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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예식 설교)
창 1장 26절-31절. 2장 8절-25절.
1장 26절-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누가 이 말을 하는 거냐?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까 ‘내가 내 형상을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 이래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 한 분 외에 또 다른 신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삼체라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 라고 하신 것은 인간들이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 인간들이 쓰는 용어를 빌려서 말씀하신 건데, ‘우리’ 라고 하신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합동해서 인간을 지었다는 의미의 말처럼 들리게 해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특수도모로 지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즉 ‘인간 남녀 너는, 인간 너는 하나님의 특수도모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인간 자기는 누구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벌레나 짐승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 벌레나 짐승에게는 하나님의 특수도모가 없고 오직 인간 자기만이 하나님의 특수도모 하에 지음을 받은 거다. 따라서 인간 자기가 남 보기에 어떻게 생겼든지,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눈이 작던 눈이 크던, 키가 작던 키가 크던, 내가 어떻게 생겼든지 나는 하나님의 특수도모로 지어진 존재다. 이걸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니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라. 외모 모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논하지 말아라.
그러면 ‘특수도모’라는 게 어떤 뜻이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실 때 나를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천국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거다. 계: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창:에서 인간을 왜 만들었느냐?’ 하는 뜻이 계:에 있다. 죽음 저 너머 세계를 염두에 두시고 인간 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국적인 목적 면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어느 나라를 향해 가는 것으로 되어있는 거냐? 하늘나라다. 왜냐?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성경이 말을 하니까. 오늘 신랑 신부도 하나님의 특수도모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라.
28절-31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이것들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번식하라는 거다. 말하자면 육해공을 다 다스리라는 거다. 누구에게 이 명령을 내렸느냐? 인간 나에게. 이걸 알고 있느냐? 인간 자기에게 이 명령을 하신 거다. 대표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한 말이지만 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요, 인간 나도 마찬가지이니 인간 나에게 말씀하는 거다.
그러면 다스리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실력이 있어야 한다. 무슨 실력이냐? 신적인 실력,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이 있어야 다스릴 수 있다. 이게 없으면 무능해서 못 다스려지고, 결과적으로 쫓겨나게 된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에덴동산의 생명과를 먹어야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인데 선악과를 따먹으니 저주를 받아서 무능해지고, 타락이 되어 쫓겨나서 고통으로 살다가 죽더라. 이걸 미리 봐라.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과 하와를 계시 등용물로 등용을 해서 그들이 한 일을 성경에 기록케 해서 오늘날 나의 눈으로 그 사건을 읽게 하고 보여주는 것은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인간 너도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거다.
성경으로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뭐는 따먹고 뭐는 따먹지 말아라? 생명과는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그런데 오늘날을 살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오늘날 교회가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하나의 역사로만 보지 하나님께서 오늘날 나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게 큰 문제다.
신앙 믿음은 과거나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에 되어지는 거다. 현재의 연속이다. 과거에 잘 믿었지만 지금 못 믿고 있다면 이건 뚝 떨어진 거다. 미래에 잘 믿겠다?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적중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현재에 뚝 끊어져 있는 거고, 이러면 미래에 잘 믿어질 수가 없는 거다. 인간 네가 스스로 속고 있구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너에게 현재적으로 적중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2장 8절-17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두 남녀를 최고의 좋은 장소에 만들어 두셨는데 그곳이 에덴동산이다. 그러면 이 에덴동산이 천국이냐, 이 세상이냐?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인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그곳에 하나님이 거니셨다. 오늘날 이 세상도 넓혀서 볼 때 에덴동산인데, 영의 눈으로 보면 타락된 에덴동산이다. 