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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26. [역경의 열매] 나들 (1-10) 간경화 10년 투병 딛고 다시 가수로 세우신 주님
‘니가 좋아 너무 좋아 모든 걸 주고 싶어∼’ ‘그댄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90년대 ‘좋아 좋아’ ‘인형의 꿈’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듀오 ‘일기예보’를 기억하시는지.
그 일기예보의 한 멤버 나들이다. 당시 일기예보는 정말 잘 나갔다. 그런데 내가 아팠다. 더는 음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결국 일기예보를 해체했다. 다른 멤버 강현민은 다른 남성 듀오 ‘러브홀릭스’로 활동을 이어갔다. 나는 긴 투병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병명은 간경화. 10여년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간은 한번 나빠지면 절대 좋아지지 않는다. 간경화는 시한부 삶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믿게 됐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
사촌 동생의 간을 이식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지금은 수술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제2의 음악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에는 연예 엔터테인먼트를 시작했다. 사촌 동생의 희생으로 생명을 연장, 덤으로 사는 자로서 삶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힘겨운 투병 과정을 거쳐 새로운 희망 앞에 선 내 삶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내 음악을 통해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다.
전도와 구제에도 적극 나설 것이다. 주님께서 연예인이라는 점을 활용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한 음악 활동이다. 처음에는 시작만 하면 대중들이 곧 기억하고 쉽게 일어설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0년이란 세월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직접 음반을 들고 이 방송국 저 방송국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이제는 잊힌 가수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알고 처음엔 절망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러다 지난해 한 가게 주인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한 것이 계기가 돼 골목 상권의 사장님들을 위로하는 공연 ‘골목콘서트’를 하게 됐다.
골목콘서트는 영세한 가게를 홍보하고자 가게 안에서 노래하는 공연이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유명 가수였는데 왜 그런 곳에서 공연하냐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이 공연을 보고 감사하는 자영업자들의 얼굴을 보면 멈출 수가 없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 하나님께서 나를 조금씩 높여주시는 것 같다. 신문사, 방송 등 각종 매체가 골목콘서트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언론사를 그렇게 많이 들락날락거렸어도 반응하지 않던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골목콘서트가 언론에 소개되자 전국에서 공연 요청이 왔다. 이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많은 이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연예 엔터테인먼트 동역자를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두 번째 솔로 앨범 ‘퍼니 러브’를 내고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나섰다. 예전처럼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가수가 되고자 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랑을 더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 지난 15년 동안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에는 고통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은혜였다. 그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나들 (1) 간경화 10년 투병 딛고 다시 가수로 세우신 주님
* [역경의 열매] 나들 (2) 하나님 영접의 첫 단계 "유치하고 촌스러워져라"
* [역경의 열매] 나들 (3) 첫 기도응답으로 받은 최고의 선물 '마틴 기타
* [역경의 열매] 나들 (4) 간경화에도 5집 앨범… 기도끝에 '일기예보' 해체를
* [역경의 열매] 나들 (5) 간경화 치료 위해 40일간 전원서 주님과 대화를
* [역경의 열매] 나들 (6) 꿈속서 만난 예수님 "12시 20분까지 꼭 오세요"
* [역경의 열매] 나들 (7) 10년 기도응답에 10년 못본 사촌 "건강한 내 간을"
* [역경의 열매] 나들 (8) 기독 연예인을 위한 크리스천 공동체를 만들자!
* [역경의 열매] 나들 (9) "예수처럼 몸 낮추자" 음식점·카페서 골목 콘서트
* [역경의 열매] 나들 (10·끝) 2014년 새 소명은 "기독 뮤지션을 국민가수로"
◇나들 약력=1968년 광주광역시 출생. 백석대학원 목회학 석사. 1993년 1집 ‘일기예보’로 데뷔. 인기곡 ‘좋아좋아’ ‘인형의 꿈’. 2010년 첫 솔로 앨범 ‘날아 올라’, 2011년 디지털 싱글 ‘일곱시 반 그녀’ ‘색다른 걸’ 발매. 최근 두 번째 솔로 앨범 ‘퍼니 러브’ 발표
***[역경의 열매] 나들 (2) 하나님 영접의 첫 단계 “유치하고 촌스러워져라”
‘일기예보’ 활동을 통해 잘 나가던 때였다. 타악기를 전공한 한 선배의 작업실에서 여대생을 만났다.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그 선배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만나면 만날수록 알 수 없는 어떤 벽이 우리 사이를 막고 있었다. 정말 답답했다.
