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ief's Diary-
22.짙은 안개의 비밀(1)
레즈니오에 들어선 지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엔 밝은 태양 대신 짙은 안개가 메아리쳤고, 울창한 침엽수림은 여전히 어두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행이 태양을 보지 못한 게 벌써 며칠 째라는 것은 더 할 말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차츰 일행에게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니.....
"......"
"......"
...전에 같으면 왁자하게 떠들고 있을 여행이 침묵으로 일관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저 인간이 아닌 레이렐과 라피노, 세라프만이 팔팔하게 침엽수림을 거닐 뿐 피레체와 디에마는 흐느적흐느적 두 마리의 좀비처럼 숲을 헤쳐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왜 데아는 별로 지친 기색이 없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 가요오오~."
피레체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일행을 불렀다. 때는 오전. 태양도 내리쬐지 않아 정확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아직 배꼽시계가 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피레체의 말에 동의를 표한 일행은 즉각 근처 침엽수림에 등을 기대고 잠시 멀거니 숲을 바라보았다.
"......"
"......"
...나 원 참, 어색해서......누가 보면 어제 상견례 한 사람들끼리 그저 숲을 거니는 것 밖에 보이지 않겠군. 아무런 말도 없으니 말 붙이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네로도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지 세라프의 품에서 냥냥 거리며 울어대었다.
"저, 저기, 라피노. 다음 마을까진 얼마나 걸리지?"
"오늘 오후엔 도착해요."
"......"
"......"
다시 시작된 침묵. 한숨을 쉬는 레이렐.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일행들......그때였다.
스윽
"...?!"
갑자기 레이렐의 목으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왔고, 그는 그것이 뭔가 내려보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날카로움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단검!
"...일어서."
뒤에서 들리는 낮고 탁한 목소리에 레이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것과 동시에 그의 목에 겨누어 있던 단검도 같은 속도로 올라왔다. 재미있는 건, 아니 무서운 건 일행들 모두의 목에 하나씩 작고 날카로운 단검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짜 강도나 산적은 아닌 것 같은데......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사 아니면 이 일을 수십년 간 해 먹은 노상 강도일 게 틀림없었다.
일행이 전부 일어서자 그제야 수풀에서 ACD_Booster를 든 거너 몇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단순하고도 위장이 쉽도록 얼룩덜룩하고 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총구를 겨누는 그의 자세에서 이유 모를 노련미가 묻어 나왔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국가 공인 헌터인가? 하지만 레이렐이 그런 의문을 품을 즈음, 그들과 같은 차림새에 같은 총을 든 녀석들이 더 나타났고, 그들이 일행들에게 총구를 겨눌 즈음에야 단검이 사라지면서 다시 6명의 사람이 수풀에서 몸을 드러내었다. 순식간에 12명에게 포위 당한 레이렐은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걸(!) 사용하지 않는 한 이 녀석들을 전부 뿌리치기는 불가능했다.
거너에서 파생된 직업은 상당히 다양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헌터란 직업은 어떤 목표를 '사냥'하는 직업이었는데, 생계 수단으로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에 시험을 치러 공인을 받고 공식적으로 사냥을 하는 헌터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개 국가 공인 헌터들은 '암살자'라는,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맞붙어 밀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야도 다양했다. 애니멀 헌터(동물 사냥꾼)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헌터, 워 헌터(전쟁이 나면 일종의 특수부대처럼 행동한다.), 어쌔시네이터(assassinator. 일종의 암살자처럼 행동하지만 암살자들이 '소리 없이' 암살하는 데 비해 이들은 당당히 적을 암살하고 나온다. 으음......치고 받는 걸 좋아하는 암살자들이라고나 할까?) 등등......
"당신이 레이렐 인 아크세이드?"
그때 레이렐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녀석이 낮고 탁한 목소리로 물어 오자 레이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수풀을 향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수풀에서 세 명의 인원이 더 나왔다. 두 명은 다른 사람과 같은 옷차림이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권총에 메탈 아머를 껴입고 짙은 색 모자를 하나 쓰고 있었다.
"......"