그래서 이걸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거니시는 신앙의 정신세계, 진리의 정신세계의 에덴동산이 따로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가견적 현실적인 위주로 생각을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 속으로 들어가서 영계 정신계를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에덴동산을 근원으로 하여 네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 비손강 주위에는 금은보석이 가득 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두 부부에게 있어서 최고의 좋은 장소, 최고의 좋은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불행하게 보이고, 가난하게 보이고, 어렵게 보일지라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구원을 이루기에 최고의 좋은 장소요 최고의 좋은 환경이다. 이걸 볼 줄 알아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과, 신앙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정신 사상을 가지느냐에 따라 앞으로 사는 면이 완전히 각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정령 죽는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으면 영원히 영생으로 사는 일만 하게 되고, 하는 일은 전부가 영생이다. 생명과를 먹으면 모든 사고방식, 살고 활동하고 일하는 것 전부는 사는 마음, 사는 생각으로만 들어간다. 그러니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할까? 생명과를 먹으면 이렇게 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먹는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이 하는 것 전부가 죽는 거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는 게 전부는 죽는 거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행복에 영광으로 덜덜 굴릴지라도 선악과를 먹고 된 것은 전부가 죽는 거다. 사망적이고 고통이고 눈물이고 한숨이다. 즉 산다는 그 자체가 저주다. 이것이 어디에서 되어지는 거냐? 현실에서 되는 거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성경대로 되는 거다. 믿던 안 믿던 자기는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만 되는 게 아니라 성경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거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여자 하와를 만들기 전에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아담의 어깨에는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다. 아담은 이걸 크게 느꼈어야 했다. 생명과를 먹으면 하는 것마다 살아나는 것이요 하나님 쪽으로 영원히 영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자기 속에서 성령의 열매로 가득가득 맺어나가는 거다. 오늘날 믿는 우리도 이걸 무겁게 느끼고 반드시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과란 무엇이냐? 한 마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과다. 예수님께서 만찬석에서 제자들을 앉혀놓고 당신을 상징적으로 뭐라고 했느냐? ‘떡은 내 몸이니, 포도주는 내 피니 나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이 되는 거다.
이것을 교훈적으로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성품을 입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이 교훈을 먹으면 인간의 성품이, 그 인격이, 그 도덕성이 하나님을 닮아나가는 거다. 성령의 열매의 사람이 되는 거다. 인격과 성품과 도덕성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거다.
자기가 예수를 일 년을 믿었느냐? 십 년을 믿었느냐? 수십 년을 믿었느냐? 그렇다면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더러운 잡생각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졌느냐? 안 바꿔졌다면 예수 헛 믿었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따라가는 거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니 예수를 믿어갈수록 인격과 성품이 예수님으로 닮아지고 예수님의 정신이 자기에게 옮아져 와야 한다. 술을 잘 먹는 사람을 따라다니면 술 먹는 게 옮아온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따라다니면 담배 피우는 것이 옮아온다. 영어선생을 따라다니면 영어가 옮아온다. 중국사람을 자꾸 따라다니면 중국말과 중국의 풍습이 옮아온다. 하물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왜 예수님을 못 닮느냐?
예수를 믿으면서 늘 세상 염려 걱정을 한다면 이 사람 속에 뭐가 들었다는 거냐? 세상이 가득 들어있는 거다. 그러면 이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 뭘 배운 거냐? 목사님이 뭘 가르친 거냐? 증거가 되는 거다.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교회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냐? 기독교는 인간의 본분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말을 한다면 ‘하나님, 나를 왜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나를 돼지나 짐승처럼 만들지 않고, 나무나 돌로 만들지 않고 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 하고 물어야 할 입장이다.
모세의 친모 요게벳이 애굽의 바로왕의 딸이 기르고 있는 모세의 유모가 되어서 어린 모세에게 젖을 먹이면서 모세에게 어떤 정신이 들어가도록 가르쳤겠느냐?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앉고 젖을 먹이면서 사무엘에게 어떤 정신이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까? 오늘날 어린아이를 키우는 예수 믿는 부모는 어떠냐? 자식을 어떻게 키우느냐? 어떤 정신이 들어가게 키우느냐?
선악과가 무엇이냐? 선악과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다고 하느냐? 눈으로 보기에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생겼다고 한다. 이건 외모 외형을 기준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외모 외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말씀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성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하신다. 생명과를 먹으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닮아라’ 그 말이다. ‘인간아, 너는 영원히 천국에서 살 존재이니 그 천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닮아라’ 그 말이다.