이유는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그녀도 고민하던 터였다.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었는데, 어머니의 종교가 불교였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녀를 만난 후 선택을 해야 했다. 그녀와 만날 수만 있다면 종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다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를 교회에서 빼내 올 작정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교회를 잘 다니고 볼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 청년부에 등록해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누가 봐도 연예인 같았다. 복고풍의 독특한 스타일에 머리를 길렀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띄었다. 교인들에게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일기예보’라는 것을 알면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호감을 보이고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교회도 처음에는 그런대로 다닐 만했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하면 참석할수록 이질감이 느껴졌다. 우선 용어가 낯설었다. 마귀 사탄 귀신 예언 종말 피 보혈 등이 대화 속에서 수시로 등장했다. 무섭기까지 했다. ‘이 사람들 정말 미친 것 아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교회 청년들은 놀기도 참 유치하게 놀았다.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중고생들이나 하는 ‘공공칠빵’ ‘삼육구’ 같은 유치한 게임을 하면서 너무 즐거워했다. 정말 한심했다. 교회청년들은 패션도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선물로 받은 성경책은 더 압권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신화 그 자체였다. 무협지처럼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신화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니 교인들이 불쌍했다.
그러던 내가 완전히 바뀌었다. 역시 그녀가 계기였다. 나는 ‘비기독교인과 사귀면 안 된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소그룹 리더에게 기독교인의 남녀 교제에 대해 물었다. ‘왜 비기독교인과 사귀면 안 되느냐’고 따졌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 리더는 당시 사랑의교회 상담사역자 나희수 목사님께 안내했다.
나 목사님은 그냥 이런저런 질문을 툭툭 던졌다. 남자들끼리 할 수 있는, 약간 원색적인 질문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퇴폐적으로 살았는지 묻는 말이랄까, 내 치부를 모두 들추는 그런 질문이었다.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삶이 그날은 부끄럽고 창피했다.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후회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 목사님은 한참을 기다린 후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읽어줬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 목사는 “거듭났기 때문에 조금 전 부끄러워했던 죄들은 모두 용서받았다. 이제 깨끗한 피조물로 새로워졌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매우 기뻐서 또 한참을 울었다.
그때 이후 나는 유치해졌다. 촌스러워졌다. ‘신화’에 빠져들었다. 교회 청년들과 어울려 유치한 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촌스럽게만 보이던 교회 청년들이 세련돼 보였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너무 부족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역경의 열매] 나들 (3) 첫 기도응답으로 받은 최고의 선물 ‘마틴 기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좋았던 것은 기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화한다는 게 신비하기만 했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은 더 놀라웠다.
하나님은 초신자에게 특별히 배려해주시는 것 같다. 초신자의 기도는 즉각 들어주셨다. 기도 응답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보이게 응답하셨다. 내 경우가 그랬다. 나의 첫 기도 응답은 악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기타를 하나님이 주셨다.
1999년 일기예보 5집 앨범 작업이 한창때였다. 당시 나는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외제차가 흔하지만 90년대만 해도 귀했다. 외제차를 타고 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손가락질도 받았다. 외환위기로 금 모으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들은 나라를 살리겠다고 장롱에 숨긴 금을 꺼내놓는데 외제차가 웬 말이냐”라는 눈총이 있었다.
기독교인이 된 뒤에는 이런 점이 마음을 찔렀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외제차를 헐값에 팔고 국산차를 샀다. 그랬더니 차익이 현금 300만원 정도 생겼다.
