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첨당(無忝堂).
無忝,
없을 무(無), 더럽힐 첨(忝)
‘더럽히지 않는다’는 무첨(無忝)이다.
당호 무첨당(無忝堂)은 조상을 욕보이지
않겠다는 여강 이씨 후손의 결의를 담고 있다.
양동마을 또하나의 명문가 무첨당이다.
청송에서 월성 손씨 손소가 양동마을로 장가를 들었다.
손소는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강 이씨 이번(李蕃)을 큰사위로 맞았다.
이번은 서백당에서 처가살이를 끝내고 살림을 내 밖에 지은 한옥 무첨당이다.
손소는 딸에게도 그 많은 재산을 과감하게 상속하게 된다.
양동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물(勿)’자의 모양을 한 명당마을이다.
무첨당은 勿자 모양의 첫 골짜기 길지(吉地)로 꼽히는 물봉골 우측 높은 곳,
정남향으로 그 좋은 터 명당에 들어섰다.
무첨당의 담장은 특이하게도 둥근 모양이다.
이 둥근 담장이 정침과 무첨당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 담장선은 사당 담장의 전면과 만나 사당이 있는 곳으로
기운이 감아 올라가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무첨당은 본래 별당으로 지어진 것이다.
무첨당은 평면이 ㄱ자 모양으로 중앙에 6칸의 대청을 들였다.
그 양옆에 2칸 방을 하나씩 두었다. 누마루도 설치하여 실하게 보인다.
이 집은 기둥이 돋보인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사각기둥을 썼다.
그러나 무첨당은 궁궐에서나 쓰는 둥근 기둥(圓柱)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이번의 큰 아들 회재 이언적이다.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퇴계 이황이 동방4현으로 존숭한 대학자다.
회재는 본부인 밀양 박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다.
아우 언괄도 아들을 두었으나 병으로 일찍 잃었다.
“어찌 이 집은 자식 복이 없단 말인가?”
노모는 두 형제를 놓고 한탄을 했다.
회재는 50세 되던 해 사촌 동생 이통(李通)의
셋째 아들 5촌 조카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들였다.
회재는 이응인에게 종가를 물려준다.
이언적의 다섯손자 중 맏손자 이의윤의 호가 무첨당이다.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 이것이 무첨당의 뜻이다.
무첨당 누마루는 편액이 참 많다.
오른쪽 높은 벽에 걸린 편액 <五棣書室>이 눈에 든다.
오체(五棣)는 다섯 형제로 회재의 다섯 손자를 뜻한다.
다섯 손자들이 오순도순 책을 읽은 서실을 오체서실로
표현한 것이다.
‘오체서실’은 5형제가 우애 있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집안의 명예와 영광의 근본을 형제간의
우애로 생각한 부모의 따듯한 가훈이면서 기원문이다.
편액 <左海琴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안동 김씨의 서슬을 피해
전국을 유랑할 때 무첨당을 들려 쓴 죽필(竹筆)이다.
좌해(左海)은 한양도성에서 남쪽으로 바라다보았을 때
영남을 뜻한다.금(琴)은 거문고로 풍류를 의미한다.
서(書)는 책으로 선비의 학문을 가르킨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들려 40여 일간 머물면서
영남선비들을 만나고 느낀 점을 네 글자 左海琴書로
남긴 것이다. 영남 선비들의 풍류와 학문을 의미한다.
대청 바깥쪽 천정 밑의 편액 <蒼山世居>다.
창산(蒼山)은 무첨당 주산 설창산을 말한다.
설창산 자락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음을 말하고 있다.
자손들이 학문을 익히는 공부방으로 학문과 함께 가족과
형제들의 우애를 교육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는
창산세거(蒼山世居)다.
높직하게 단 누마루이다. 바같쪽으로 널문을 달았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쪽 마당으로는 난간을 달았다.
마당에서 보면 개방적으로 열린 공간 누마루이다.
한옥은 사연을 안고 있다.
무첨당도 가슴 저미는 사연이 있다.
사실 회재 이언적은 친아들을 두었다. 서자였다.
그가 25살 때 경주 관기 석씨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
석씨는 임신한 상태에서 조윤손이라는 이의 첩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서 결혼 7개월만 아들을 낳았다. 그 이름은 옥결이다.
조윤손은 옥결이 장성하자 후사로 삼고 집과 논밭 노비를 물려주었다.
“여인이야 첩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아들은 돌려주는 게 옳지 않을까요?“
어느 날 회재는 조윤손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 조윤손이 죽었다.
옥결은 장례를 치르고 회재 부인 박씨를 찾아갔다.
박씨는 옥결을 손을 잡고 울면서 “아버지가 강계로
귀양을 떠났으니 그곳으로 빨리 가 보거라“고 일렀다.
옥결은 강계로 달려갔다.
거기서 아버지 회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회재는 옥결의 이름도 전인(全仁)으로 개명해 주었다.
이언적은 양자로 맞은 5촌 조카 이응인에게 무첨당 종가와
사당을 물려주었다. 이언적 후손의 양동파다.
친자식 이전인은 차별이 심한 서자다.
회재는 후반에 마련한 옥산리 독락당과 그 일대 재산을
물려준다. 회재 후손의 옥산파를 이룬다.
이언적은 과거에 급제해서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학문도 크게 이루어 동방5현으로존경 받고 있다.
퇴계 이황은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를
동방4현으로 존숭하며 회재를 이렇게 그리워했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분의 큰 도를
알지 못했다. 나 또한 어리석어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에게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0여 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 묻혀 있으면서 의지할 데를
찾다가 그에게 물을 기회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 뒤에야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을
흠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