"......"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그의 눈 깊은 곳에는 갈색 메마른 고목과 회색 구름 한 줄기가 드넓게 깔려 있었고 그 중앙에는 레이렐 자신의 모습이 가만히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데려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일행은 레이렐을 선두로 일렬로 늘어섰고, 그들은 일행을 에워싼 채 그들을 다시 수풀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지휘관이란 사람은 레이렐 바로 앞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쯤 걸었을까......
"...!"
"저런 게......산 속에 있었나?"
수풀과 수풀을 헤치자 그들은 커다란 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장을 에워싸는 목책과 그 위에 군데군데 늘어선 경비초소의 높이는 거의 4~5M에 육박했고, 목 책의 거대한 문을 넘어서자 정말 한 개의 영락없는 군사 마을이 일행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두꺼운 통나무로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는 건 레즈니오의 고대 풍 건물들과는 크게 달랐지만 그 분위기는 보통 레즈니오 마을보다 훨씬 밝고 따뜻했다. 엄마를 따라 마을로 나온 아이,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뜨거운 열기가 풀풀 풍겨 나오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과, 외지에서 조심스럽게 들어와 물건을 파는 상인들.....
"밑의 마을보다 훨씬 활기 차군요."
"그래. 그렇군."
레이렐은 라피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렐도 이런 분위기의 마을을 좋아했다. 침울하고 착 가라앉은 마을보다는 이렇게 소란스러우면서도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의 마을이 그에게 안정을 주곤 했다. 심지어 태양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으나 하늘은 여전히 칙칙한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게다가 데아와 피레체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왠지 부담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사실 그렇게 마을을 활기로 가꾸어 가던 사람들 대부분은 헌터들에게 끌려나온 일행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던 것이다. 남자들은 제각각 스타일이 다른 피레체, 데아, 세라프 세 자매(?)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여자들도 레이렐, 라피노, 디에마를 보며 제각각 수군거렸다. 그리고 중년층 혹은 노년층 인물들은 녹색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레이렐이 나타났다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그렇지만 레이렐을 비롯한 남자 삼총사는 오히려 즐기는 눈치였다, 라피노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여자들에게 미미한 미소를 띄기도 했고, 디에마의 경우엔 아예 손을 흔들며 반갑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둘 다 금방 레이렐에게 뒤통수를 가격 당했지만.
이윽고 그들이 마을 중앙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천막이 나타났다. 천막 주변에는 지금 일행을 에워싼 사람들과 같은 헌터들이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저 멀리에도 군데군데 천막이 그들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일행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 내며 사냥꾼들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의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탁자를 기준으로 앉아 있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꼭 닮았고, 가운데 앉은 사람은 백발을 짧게 다듬은 채 일행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자님, 데려왔습니다."
"좋아. 이만 물러가 봐라."
"네."
백발 노인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일행을 끌고 왔던 지휘관은 밖으로 나갔고, 그와 동시에 헌터들도 전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노인은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굵은 목소리가 천막을 울렸다.
"여기 앉게나."
그 말에 일행은 그들 앞에 마련된 의자에 차례차례 앉았다. 여태껏 세라프의 뒤를 쫓아왔던 네로와 레이렐 어깨에 매달려 있던 라트는 그 노인을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라트와 네로라는 동물인가."
"벌써 다 알고 있군요. 언제부터 저희 뒤를 밟았죠?"
라피노의 목소리에 은은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자 노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자네들은 이제 꽤나 유명해졌으니까. 의뢰를 실패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하더군. 게다가 귀족, 공작의 경비력을 홀홀 단신으로 뚫어 버리는 힘까지. 소문을 들었나 모르겠지만 자네가 쓸고 간 집은 곧 도둑질 및 폭동의 1순위가 되곤 했다네."
그 말에 레이렐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경비력을 줄여 버린 그 곳이 자신으로 인해 약해진 틈을 타서 재빨리 들이닥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울분을 흩뿌리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그 예로, 소문이지만 몇 달 전 치안대의 무기창고에 폭발을 일으킨 뒤 그 주변 도둑길드가 PEC들이 무기창고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봉쇄했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오곤 했다.
그러나 레이렐은 이들이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멀쩡한 사람을 붙잡아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문으로 이미 다 듣고 있었다는 건가요?"