많이 아꼈던 차였기 때문에 팔고 남은 돈 300만원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마땅한 기타가 없었던 나는 이참에 평생 사용할 만큼 좋은 기타를 사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당시는 어쿠스틱 기타라면 ‘마틴 기타’가 최고였다. 중고제품도 많이 거래됐다. 기타의 나무 몸통이 오래될수록 소리가 좋아 기타리스트들은 중고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음악을 하면서 정말 갖고 싶었던 기타가 하나 있었습니다. 음악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미국 마틴사에 직접 주문해 받은 기타입니다. 기타 코드를 잡고 처음 줄을 튕겼을 때 들은 깊은 울림을 잊지 못합니다. 저도 그런 기타를 하나 주십시오.”
장황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며칠 후 음반 작업을 하러 스튜디오에 갔다. 내가 쓰던 기타를 조율하고 녹음실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 마틴 기타가 놓여 있었다. ‘누구 거지?’
기타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C코드를 잡고 줄을 튕겼다. ‘디리링∼.’ 소리에 깊이가 있었다. 내가 쓰던 기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리였다. 누구 것인지 모르지만 이 기타로 녹음하고 싶었다. 엔지니어에게 허락을 받고 녹음실에 들고 가 연주했다. 녹음은 만족스러웠다. ‘나도 이런 기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감생심이라 생각하고 녹음실을 나왔다. 사나흘 뒤였다. 엔지니어가 전화를 했다. “그 마틴 기타 있잖아요. 주인이 그걸 팔고 싶다고 하던데요.”
나는 즉시 달려갔다. 얼마가 됐건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인은 급전이 필요해 아깝지만 팔게 됐다고 했고,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나는 너무 기뻐 주인이 원하던 가격보다 10만원을 더 줬다.
나는 기타 주인에게 언제 어디서 산 기타인지 물었다. 그는 악기판매점인 낙원상가의 마틴 기타 매장에서 샀다고 했다. 마틴 기타 주인에게 직접 산 것은 아니지만 중고판매상으로부터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들었다고 했다. 이 기타의 첫 주인은 기타리스트 연석원으로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팔고 간 것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나님 대단하시네요!”
연석원은 내게 음악을 가르쳐준 그 선생님이었다. 중고로 산 기타는 수년 전 연석원 선생님께 음악을 배우면서 접한 정말 갖고 싶었던 바로 그 기타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내가 갖고 싶었던 바로 그 마틴 기타를 주신 것이었다. 그 기타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역경의 열매] 나들 (4) 간경화에도 5집 앨범… 기도끝에 ‘일기예보’ 해체를
놀랐다. 나부터 놀랐다. 고집스럽고 까칠하고 거만했던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한순간에 달라졌다.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일기예보’의 다른 멤버 강현민이었다. 그는 나의 변화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네 소프트웨어가 완전히 바뀐 것 같아.”
주변 사람들도 놀랐다. “갑자기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나들 맞아?” “쟤, 미친 것 아냐?” 이런 반응이었다. “나 교회 다니잖아” “예수 믿으면 이렇게 돼”라며 이들을 전도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예수님 믿고 이렇게 됐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을 이상하게, 나쁘게 볼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됐다”고만 말했다.
4집 활동 이후 현민이는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나는 간경화 때문에 쉬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회사와의 계약이 5집까지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5집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다시 뭉쳐야 했다.
현민이도 예수님을 믿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함께 활동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길 바랐다.
현민이가 의견을 내면 적극 동의하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간경화로 제약이 있었지만 마지막 앨범이니만큼 잘 마무리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관계가 무척 좋아졌다. 이전에는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다. 내가 문제였던 것이다. 내가 고집스럽고 까칠하고 거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현민이는 내게 일기예보 활동을 더 하자고 제안했다.
“5집까지 활동한다는 전속계약도 끝났으니 우리가 직접 앨범을 제작하는 것은 어때? 그동안은 회사만 좋은 일 시켰잖아. 6집도 잘되면 큰돈을 벌 거야.”
