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은 신라의 왕궁이었던 곳이다. 궁궐이 있었던 곳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렀다. 당대에는 ‘임금이 거주하는 성’이라는 의미의 재성在城(해자를 갖춘 성이라는 뜻도 있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월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월성이라 이름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에 옮겨가 살았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조에 나오는 기록으로 보아 월성은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 22년(서기 101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월성의 내부와 성벽에서 발굴 조사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데 언제 월성이 축조됐는지 정확한 기원과 연대는 곧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월성은 파사이사금이 금성金城에서 월성으로 도성을 옮긴 후 신라 역대 왕들의 거처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궁성이 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昔脫解가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석탈해는 나중에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성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과 북쪽, 서쪽으로는 흘과 돌을 쌓았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를 팠다. 동쪽으로는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 터가 남아 있다. 성안에 누각과 관청, 왕궁을 비롯한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고 그 건물터들이 남아 있다.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월성으로 옮겨온 석빙고****도 있다.
경주의 역사 유적은 5개 지구로 나뉜다. 왕궁터인 월성을 중심으로 하는 월성 지구, 황룡사터와 분황사를 포함하는 황룡사 지구, 신라 왕경王京을 방어하던 명활성明活城(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둘레 약 6km의 산성)이 있는 산성 지구,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 집중된 대릉원 지구, 수많은 절터와 탑‧불상 등의 불교 예술이 남아 있는 남산 지구다. 경주 역사유적 지구는 신라의 도시 계획과 당시 번성했던 문화‧종교‧예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적으로서,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파사이사금
신라 제5대 왕으로 성은 박朴, 이름은 파사婆娑, 칭호는 이사금尼師今. 탈해이사금(신라 최초의 석씨 왕) 사후 태자 일성보다 뛰어난 위엄과 현명함으로 왕위에 올랐다. 파사이사금은 제3대 유리儒理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삼국사기> 왕력, <삼국유사>)과 유리이사금 남동생 나로柰老의 아들, 즉 유리이사금의 조카라는 설(<삼국사기> 보충설명)이 있다.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들이 따랐다고 한다. 재위 기간 음즙벌국을 비롯해 실직국, 압독국 등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영토 확장에 힘썼고 특히 가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유지했다. 초기 신라가 작은 소도시에서 고대국가로 나아갈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32년간(80~112) 재위했으며 112년에 죽어 사릉원(지금의 경주 오릉)에 묻혔다.
**월성 해자
월성 해자垓子는 북쪽 성벽 외곽 주변으로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도랑으로 물을 흘려 보낸 시설이다. 해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땅을 파서 도랑을 만든 수혈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전 시기(4~7세기)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확인됐고,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후 시기(7~9세기)의 유물들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월성 해자는 삼국통일 이전인 4~5세기에 축조돼 935년 신라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이곳은 통일 신라 시대 궁궐터의 하나로, 임해전臨海殿을 비롯한 여러 부속 건물들과 함께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 19년에는 ‘동궁을 지었다’, 경순왕 5년(931)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 등이 있어 월지와 동궁의 축조 연대와 주요 건축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 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된 월지의 모습 대부분이 확인됐고, 동궁 건물터에서 출토된 기와와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에 새겨진 기년명紀年銘을 통해 축조 연대가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 조사 결과 월지의 서편과 남편에서 26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됐는데 배치와 구조로 보아 신라 왕실의 주요 전각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밝혀졌다. 지금은 서편 호수 기슭에 돌 축대가 있는 5곳 가운데 건물터 3곳(1‧3‧5호 건물)은 복원됐고 나머지 건물터는 흙을 덮어 보존한 뒤 그 위에 주춧돌을 얹어 건물터의 배치와 규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비가 이뤄졌다.
연못 바닥에서는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목상·장신구·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 광배, ‘조로 2년調露二年’(680년)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됐다. 번성했던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월지는 연못에 비친 달이 내내 보는 이의 마음을 홀리는 그윽하면서도 황홀한 공간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신라 멸망 이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폐허가 돼 수풀이 무성해진 이곳에 기러기(雁)와 오리(鴨) 떼가 날아들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안압지는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후 발굴 조사 결과 신라 시대에 이곳이 월지로 불렸던 사실이 확인돼 동쪽의 궁궐과 달이 비추는 연못, 곧 ‘동궁과 월지’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안압지로 명칭을 바꿨다는 건 오해다. 안압지는 15세기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이나 19세기 경주 지역의 향토지리지인 <동경잡기> 등에 이미 나오기 시작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안압지라는 이름과 함께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그 조성이 신선사상과 관련돼 있음을 시사한다.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던 임해전은 신라 궁궐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월지는 동궁의 원지苑池(연못의 일종)로서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경주 석빙고
석빙고石氷庫란 겨울에 얼음을 채빙해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하는 돌로 만든 창고를 말한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빙실의 온도를 낮게 해서 얼음을 봄, 여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인 것이다.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은 돌로 만든 석빙고만이 아니라 목재로 만든 목빙고도 있었다. 그러나 목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없고 구전으로만 전해온다.
석빙고는 신라 시대 이후 조선 말기 양빙(동빙고와 서빙고) 제도가 없어질 때(1898년)까지 지속적으로 실생활에 이용한 첨단 과학시설물로서 옛날에 ‘냉음冷陰’이라 불렀다. 보관된 얼음은 각종 제사에 필요한 음식 제조에 사용하거나 벼슬아치, 노인, 환자에게 나눠주었으며 특히 상喪을 당했을 때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24∼57년)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얼음 창고를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물 66호로 지정된 경주 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규모는 남북 길이 18.8m, 홍예紅霓(무지개 모양 천장) 높이 4.97m, 동서 너비 5.94m다. 석실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이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무지개 모양의 천장은 기둥 없는 공간을 가능하게 하므로 얼음을 취급하는 데 편리하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조선 영조 17년에(1741)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세운 석비(1738)에 ‘나무로 된 얼음 창고를 돌로 고쳐 만들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현재의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가 있다.
현재 석빙고가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와 신라 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 시대 축조설,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신라 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주장의 핵심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할 까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신라 시대의 것을 개축해 이어왔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견해는, 월성 남쪽에 남천이 흘러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는다. 또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 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 측후소 안 석빙고 비명碑銘,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유사해 18세기 전반에 축조됐으리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