라피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지도자'로 불린 노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게다가 이번엔 우리가 좀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서."
"......"
필시 좋은 의뢰는 아닐 것이다. 도둑의 범주를 벗어난 암살이라든가 아니면 중요 목표 파괴라든가 그런 것들을 시킬 테지. 그리고 그 때쯤 되면 레이렐은 이 곳을 벗어날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이름이 뭐예요?"
"뭐?"
별안간 일행 틈에 껴서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피레체였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렸다. 헝클어진 금발을 매만지던 그녀는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그 노인에게 그렇게 물어 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귀족인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게 불만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이 꼬마가 감히...!"
"어허, 앉게! 디나인."
왼쪽에 앉은 중년 남자가 칼을 뽑으려 하자 노인은 서둘러 디나인 이란 그 중년 남자를 말렸다. 그리고 곧 그가 얌전히 자리에 앉는 것을 본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피레체에게 다가갔다. 피레체의 눈은 점점 두려움으로 물들어 갔지만 아직 불만은 지우지 못한 듯 그녀의 표정만은 도통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턱
"소인 레벨트 뮬 리피란트, 레플르트 공작가의 피레체 덴 레플르트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 말에 일행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유야 그의 이름을 알았기 때문이라지만,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처음 보는 희한한 여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과 이미 그녀가 공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놀라움을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피레체. 이제 한 중년 남자만을 제외하고 모두의 이름을 알게 된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동안 레벨트는 제 자리에 돌아가 가만히 일행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셨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좋아요."
레벨트가 입을 열자 레이렐과 라피노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레벨트는 피레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뭐 좀 드시겠습니까?"
"에? 저요? 우웅......쿠키 있으면 좀 주세요."
그녀의 말에 레벨트는 이번엔 오른쪽 중년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까 왼쪽에 일어났던 디나인이란 중년과는 다르게 군소리 하나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 천막을 나왔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는 점을 알려 주는 행동이기도 했다. 아니면 피레체가 뭔가를 다 먹을 즈음엔 이야기가 끝난다든지.
"좋아. 이야기를 시작하지. 으음......"
레벨트는 목청을 더듬으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그는 먼 산을 바라보는 듯 넋을 놓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안개에 대해 알고 있나?"
절레 절레
"...흐음,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군. 이 안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네. 나뿐만 아니라 20살 먹은 청년들도,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의 아이들도 몇 년...5년 전의 따뜻했던 햇살을 기억하고 있지. 마을은 항상 햇빛으로 가득 차서 어느 해는 가뭄으로 고생한 때도 있었다네. 그래도 우리는 불평을 하지 않았지. 그 해에만 비가 적게 내렸을 뿐 다른 날에는 비도 고르게 내리고 바람도 한가롭게 살랑 부는 곳이었다네. 그런데 새 황제가 즉위하고 몇 달 지나지도 않아 이 풍족했던 땅에 짙은, 무척이나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지. 처음엔 하루만 지나면 평상시로 돌아 갈 줄 알았어. 그렇지만 일년이 지나고, 작물들도 모두 죽고, 활엽수도 죽고 이렇게 침엽수림만이 남았을 무렵에야 우리는 이 안개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하지만 그걸로 끝나진 않았다네. 태양이 사라지자 이유 모를 짜증과 분노가 솟구치고 태양을 보지 못한 늙은 노약자들은 하나 둘 죽어갔어. 후에 황제가 그런 일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 항의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우리를 좋은 말로 구슬려 보냈을 뿐이지. 하지면 며칠 전, 우리 정보부 측에서 '안개를 만드는 장치는 황궁 안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네.
해서 우리는 우리의 밝은 태양을 되찾기 위해 이렇게 뭉쳤다네. 왕권을 교체하려는 것도 아냐. 새로운 우리들의 정권을 세우려는 것도 아냐. 안개를 만든 게 잘못되었지 그 황제의 정치는 하나도 잘못된 게 없으니까. 실제로 황제는 안개가 생기자마자 대대적인 사업을 벌여 농업 국가였던 우리에게 터전을 만들어 주었어.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황제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밝은 태양을 위해 이렇게 황궁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네."