뜻밖의 제안이었다. 당시에는 앨범을 많이 팔아도 가수에게 남는 돈은 극히 일부였다. 수익 대부분이 소속사로 돌아갔다. 현민이도 내 건강상태를 알았다. 그는 무리하게 공연하지 않고 음반만 제작해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황스러웠다. 아픈 사람에게 쉬지 말고 일하자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한편으론 감사했다. 솔로활동 계획을 접고 함께하자는 것은 내가 같이 일해도 좋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였다.
다음 앨범을 제작하자는 현민이의 의지는 확고했다. 고민이 됐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결정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했다. 친구를 위해 건강을 포기해야 하는지, 건강을 위해 친구를 포기해야 하는지.
친구를 잃지 않으면서 건강 회복을 위해 쉬고 싶었다. 친구는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어느 날 성경을 묵상하다 해답을 얻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 말씀이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 말씀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공동 투자해 음반을 제작하지 말라는 사인이라고 확신했다. 말씀에 의지해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인 현민이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며칠을 고민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현민아, 미안해. 나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무엇보다 내 삶의 목표가 바뀌었어. 음반을 제작해 큰돈을 버는 게 내겐 중요하지 않아. 그냥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겠어.”
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이 거절로 현민이와의 관계가 나빠질까봐 걱정했다. 상심이 컸겠지만 현민이는 내 결정을 존중했다. 그렇게 일기예보는 5집을 끝으로 해체됐다. 이후 기나긴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나들 (5) 간경화 치료 위해 40일간 전원서 주님과 대화를
일기예보를 해체한 후 본격적인 투병을 시작했다. 한번 나빠진 간은 다시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한 치료는 없었다. 간경화는 의학적으로 불치병이었다.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당시에도 간이식 수술이 이뤄지긴 했지만 막 도입단계였다. 수술비만 해도 수억원이었고 성공률도 아주 낮았다.
설사 수술비를 마련하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는다 해도, 그 뒤에 들어가는 병원비와 약값 때문에 치료는 언감생심이었다. 재벌이 아니면 간 이식 수술은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생명연장 차원의 마지막 방법이 수술이었다.
나는 자연치유 요법에 집중했다. 아내는 생식과 채소, 과일 등 간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구해다 먹였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한 지인이 생식 권위자로 유명하다는 김 모 박사를 소개했다.
“김 박사라고 들어봤어? 생식 권위자인데, 김 박사라면 간 경화를 반드시 고칠 거야. 희망을 품고 반드시 만나봐.”
안 만나볼 이유가 없었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데, 낫는다면 못 할 게 없었다. 나는 바로 연락했다. 김 박사는 완전히 고칠 수 있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다만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하라고 했다.
첫째, ‘음식 공해’를 피하라. 즉, 즉석 음식을 먹지 마라, 불에 익혀 죽은 음식을 먹지 마라, 살아있는 생식을 하라고 했다. 둘째, ‘환경공해’를 피하라. 탁한 공기와 오염된 물이 환경 공해였다. 무엇보다 도심을 벗어나라고 했다. 셋째, ‘사람 공해’를 피해라. 인간관계가 스트레스의 주범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했다.
김 박사는 이 세 가지를 철저히 지키면 간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건만 된다면 공해와 사람을 피해 당장 깊은 산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의 자신 있는 말에 나는 그대로만 하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김 박사는 생식을 세계 최초로 만든 분이었다. 대체의학계에서는 이미 권위자로 이름 나 있었다. 나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사람 공해를 피한답시고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음악 동료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숨겼다. 오직 가족에게만 연락처를 남기고 쥐도 새도 모르게 서울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마이산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진안의 한 마을이다.
전원생활은 난생처음이었다. 가장 큰 고민은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비록 부하진 않았지만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성경 정독을 시작했다. 성경과 주석을 함께 펴놓고 이해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 줄 깊이 묵상하며 읽었다. 어떨 땐 성경의 한 문장을 갖고 온종일 씨름했다.