누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쳐다보게 했느냐? 누가 꾀었느냐? 마귀가 꾀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여서 이것을 따먹으니 매사를 보는 눈이 외형 외모가 기준이 되어버렸다. 먹음직하냐? 보암직하냐? 탐스럽게 보이느냐? 이런 기준을 먹게 되면, 즉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외모 외형만을 보는 지식이 자기의 기준이 되어버리니,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자기 지식의 기준이 되어버리니 이렇게 되면 네 속의 것은 전부가 죽고 죽어나가고, 고통이요 한숨이요 멸망이 되는 거다.
원래는 인간세상에 생명과인 하나님의 지식의 기준이 하나뿐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니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즉 외모 외형을 기준으로 보는 타락된 지식이 하나 더 생긴 거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는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성경,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이러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진리지식의 지혜자가 된다. 그리고 선, 사랑, 거룩, 진실의 하나님의 도덕성을 가진 자가 된다. 그리고 의와 주권의 하나님의 능력성을 가진 자가 된다. 이렇게 되면 천하 만물을 다스리게 되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 대신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제 마음대로 에덴동산에 붙어있을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렸다. 주기 싫다 그 말이다. ‘그 좋은 환경을 주기 싫다. 그러니 나의 사랑권 애정권 밖으로 내쫓아라’ 이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에게 세상염려 걱정 근심 고통이 없느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권 애정권 밖으로 쫓겨났다는 증거다. 선악과 대신 생명과를 먹어봐라. 말씀의 진수성찬을 먹어봐라. 그러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난다. 예수 믿는 이치를 어기지 말아라. 이치를 어기는 사람은 제일 미련한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교인들을 세상소원 목적적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부류가 많다. 이것은 사단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를 꾀인 수법과 같은 거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 결과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 뭘 말하는 거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는다’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들은 후에 하와를 만나게 되는데, 하와를 만나자 마자 둘이서 즉시 어디로 가야 했느냐? 생명과 쪽으로 가서 생명과를 따먹어야 했다. 하와를 만난 즉시 생명과를 먹는 게 시급하다. 그런데 선악과 쪽으로 가버렸다.
오늘날 예수 믿는 처녀 총각들은 어떠냐? 만나자 마자 ‘우리 커피 한 잔 하러 갑시다’ 라고 하지 않느냐? 즉 만나자 마자 생명과는 안 먹고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느냐? 이렇게 해서 결혼을 한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해서 결혼을 한 후에 행복한 사람이 있느냐? 생명과를 안 먹는데 어떻게 행복이 나오겠느냐? 만나자 마자 쓰디 쓴 커피를 마셨으니 살면서 그 인생에서 어떤 맛이 나오겠느냐? 쓰디 쓴 맛밖에 더 있겠느냐?
18-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워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데리고 오니 아담 스스로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담 자기 뼈와 살보다 아담이 더 좋다는 거다.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는 것은 최고로 만들었다는 거다. 그래서 여자들 살은 보들보들 매끈매끈하지 않느냐?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러니 아내를 미워해야 하느냐, 더 사랑해야 하느냐?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아내에게 주는 최고의 맛, 최고의 열매, 최고의 정신, 최고의 마음은 하나님도 좋아하시는 생명과를 먹여라. 사랑이냐? 생명과를 먹여라. 아내를 사랑하느냐? 생명과를 줘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느냐? 최고로 좋은 생명과를 줘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느냐? 최고의 생명과를 줘라. 부모를 공경하느냐? 최고의 좋은 생명과를 줘라. 이 생명과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모든 부요 성공 기쁨 행복이 다 들어있다. 이 이치를 아느냐?
사랑하는 아내에게 생명과를 먹어야 되는데 문제는 혼자 보내면 안 된다. 왜냐? 시험 탄다. 창:에 보면 하와가 혼자 있었던 게 분명한데, 아담이 어디에 갔기에 하와가 혼자서 선악과를 따먹은 거냐? 최고의 좋은 장소, 최고의 좋은 열매는 같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왜 혼자 다니느냐? 이러면 시험 탄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두 사람이 벌거벗었다. 왜냐? 옷 공장이 없어서냐? 죄를 안 지었으니까. 그러나 죄를 지으면 옷을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부끄러운 거다.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워지는 거다. 세상소원 목적이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으면 부끄러워지는 법이다. 생각이던 마음이던 일이던 물질이던 숨기지 말아라. 숨기면 부끄러워진다. 남자들 넥타이에 왜 구멍을 뚫어놓느냐? 비상금이 왜 필요하냐? 왜 허리띠 실밥을 뜯어서 구멍을 내는 거냐? 신발 깔창 밑에 왜 뭘 숨기느냐?
