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1일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봉화 유곡동과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을 들러서 왔다. 부석사는 오래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여러번 가려고 시도 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이 번에 가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인근에 선비촌과 박물관을 만들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 식당가가 발달 되어 있어서 여유있게 둘러 본다면 하루 는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가까이에 고분이 발굴되어서 벽화를 볼 수 있도록 개발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청암정(靑巖亭)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충재 권벌 선생의 유적지로 종가 우측에 위치하며, 거북 바위 위에 건립되었다. 닭실마을은 황금 닭이 알을 품는 현상이라고 충재 유물 전시관에 근무하는 해설가의 설명이다. 이 곳은 사극에 자주 등장한다.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화엄종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고 시련을 극복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하였다.
幢竿支柱 (보물제 255호)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통일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왕문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 13호), 통일 신라 후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문, 안양문은 不二門을 대신한다고 한다.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과 석등(국보 제 17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本堂으로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625 ~ 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 원응국사가 다시 지었으며 1916년 해체 수리 되었다고 한다.
석등은 통일 신라 시대 작품으로 팔각 석등이며, 화창(火窓) 사이의 네면에는 정교하게 새긴 보살상이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국보 제45호)
무량수전에 봉안된 아미타불로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원융국사비의 비문에 "좌우에 다른 補處 보살을 모시기 않고 아미타불 한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사진은 내려받은 것이다.
안양루
삼층석탑 (보물제 249호)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진 석탑. 통일 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1960년 해체 복원할 때 철제탑,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부석사에서 본 소백산, 부석사는 태백산 부석사로 표시되어 있어서 절 입구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부석사의 뒷산인 봉황산이 아마도 태백산 줄기인 것 같다. 지리적으로 부석사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다.
조사당(국보 제19호)과 선비화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像을 모신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선조 6년(1573)에 고쳐 지었다.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 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응진전
자인당(慈忍堂)
자인당 내에 봉안된 불상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던 불상을 옮겨 놓은 것으로 좌/우 측은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 중앙은 석가여래좌상(보물제1636호)
부석(浮石)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선묘가 부두에 달려 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 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 곳에 살고 있던 많은 異敎徒들이 방해하였다. 이 때 선묘 神龍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들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浮石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을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위 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달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삼성각
부석사 범종, 제원은 알 수 없지만 규모는 상당히 크다.
범종각
부석사 전경
관음전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으로, 서적, 토지, 노비 등도 하사하였다)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 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晦軒 安珦의 위폐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 시절 명종 임금께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핀필현판을 하사 받았다.
선비상
죽계교(竹溪橋)
사료관
시료관 내에 설명하고있는 한국 도학의 계보
학구제
일영대(해시계)
영정각, 안향의 영정을 모신 곳
직방제
장서각
백운동 서원
경자바위
풍기 군수 주세붕이 敬자를 바위에 새겼다. 경자 위에는 白雲洞이라고 새겼는데,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敬자는 선비의 덕목인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靈龜峯, 서원 왼편에 솟아 있는 언덕으로 거북이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소수서원 전경
性理學의 계보 (좌측부터 공자, 주자, 안향, 주세붕, 이황)
공자(BC551 ~ BC479), 춘추시대 노나라의 교육자, 철학자, 사상가 이며, 본명는 孔丘이다. 유교의 開祖로서 대표적인 사상은 仁이다.
朱子(1130 ~ 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학, 즉 性理學을 집대성 하였다. 우주가 정신적인 理와 현실적인 氣로 구성되었고, 인간은 선한 理가 性으로 나타나고, 불순한 氣로 인해 惡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善을 위해 格物로 氣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安珦(1243 ~ 1306), 고려말 불교의 현실 부정적인 사상이 폐단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元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워 고려에 전파하였으며, 이로서 性理學은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주세붕(1495 ~ 1554), 조선 중기의 학자로 풍기 군수 시절 백운동 서원을 세웠으며, 최초로 인삼재배에 성공하여 산삼 貢物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 주었다.
이황(1501 ~ 1570), 性學十圖를 저술하여 性理學 발전의 기초를 닦은 대학자로 영남학파의 宗祖로 추앙받고 있다
회헌영정(국보 제 111호)
고려 충숙왕 5년(1318) 왕이 회헌 안향을 추모하여 그리게 하였으며 현존하는 최고이 영정이다.
두암고택
두암고택의 내부
금성대군 신단,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圍籮安置(위라안치:귀양간 죄인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어 둠)되었다. 금성대군이 이 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 및 유림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여 순절하게 되는데, 그 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제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