40일 작정 새벽예배도 처음으로 도전했다. 아침저녁으로 산자락을 혼자 걸으며 하나님과 대화도 했다. 시골에서는 시간의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이런 생활이 하루하루 쌓여가자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내 삶 속에서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을 알게 됐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온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간의 전원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꿈과 비전이 생겼다. 어느 때부터인가 건강에 대한 염려마저 사라졌다.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도 아내와 나는 두렵지 않았다. 우린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것을.
***[역경의 열매] 나들 (6) 꿈속서 만난 예수님 “12시 20분까지 꼭 오세요”
시골에서 투병생활한 지 3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의미심장한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집 앞 차도에 있었다. 차도 양편으로 교회 성도들이 길게 서 있었다. 이들은 손뼉을 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저만치 앞에 예수님이 서서 나를 기다리셨다. 나는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 너무 따뜻했고 행복했다. 예수님은 나를 꼭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집사님, 12시20분까지 꼭 오세요. 12시20분까지 꼭 오셔야 해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세 번 하시더니 나를 오던 길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면서 꿈에서 깼다. 무슨 의미가 있는 꿈인 게 틀림없었다. 무척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도시에서 전도사 7명이 찾아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교회에 봉사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마당에서 음식을 대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꿈 이야기가 나왔다. 전도사들은 보통 꿈이 아니라며 꿈 해석을 잘하신다는 한 목사님을 소개해줬다. 강원도 춘천에 사신다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봐야 하나 싶었지만 손해 볼 것도 없었다. 돌아오는 주일 춘천으로 향했다.
한참 내 꿈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잠시 기도했다. 이어 요한복음 5장을 펴고 읽어보라고 했다. 5장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에 대한 이야기다. 읽는 도중 소름이 돋았다. 그 병자와 내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면서부터 병자인 것, 38년 된 병자인 것, 그날이 주일인 안식일인 것 등이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나면서 어머님으로부터 간염바이러스를 물려받았다. 내 나이는 당시 38세였다. 목사님은 베데스다 병자처럼 내 병도 깨끗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꿈속의 12시20분에서 20분은 덤으로 얻은 생명을 뜻한다고 했다. 나머지 삶은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라고 했다. 낫는다는 꿈 해석을 듣고 더는 시골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3년만 시골에 있겠다고 생각하고 내려간 것이었다. 나는 3년을 석 달 앞두고 서울로 향했다. 건강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시골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가는 차 안이었다. 문득 ‘오늘이 며칠이더라’며 찾아보니 12월 20일이었다. 서울로 이사하고 사나흘 후 새로 마련한 아파트는 12층 20호였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도와 기쁨이 넘쳤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서울에 올라온 지 2주 만에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다행히 아산병원이 5분 거리에 있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 의사는 간경화 합병증이 심해져 식도정맥류가 터졌다고 설명했다.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이 회복된 줄 알았는데 간 상태가 더 나빠진 것이었다.
‘회복을 암시하는 꿈도 꿨는데 그렇다면 꿈도, 해석을 해준 목사님도 다 엉터리란 말인가.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절망 가운데 며칠을 보냈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 담당 의사가 와서 몸 상태를 설명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시골에서 쓰러졌다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살리시려고 ‘12시20분까지 꼭 오라’는 이야기를 통해 서울로 향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역경의 열매] 나들 (7) 10년 기도응답에 10년 못본 사촌 “건강한 내 간을”
간경화가 심해지자 다양한 합병증이 나타났다. 식도정맥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오르는 식도정맥류가 계속 생겼다. 가려움도 심해졌다. 온몸을 긁다 보니 여기저기 피멍이 들었다.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멈추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혈소판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황달 증상이 나타나고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종종 간성혼수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내와 나는 기적처럼 건강이 회복될 것을 항상 기대했다. 하지만 투병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합병증까지 심해지자 기적만 기다릴 수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간이식을 해야 했다. 간이식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10년의 투병기간 동안 의학이 크게 발전했다. 간이식 수술 성공률은 평균 90%가 넘었다. 건강보험 적용으로 1억원이 넘었던 수술비도 수천만원으로 줄었다.