장황하지만 힘있게 연설(!)한 레벨트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겐 대의명분이 있다. 안개를 제거해야겠다는 대의명분. 그리고 대중의 지지도 있었다. 목적에 대한 순수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안개의 제거이지 왕권 교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레이렐이 보건대 그들의 항쟁은 어딘가 무모한 데가 있었다. 우선 국가에서 난을 일으키므로 '반란이다'라고 칭할 수도 있는 일이고, 군사를 몰고 온다는 점에서 어쩌면 대중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며, 아예 이들의 무기나 군사 자체는 왕의 군사보다도 훨씬 미흡했다. 친위대들은 메탈 아머랑 트럼프 카드 혹은 QR드릴러로 무장하고 있을 텐데...
"...작전은 어떻게 하려고요?"
그때 그의 말을 경청하던 디에마가 물어보자 레벨트는 잠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그는 번쩍 눈을 뜨며 말했다.
"우선은 승낙을 해 주게. 그래야 작전을 알려 줄 노릇이 아닌가."
그 말에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제히 레이렐을 보았다. 다른 건 대부분 라피노가 도맡아 하지만 의뢰하는 일은 거의 레이렐이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행의 눈가에는 무언의 바램이 들어 있었고, 잠시 주저주저하던 레이렐은 결국 일행의 기대를....
"...좋습니다."
저버리지 않았다.
늦은 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합의를 본 그들은 작전 설명을 듣고 내일 있을 전투를 위해 각자의 천막을 배정 받곤 곧 일찍 잠들었다. 그러나 레이렐만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는지 썰렁한 날씨를 조금이나마 막아 줄 것 같은 겉옷 한 벌만을 걸치곤 가까운 언덕에 올라섰다. 언덕 위에는 안개 사이로 희끄무레한 침엽수 그림자만이 나부낄 뿐이었다.
풀썩
침엽수 밑에 자리잡은 레이렐은 멀거니 마을을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을에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그 양옆으로 숲들이 빙그르르 둘러치고 있었다. 그는 곧 안개에 둘러쳐진 마을에 싫증을 느끼곤 다시 풀썩, 뒤로 드러누웠다.
작전......작전이랄 것도 없이 레벨트가 일행에게 맡긴 일은 간단했다. 일단 저항군 내의 헌터들(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은 정말 국가 공인 헌터들이었다.)이 먼저 부딪치면 그 뒤에 몰래 다가가 궁으로 침입한 뒤 안개를 만든다는 이상한 마법구를 깨뜨리는 일이었는데, 사실 뭐...실상만, 아니 말만 간단할 뿐 실제로 하면 아마 성공여부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목표는 황궁이 아닌가......과연 성공할까?
그러던 그의 눈에 문득 조그만 불빛, 아니 반딧불이 비쳤다. 나무 줄기를 휘감으며 노란 불빛이 오갔다. 아무런 걱정 없이 오가는 저 불빛들.....유려한 곡선을 감으며 휘도는 불빛.....불빛......걱정 없이 노니는 불빛......
......내가 걱정이 많은 것일까?
그러나 그가 잠들고 몇 시간 뒤, 이른 아침.
"와아아아!"
타타탕 탕 탕
"으음......응?"
레이렐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궐기대회 하나? 갑자기 무슨.....
펄럭
그때 별안간 천막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등장했고, 그 뒤를 이어 밝은 햇살이 밀어닥쳤다. 레이렐은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그가 누구인지를 보려 했으나 태양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렐은 곧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목소리를 통해서.
"레이렐 님!"
"라피노? 너 목소리가 왜 그리 급해?"
말투나 낯익은 억양으로 보나 라피노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꼭 목 쉰 사람처럼 둔탁했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
"저, 적이에요! 레즈니오 군이 몰려왔어요!"
"뭐?!"