부부간에 ‘내가 벌었으니 이것은 내 것, 네가 벌었으니 그것은 네 것’ 이렇게 산다면 둘이서 낳은 아이는 누구 거냐? 이런 부부가 사랑일까? 부부가 이렇게 산다면 이건 서로가 외모 모양 가죽 뼈다귀는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안의 정신은 짐승보다 못하다. 사람이길 거부했으니 악한 자다. 이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참 사람으로 성장하겠느냐? 이런 부부, 이런 가정, 이런 사회가 어찌되겠느냐? 오늘날 사회가 되어지는 일을 봐라.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이냐? 돈이 없어서 고통이냐? 아니다. 제일 문제는 인간이 문제다.
예수 믿으면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예수 믿은 후로 예수 믿기 전의 성격 성질이 얼마나 바꿔졌느냐? 예수 믿기 전의 소원성 취미성 추구성이 얼마나 바꿔졌느냐? 하나도 안 바꿔진 채 예수를 믿고 있느냐? 하나도 안 바꿔진 채 ‘나는 집사다. 권사다. 목사다’ 라고 하느냐? 이건 사람이 안 된 거다. 그러니 자자손손 교육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으로 새사람을 입어라. 하나님의 진리식의 사람이 되라. 이게 성경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명이라고 하느냐? 천만 명이냐? 그러면 4, 5명 중에 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건데, 밟히는 게 예수 믿는 사람인데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사람이 안 돼 놓으면 어찌 될까?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 두 가지 두 종류의 교훈의 질이 내려가는데, 첫째는 참 하나님의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로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결혼, 이런 가정, 이런 부모의 교육이 있으니 이것은 생명과를 먹이는 교훈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세상에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어 잘 살다 가자고 하는 가정, 이런 결혼, 이런 정신을 가르치는 부모, 이런 선생, 이런 목사의 교육이 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이는 교훈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것은 세상과 세상 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거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속 중심 사상이 똑같다. 다만 다른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껍데기뿐이다. 이런 가르침, 이런 교훈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꾀임에 넘어간 정신이요 사상이다. 마:에서 예수님에게 다가간 마귀의 시험의 목적이 성경구절을 들고 이렇게 했다. 그리고 오늘날 거짓 종들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와 같은 수법을 써서 성도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의 사람으로 되는 생명과를 먹어야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예수를 믿느냐? 옳은 것을 배우느냐? 그러면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 성경에 보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다. 모든 병이 어디서 나온다? 마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예수를 바로 믿어봐라. 자가 치료도 있는 거다. 사람을 바로 깨우쳐 봐라. 깨달음을 받아봐라. 이러면 자기 환경을 다스리지, 자기 가정을 다스리지, 자기의 현실을 다스리지. 이게 왕이다. 대통령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느냐? 못 다스린다. 남 보기에 어떻게 생겼더라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주위를 다스리고, 자기의 현실을 다스리는 자가 실력 있는 자다. 참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붙잡고 역사를 하신다.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 무슨 직책을 가졌다? 내가 뭘 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걸 알아주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에덴동산으로 주신 현실세상에서 생명과를 먹는 부부, 진리이치를 먹는 부모, 생명이치를 먹는 부부, 도덕이치를 먹는 부부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라면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가치는 외부 모양에 있느냐, 속 중심에 있느냐? 속 중심에 있다. 총각 입장에서 여자가 치마만 걸치면 무조건 오케이냐? 처녀들은 남자면 무조건 오케이냐? 그 속에 도둑놈이 들어있는 것은 모른 채 겉만 보고 택할 거냐? 그러면 사람의 속을 어떻게 보느냐? 진리생명과를 먹으면 알게 된다. 보게 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100% 완전한 자는 없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속 그대로 계속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서서히 바꿔져 간다. 하나님의 것으로 서서히 갈아 넣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참 인간으로 보시겠느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겠으며, 사랑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겠느냐?
신랑 신부는 엡5:22-33절 봉독하십시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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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