문제는 이식받을 간이었다. 막내인 나는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간염균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간이식이 불가능했다. 아내는 간 크기가 작아 일부를 떼어 줄 수 없다는 의학적 판정을 받았다. 둘째형수가 혈액형이 일치하면 간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빈혈이 있었다. 빈혈을 치료하면 간 제공이 가능했지만 치료가 수개월 이상 걸렸다.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가까운 친족들은 간을 주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몸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아내와 나의 마음은 평안했다. 지금까지 동행해주신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는 간 제공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10년 동안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내던 사촌동생이 간을 주기로 했다. 동생은 음주운전으로 인사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간을 줄 수 있는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이 서른둘에 미혼이어서 본인이 기증을 하고 싶어도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수술이 불가능했다. 그런 복잡한 상황이라면 내가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사촌동생이 선뜻 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혹시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주변에서 걱정했다. 나도 사실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서둘러 수술하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수술 대기 환자가 많아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빨리 수술할 수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래도 3주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3주는 30년 같았다.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했던 내게는 잠깐 낮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떠보니 몸 구석구석에 호스와 바늘이 꽂혀 있었다. 수술이 10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했다.
‘이제 끝났다. 살았다.’
10여년 기나긴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켜보던 아내도 눈물을 쏟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3주 만에 걸어서 퇴원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온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사가 그러더라고. 배를 열었더니 간이 예상보다 크고 두툼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배를 더 찢었대. 봐 봐 형보다 내 수술 자국이 더 길잖아!”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증자의 간이 클수록 수술 경과가 좋고 회복도 빠르다고 했다. 순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됐다.
사촌동생은 교도소에서 금연 금주를 했고 생활도 규칙적이었다. 기상과 취침도 정해진 시간에 했고, 규칙적인 운동을 했다. 가장 좋은 건강 상태였다. 당연히 간도 최상이었다. 동생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역경의 열매] 나들 (8) 기독 연예인을 위한 크리스천 공동체를 만들자!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현빈이 입고 있던 운동복은 수백만원의 가격에도 없어 못 팔았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고 연예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에 앞장서면 효과가 정말 크겠다고 생각했다. 선한 영향력을 갖는 것, 내가 다시 연예인 활동을 시작한 이유다.
투병을 하면서 크리스천 연예인 공동체 ‘미제이’를 알게 됐다. 5년여 동안 함께 예배 드렸다. 거기서 후배들과 교제하면서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인기가 높아 활동이 왕성한 후배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가 어려웠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상업화되고 성적인 면이 부각되기도 했다. 연예인은 술 마약 도박 성 등 각종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 해도 주변이 온통 지뢰밭이다.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신앙도 지키면서 자신들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방법이 절실해 보였다. 무엇보다 소속사가 크리스천 공동체일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2010년 수술을 받고 회복된 나는 크리스천 엔터테인먼트를 세우기로 하고 재능 있는 젊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을 찾았다. 하지만 잊혀버린 가수를 믿고 함께 하려는 이들이 없었다. 먼저 나부터 알려야 했다. 음악 활동을 재개해야 했다. 싱글 음반부터 만들었다.
‘내가 비록 오래된 가수지만 전 국민이 다 아는 히트곡 ‘좋아좋아’ ‘인형의 꿈’이 있잖아.’
나는 이전 히트곡을 발판 삼아 쉽게 일어설 것으로 생각했다. 직접 음반을 들고 방송국을 찾았다. 피디들과 작가들을 만나 열심히 음반을 소개하고 부탁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음악이 별로인가?’
두 번째 싱글 앨범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대중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반인들에게 곡을 들려주고 설문 조사한 뒤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이번엔 되겠지.’
다시 음반을 들고 방송국 피디와 작가를 찾았다. 역시 실패였다. 관심조차 끌기 어려웠다. 세 번째 싱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가?’