그 말에 레이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유지해 온 잠의 끝자락이 그 한 마디 바람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적이 들이닥쳐? 레이렐은 어제 입었던 평상복으로 대충 갈아입고 매드 애니멀 시리즈 12개를 장비한 벨트를 허리에 묶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침의 새하얀 햇살이 그들을 비추었다. 웬일로 오늘은 안개가 끼지 않았군. 레이렐은 오랜만에 보는 햇살을 통해 맑게 개인 전장을 바라보았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채 권총, 기관단총, 기타 활이나 다트 같은 걸 날려대는 헌터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메탈 아머를 입은 채 MSD-1을 쏘아 대는 녀석들. 헌터들의 총알은 날아가는 족족 메탈아머에 맞고 튀어 올랐지만 녀석들의 총알은 사냥꾼들의 몸 구석구석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레이렐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녀석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피노, 스카우트."
레이렐의 말에 라피노는 허공에 손을 뻗으며 가만히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허공에 짙은 보라색 구멍이 생겨났고, 라피노는 거기에 손을 넣어 기다란 저격 총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라피노는 그것을 레이렐에게 건네주었다. 레이렐은 일단 하나라도 제거하기 위해 총신을 들고 스코프에 눈을 가져대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레이렐의 저격총에 손을 대자, 레이렐은 스코프에서 눈을 떼어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레벨트. 언제 나왔는지 다른 사람은 착용하지 못한 메탈 아머를 입고 G349 머신건을 어깨에 맨 그는 조금씩 다가오는 레즈니오의 병사들을 보며 레이렐에게 입을 열었다.
"끼어 들지 말게. 자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뒷문으로 도망가게."
"나머지 사람은 어쩌고요?"
"나머지 사람은 자네가 도망갈 시간을 벌게 될 것이네. 여기 다섯 명을 데려가게."
레벨트는 뒤쪽에서 가지각색의 총을 든 다섯 명을 불렀다. 각각 머리 모양도 비슷하고 옷 모양도 비슷했지만 얼굴만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들은 우리 저항군들 중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자들이네. 이들과 함께 오늘의 햇살과 같은 날들을 만들어 주게."
라피노는 레벨트의 말에 뭐라고 하려 했으나 레이렐의 손짓에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신 레이렐은 레벨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만나기로 하죠."
"그래. 꼭 성공해야 하네."
레이렐은 어느새 일어난 일행과 그 정예요원이라는 다섯 명을 데리고 서둘러 진지의 뒤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진지의 뒤쪽에 도착했을 즈음 요란한 머신건 소리가 들려왔다.
"왜 돕지 않은 거죠?"
진지를 나오자마자 라피노가 추궁이라도 하듯 레이렐에게 따졌다. 그러나 레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Mk 두 정을 이리저리 내뻗으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자 라피노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어 왔고, 레이렐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레벨트는 우리가 우리 본분을 다하는 것에 자신들이 거치적거릴 것 같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내 준거야. 레즈니오의 그 병사들을 다 이길 수 있는지 장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이기더라도 피해도 크고 힘도 빠진 상태에서 그것을 메운다고 시간만 떼우다가는 우리만 힘들어지고 정작 중요한 타이밍을 놓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재공격 받으면 여지없이 무너질 거라 생각했던 것이지."
"그, 그렇다면...!"
"...저들은 우리가 빠져나갈 때까지 목숨을 걸어 적을 막아 낼 거야."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후세에게 아름다운 햇살을, 이제 다시 안개에 잠기려는 저 태양을 물려주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다는 것인가...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단호한 그들의 결정. 레이렐은 이유 모를 부담감과 사명감에 눈을 빛내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사사삭
"앗, 따거. 으이씨, 이 나쁜 나무들."
"레이렐 오빠. 이 길로 가는 게 맞나요?"
나뭇가지에 팔을 긁힌 피레체의 목소리와 데아의 물음에 레이렐은 고개를 저으며 앞을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에는 그 다섯 명의 헌터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도 이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어'라고 하는 듯 했다.
마을을 나오자마자 간단한 인사를 나눈 그들. 제일 앞에 앞서가는, ACD_Booster를 든 마른 얼굴의 사내 이름은 로켄 데 크라이스였고, 그 좌우에서 SOA1938을 들이미는 두 사내, 왼쪽 초록색 머리의 이름은 케일 빈 레피렌스, 반대쪽 밤색머리 남자는 비엘 겔 가이아레드 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뒤쪽에서도 일행을 좌우로 호위하는 두 사람 중 긴 머리의 남자는 레이프 헬 리피란트, 반대쪽에서 긴 머리를 묶어 길게 늘어뜨린 채 PSQ9999라는 다기능 라이플을 든 20대 초반의 여성은 프레일 란 리피란트라고 했다. 레이프와 프레일은 남매인 동시에 레벨트의 자녀들이라고 했다.
