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비사는 총 180글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다시 삼신장80자와 삼한장 100자로 구분된다.
-삼신장三神章 80자
朝光先受地三神赫世臨
桓因出象先樹德宏且深
諸神議遣雄承詔始開天
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
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
王儉受大命懽聲動九桓
魚水民其蘇草風德化新
怨者先解怨病者先去病
조광선수지삼신혁세림
한인출상선수덕굉차심
제신의견웅승조시개천
치우기청구만고진무성
회대개귀왕천하막능친
왕검수대명환성동구한
어수민기소초풍덕화신
원자선해원병자선거병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강림하셨도다.한인께서 먼저 그 모습을 나타내시고
덕을 넓고 깊게 심으시도다.모든 신들과 의논하여 한웅님을 보내시니
한웅님께서는 환인님을 승계하시고 그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개천을 하셨도다.치우님께서는 청구에서 일어나사
무武로써 만고에 그 명성을 떨치시어 회대지방이 치우님에게 복속하니
천하는 감히 침범할 생각을 못하였도다.왕검님께서 대명을 받으사
그 기꺼운 소리가 구한을 움직이시니 어수의 백성이 소생하여
바람결에 덕화가 새로워지도다.원한이 있는 자에게 먼저 그 원한을 풀어주시고
병든자에게 먼저 병을 제거해주시도다
-삼한장(三韓章) 100자
一心存仁孝四海盡光明
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
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
준岩圍四壁聖主幸新京
如枰錘極器極器白牙岡
枰반蘇密浪錘者安德鄕
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
興邦保太平朝降七十國
永保三韓義王業유興隆
興廢莫爲說誠在事天神
일심존인효사해진광명
진한진국중치도함유신
모한보기좌번한공기남
준암위사벽성주행신경
여평추극기극기백아강
평반소밀랑추자안덕향
수미균평위뢰덕호신정
흥방보태평조항칠십국
영보삼한의왕업유흥륭
흥폐막위설성재사천신
한마음으로 어김과 효도를 생각하시니온 누리가 광명으로 가득 차도다.
진한은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유일중일의 도로써 다스리니 만국이 함녕(咸寧)하여 유신(維新)이 이루어지고
모한(마한)은 왼쪽을 보좌하고 번한(변한)은 남쪽을 견제하니
험난한 바위산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도다.성스러운 주인님이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대, 저울추, 저울그릇과같아 백아강은 저울그릇이요, 소밀랑은 저울대요, 안덕향은
저울추이니 머리와 꼬리가 평형을 이루어 나란히 있고 덕은 신정(神精)을 지키어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이루게 하시니
조정에 70국이 항복을 시키시어 영원히 삼한의 뜻을 보전케 하시도다.
왕업은 일어나고 또 망하는 법 함부로 흥폐를 입에 담지 말지니
오직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일에 있느니라.
(#) 원문
神誌秘詞 檀君達門時人 神誌發理 所作也 本三神古祭 誓願之文也 夫上古祭天之義要 在爲民祈福祝神興邦也
신지비사 단군달문시인 신지발리 소작야 본삼신고제 서원지문야 부상고제천지의요 재위민기복축신흥방야
今好事之人 將神誌秘詞 與圖讖星占 相出入推數敷演言 其震檀九變之圖 又作鑑訣 豫言之先河 亦謬矣哉
금호사지인 장신지비사 여도참성점 상출입추수부연언 기진단구변지도 우작감결 예언지선하 역류의재
(#) 해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때의 사람 신지(神誌)인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三神)께 올리는 옛제사에서 서원(誓願)의 글이다.
무릇 상고시대(上古時代) 제천(祭天)의 참 뜻은
- 백성을 위하며(爲民),
- 복을 기원하고(祈福),
- 신(神)께 축원(祝願)하며,
- 나라를 부흥하게 함(興邦)에 있다.
오늘날
호사가(好事家)들이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圖讖)과 성점(星占)을 서로 내놓으며 수(數)를 추리하고
부연(敷衍)해서 말하기를 그것이 <진단구변도 震檀九變圖>라고 하고,
또는 감결(鑑訣), 예언(豫言)의 원천(源泉)이라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보충설명]
- 6세 단군 달문 : BC 2083 재위에 올라 36년간 통치하다.