평소 알고 지내던 매니저와 업계 사람들은 “접대나 투자 없이 이 바닥에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차라리 괜찮은 기획사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정말 하나님의 방식대로는 안 되는 건가!’
낙심이 컸다. 절망적이었다. 상심한 채로 몇 주를 보냈다. 구약을 읽는데 전쟁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이었다. 애굽왕 바로 앞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싸움이 처음에는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해 승리했다. 이렇게 불가능한 싸움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대하 20:15). 구약의 많은 승전보를 읽으니 마음속에서 힘이 솟구쳤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다면….”
크리스천 엔터테인먼트 설립에 확신을 했다. 새로운 일을 계획했다. ‘언론이 나의 컴백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팬에게 다가가면 되지.’ 나는 공연을 하기로 했다. 공연으로 어필하는 것이 시간은 걸리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고 판단했다.
공연을 위해 한시적인 남성 듀오 ‘180’을 만들었다. 방송 리포터로 활동하던 친한 동생을 설득해 정규 1집을 발표하고 공연에 전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고정 팬 수백명이 생겼다. 공연장에는 이들로 항상 북적였다. 듀오 ‘180’의 활동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를 계기고 나는 더 큰 도약을 꿈꿨다. 2013년을 ‘공연의 해’로 선포하고 새로운 공연 콘셉트를 준비했다. 그것이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골목콘서트’다.
***[역경의 열매] 나들 (9) “예수처럼 몸 낮추자” 음식점·카페서 골목 콘서트
가수로 재기하기 위해 올해를 ‘공연의 해’로 선언했지만 나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디든지, 누구든지 나를 원하면 조건을 떠나 무조건 간다’고 각오했다. 자존심은 모두 버리기로 했다. ‘오라는 곳이 없으면 아예 내가 공연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골목콘서트였다.
골목콘서트의 원형은 지난해 봄 우연히 탄생했다. 기타를 들고 동네 놀이터로 향하다가 작업실 맞은편의 삼겹살집 ‘돼지네’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 부부가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힘겨워 보였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생하시는 저분들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 “제가 노래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라며 노래를 불렀다. 부부는 크게 감동했다. 열렬한 팬을 자청했다. 실제로 “오랜 투병 후 재기에 나선 일기예보 나들 아세요?”라며 손님들에게 홍보했다. 팬클럽 가입도 독려했다. 열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온라인의 팬클럽 회원이 부쩍 늘었다.
부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나는 단골손님과 팬들을 초청해 10평 남짓한 그 식당에서 노래공연을 했다. 콘서트를 세 번 하면서 입소문이 나 ‘돼지네’에는 손님이 몰려들었다. 지금은 줄을 서야 하는 곳이 됐다. ‘돼지네처럼 가게에 도움도 주고 팬도 얻는 공연을 본격적으로 펼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골목상권 내 가게에서 하는 공연’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골목콘서트’라고 정하고 콘서트를 기획했다. 홍보용 전단, 포스터, 초대권 등을 이미지 제작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배워가며 직접 만들었다. 소규모 공연용 음향장비들도 샀다.
2013년 1월 31일 첫 번째 골목콘서트가 경기도 동탄의 한 카페에서 열렸다. 손님들이 카페를 가득 메우자 누구보다 가게주인이 감격했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게에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은 작은 카페 공연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노래를 즐겼다. 골목콘서트가 네 번째 열리자 각종 언론매체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횟수가 거듭되자 더 많은 언론매체가 찾아와 골목콘서트를 취재했다.
보도가 잇따르자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모두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콘서트 개최를 요청했다. 하지만 골목콘서트는 자비로만 진행하는 것이어서 수도권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몇몇 분들의 후원을 받아 전국으로 무대를 넓혔다. 2013년 여름 7일간 ‘골목콘서트 전국투어’에 나섰다.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두 곳, 대구, 구미, 전주, 충주를 돌았다. 가는 곳마다 크게 환영받았다.