레이렐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프레일이란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계속 히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는 이유는 그녀의 이름 때문이었다. 프레일. 머리가 세 개 달린 몽둥이 무기. 근데 왠지 그 무서운 무기와 그녀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비슷해 보였다. 당차고 굳센 그녀의 이미지와 프레일이란 무기 특유의 무식하고도 투박해 보이는 이미지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사삭
그때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굳어 버렸고,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이 나타났음을 경고하는 듯 했다.
"3시. 레즈니오 병사 출현. 숫자 셋."
"모두 제자리에 앉아라 그리고 전투를 준비한다. 프레일, 적이 사정거리에 다가오면 알려 주게. 레이렐 님과 일행 분들은 여기서......"
"아뇨. 저와 디에마도 전투에 참가하겠습니다."
로켄의 말에 재빠르게 움직인 일행. 그 뒤를 이은 로켄의 말에 레이렐은 고개를 저으며 디에마와 함께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로켄은 잠시 주저거리며 입을 열려 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수풀에 몸을 숨겼다. 로켄이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지금은 단 한 명의 전투인원도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사정거리 진입."
"조금만 더 기다려라."
프레일의 말에 로켄은 더욱더 몸을 숙이면서 일행더러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움찔, 하고 움직이려던 레이렐과 디에마는 다시 총을 다잡으며 신호를 기다렸다. 수풀에서 들키지 않도록 스코프로 계속 관찰하고 있던 프레일의 숨소리와 으슥한 풀벌레 소리만이 고요한 일행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피레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지금이다!"
철컥
철컥 철컥 척
로켄의 목소리와 함께, 정예원이라는 다섯 명의 헌터들과 다른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그 세 명의 병사를 겨누었다. 레즈니오 병사들은 갑자기 일어난 그들을 보며 당황해하다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빠르게 총구를 들었고, 그것과 동시에 아주 잠깐의 총소리가 들리면서 그들은 털썩 쓰러졌다. 일행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총소리다! 쫓아라!"
"제길, 들킨 건가?"
"12시 방향과 1시, 10시 방향에 적 다수 출현! 20명은 되어 보입니다!"
다급한 프레일의 목소리에 일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장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들의 눈에 점차 자신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하얀 갑옷들이 번뜩 비추어졌다. 제길.....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타타타
피웅 파악
"크읏, 제길. 레이프가 선두에서 이 분들을 이끌고, 나머지는 뒤에 있는 녀석들을 견제하면서 전진한다!"
로켄의 말에 레이프가 ACD_Booster를 든 채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차례차례 일행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네 명은 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다양한 크기의 탄피가 갈색 대지의 숲에 떨어졌다.
타타타타
파파팡
"3시에 적 다수 출현! 지원 부탁바랍니다!"
"이런......케일이 2시 방향을 맡고 비엘이 10시 방향을 맡는다! 프레일, 저격 모드!"
로켄이 소리치자 앞쪽으로만 방아쇠를 당기던 넷은 좌우로 흩어졌고, 프레일은 한 발짝 물러서며 PSQ에 스코프를 달고 총을 단발모드로 바꾼 뒤 그것에 눈을 대었다. 이리저리 총구를 돌리던 그녀의 크로스헤어에 한 녀석의 머리가 조준되었다.
......타앙
쉬익 팍
단발 마의 총성. 날아가는 라우펠 7.7 PSQ전용 탄환. 그리고 끔찍한 소리.
털썩
"스나이퍼다!"
"제길, 최대한 엄폐물을 활용하라!"
반대쪽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짙은 색 베레모의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레일의 스코프가 이번엔 그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타앙
털썩
"...지휘관 사살."
프레일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그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자 로켄은 빠르게 후퇴를 외쳤다. 뒤에서 연신 탄환이 빗발쳤으나 모두들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레즈니오의 수도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