- 서원(誓願) : 맹세하고 기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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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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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에 있는 백아강(白牙岡)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서경(西京)을 거기에 해당시켰다.
신지(神誌)는 단군 때 사람이라고 세속에서 전한다.
권남(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주(註)에 보인다.’고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 부록 하권 백악고(白岳考) 부(附) 아사달(阿斯達)편에 썼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신지비설(神誌祕說)》에 저울로 세 서울[三京]을 비유하였는데,
삼각산 남쪽으로 오덕구(五德丘)를 삼아서 저울추에 비유하였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경도(京都)>
성호 이익(李瀷 1681- 1763)은
고려비기(高麗秘記)에서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비기(秘記)가 많았다고 말하고,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마치 칭추(稱錘)ㆍ극기(極器)와 같으며 칭간(稱幹)은 부소(扶疎)이다.” 했으니,
칭추라는 것은 오덕(五德)의 땅이요,
극기는 백아강(白牙岡)이니, 이것은 저울로써 삼경(三京)을 비유한 것입니다.
송악(松岳)이 중(中)이 되고
목멱이 남이 되며
평양이 서가 되므로 극기라는 것은 머리요,
추(錘)라는 것은 꼬리이며,
칭간이라는 것은 벼리[綱]를 거는 곳이니
송악이 부소가 되어 칭간에 비유되고,
평양[西京]이 백아강이 되어 칭수(稱首)에 비유되며,
삼각산(三角山)의 남쪽이 오덕구(五德丘)가 되어 칭추에 비유된 것입니다.
(중략)
《신지비사》라는 것은 어느 사람이 지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 성조(聖朝)의 문명지치(文明之治)를 예견했으니 이상하다 하겠다.(중략)’
하여 모호한 입장 표명을 한다.
그러나 신지비사의 존재 사실은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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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원(李裕元)이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신지비설(神誌秘說)"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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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신지비설(神誌秘說)》에서 삼경(三京)을 저울에 비유하였는데, 삼각산(三角山)의 남쪽을 오덕을 갖춘 언덕[五德邱]이라 하여 이를 저울의 추에 비유하였다.
오덕(五德)이란,
중앙에 있는 면악(面岳 남산(南山))은 원형(圓形)이므로 토덕(土德)이고,
북쪽에 있는 감악(紺岳)은 곡형(曲形)이므로 수덕(水德)이고,
남쪽에 있는 관악(冠岳)은 첨형(尖形)이므로 화덕(火德)이고,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의 남행산(南行山)은 직형(直形)이므로 목덕(木德)이고,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의 북악(北岳)은 방형(方形)이므로 금덕(金德)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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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李裕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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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순조 14)∼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1873년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 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로는
《임하필기 林下筆記》·《가오고략 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高宗實錄, 日省錄, 陰晴史,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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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지비사(神誌秘詞)는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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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 1352-1409)도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建元陵神道碑銘에서,
유명시강헌조선국태조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건원릉신도비명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라 했다.
書雲觀舊藏秘記。有九變震檀之圖。建木得子。朝鮮卽震檀之說。出自數千載之前。由今乃驗<東文選卷之一百二十>
서운관구장비기。유구변진단지도。건목득자。조선즉진단지설。출자수천재지전。유금내험<동문선권지일백이십>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는 단군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뜻이고,
유구변진단지도(有九變震檀之圖)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신지비사의 비결처럼 조선이 수립되고,
역기능에 의한 논란으로 참서라는 이름을 붙여 금서가 되고 불태워지는 운명을 맞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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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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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1393년(태조 2)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는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鎪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되는바,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하였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海東名臣錄, 權陽村の入學圖說に就いて(李丙燾, 東洋學報 17·18, 1929)>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실녹, 정종실녹, 태종실녹, 해동명신녹, 권양촌の입학도설に취いて(리병도, 동양학보 17·18,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