지금까지 카페, 호프집, 치킨집, 하숙집, 김밥집, 삼겹살집, 산후조리원 등 다양한 지역과 가게에서 모두 27회 공연했다. 다음에는 제주도 골목콘서트도 계획하고 있다.
올해를 ‘공연의 해’로 선포하고 열 달을 달려온 지금 그런 생각이 든다. ‘낮아져야 하는구나!’ ‘더 낮아져야 하겠구나!’
예수님도 스스로를 낮춰 이 땅에 오셨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교회를 다니며 귀가 따갑게 듣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을 닮아 스스로 낮추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이다. 연예인은 더 쉽지 않다. 인기가 많을수록 더 그렇다. 팬들의 사랑과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때문에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시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신다. 부족하고 잘난 맛에 살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이 난다.
***[역경의 열매] 나들 (10·끝) 2014년 새 소명은 “기독 뮤지션을 국민가수로”
골목상권 회복을 위한 ‘골목 콘서트’를 하면서 나도 대형마트나 체인점이 아닌 골목에 위치한 가게를 더 이용하게 됐다. 의무감 같은 게 생겼다. 이들 가게를 들락거리며 자영업자의 고충을 알게 됐다. 특히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위로와 응원이 이들에게 정말 필요했다.
골목 콘서트를 하면서 또 하나의 ‘골목상권’을 알게 됐다. ‘골목 뮤지션’이다. 오디션 열풍으로 너도나도 뮤지션이 되려 했다. 2013학년도 실용음악과 평균 경쟁률은 444대 1이다. 하지만 막상 졸업하면 무대가 없다. 젊은 뮤지션들이 음악을 포기하거나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간다. 골목 콘서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골목 콘서트는 무대를 만든다. 골목 콘서트가 열리는 가게가 곧 무대가 된다. 골목 콘서트가 활성화되면 동네가게 상인은 홍보가 돼 좋고, 젊은 뮤지션은 무대가 생겨 좋다. 자영업자와 뮤지션이 상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열심히 뛰었고, 젊은 뮤지션들에게 실제로 무대를 제공했다. 내가 여는 골목 콘서트에 젊은 뮤지션을 게스트로 출연시켰다. 출연한 게스트에게 공연료도 줬다. 자영업자와 후배 뮤지션들을 위해 더 많은 골목 콘서트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력이 없어 한 달에 겨우 두 번 열었다.
골목 콘서트는 무료로 열린다. 골목 콘서트가 가게 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가게 주인이 부담하는 돈은 없다. 티켓값도 없다. 다만 손님 중에 기부할 수 있다. 콘서트는 손님들의 자율 기부로 운영된다.
이 기부금으로 가난한 인디뮤지션들에게 공연료를 지불하고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사실 한 달에 2회 하는 것도 벅찰 때가 많다. 누군가의 도움이 기다려지곤 한다. ‘내가 만약 ‘싸이’나 ‘소녀시대’ 같은 슈퍼스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가게든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손님들의 기부도 넘쳐나고, 도와주는 손길도 많아지겠지. 그러면 더 많은 가게 사장과 후배 뮤지션을 응원할 수 있겠지….’ 내가 정말 가수로서 잘돼야 하는 이유다.
너무 감사한 것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알고 ‘골목천사’를 자처하는 젊은 기부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이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올해엔 공연만 하고 앨범을 만들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만들어봐야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관심 받지 못한 앨범 석 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일단 골목 콘서트를 통해 내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 노래에 반응하고 내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런 관심이 더 커지도록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2집을 최근에 만들었다. 곧 정식 발매할 예정이다. 여기 수록된 곡들은 2012년 겨울에 만들었다. 그동안 기회만 바라보던 곡들이다.
2014년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내년을 ‘국민가수의 해’로 선포하고 전 국민이 내 얼굴을 알아보게 할 생각이다. 이를 기반으로 크리스천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본격적으로 벌여볼 계획이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 이제까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이다. 특별히 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실지 정말 기대된다. 가장 먼저 사람들이 아닌 주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슈퍼스타’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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