에 올라타자, 사람들이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의 화려한 호의입니다. 요셉은 방금 전까지
만해도 수염이 덥수룩한 채, 감옥에서 냄새 나는 죄수의 옷을 입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포도주를 맡았던 신하에게 가졌던 최소한의 희망도 이미 2년
전에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적으로 요셉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 경로는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을까요? 그 후로는 감옥 안에서
요셉의 삶에 영향을 줄 만한 그 누구와의 만남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 대 이집트 제국의 왕으로부터 자유가 선고된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러나 본문에서는 요셉의 말을 한 군데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석방은 단지 왕이 자기를 풀어 준 것이었을 뿐,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풀려서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은 석방입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왕의 말 한 마디라면 세상에서는 감쪽같이 신분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이보다 더 한 억울한 일들을 충분히 많이 겪습니다. 본
교회에서 성경통독이 계속 진행 중인데, 지난 시간에는 사무엘하와 시편을 통독했습니다. 통독했던 본문 중에서 시편 34편이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슴에
남았습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비멜렉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 하면서 쫓겨나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을지 성경을 읽는 내내 가슴에서도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을 기록하는 내내, 여호와의 영광만을 노래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빛이 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천사들은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게 완전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쉬운성경, 시편 34편 중략)
분명히 시편을 기록했던 다윗과 본문에서 요셉의 상황은 다릅니다. 그러나
요셉의 고백이 하나도 없이 여백으로만 채워진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만을
인정하며 그분의 영광만을 위한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의 믿음이 고귀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에게 ‘사브낫바네아’(아래 각주참고)라는
이름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그분은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의 마지막은 요셉이 바로 앞에서 물러나오자마자, 이집트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은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해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이집트에서 일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먼 옛날
이방나라 왕이 말했던 것처럼, ‘사브낫바네아!’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에도 ‘말씀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모든 삶 속에서도 직접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 '사브낫바네아' 설명: 고대 이집트에서는 외국인을 고관으로 등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집트 이름으로 개명시켰다고 합니다.(두란노, 간추린 비전성경,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