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2>
'진사'라고 한 것은 학문이 있어 부르는 명칭이 아니었다. 도박에 미친 자들이 밤이나 낮이나 넋이 나간 채 눈이 시뻘게져 봉두난발에 귀신 꼴로 해롱대는 도박장을 개설해 돈을 뜯고 사는 인사였다.
얼이 빠진 도박꾼에게 '방값'이며 '기름값' '밥값' 등을 뚜쟁이나 다름없이 생리로 사는 자를 듣기 좋은 말로 '진사'라했으니 내용을 아는 자는 코웃음 칠 일이지만 이런 곳도 예나 제나 왈자(曰字)들이 거드름 피우며 행세하는 곳이었다.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金良驥)의 <투전도>를 보면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몇 사람이 둘러앉아 투전을 벌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노동에 지친 심신을 가다듬고 기생은 술상을 나른다. 이것이 도박과 매춘의 불가분의 관계다.>
옛기록은 '왈자'와 '협객'이 도박판을 장악했다고 했다. 왈자는 요즘 말로 깡패지만 단순한 깡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돈을 쏟아 붓거나 취향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등(背)이 노출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며 돌봐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은 혹독한 매서움이 있어야만 중간계급의 '진사'들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홍진사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중인(中人)의 집안에 태어나 투전을 수입해 온 인물로 알려진 장현(張炫)과 별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장현이 역관가문으로 유명한 인동(仁同) 장씨였지만 장희빈의 당숙인 관계로 권세를 누린 권도로 투전을 퍼뜨렸다.
상대를 패가망신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차곡차곡 접수한 재물을 윗전에 상납한 그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권세일까? 한시절을 자기 세상인양 배 두드리며 살고 싶은 양아치 같은 욕망이었을까?
홍진사는 어떤가? 그는 홍필해 집안의 사생아로 어미는 기생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 점을 드러내지 않고 양반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쌓으려 혈안이 됐었다.
'사내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있어야 해.'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투전과 같은 도박은 '운'에 맡기는 멍청이가 되는 건 참으로 넋 나간 짓이었다. 투전을 이 나라에 가져와 넋을 빼앗기게 만든 장현이란 역관이나 홍진사같은 왈자 곁엔 무엇보다 중요한 게 '투전 기술자'인 타짜가 있어야 했다. 윤기(尹愭)의 <가금(家禁)>을 살펴보자.
<투전은 으뜸가는 패가망신의 물건이다. 그 해(害)는 주색보다 더하므로 내가 누차 언급한 바 있다. 위로는 부귀한 집안에서부터 아래론 천민에 이르기까지 탐혹(貪惑)하지 않음이 없고 또 묘당(廟堂)에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자와 경연에 출입하는 자도 모두 풍속을 이루어 투전을 하지 않으면 행세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심한 일이다. 습속에 쉽게 물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폐단은 반드시 도적이 되고 난 뒤에야 그칠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홍진사 역시 쉰이 넘도록 도박판을 기웃거리다 보니 요즘에 들어와선 깊은 회한에 잠겨 있었다. 하루 전에 돌려대기로 투전판을 휩쓸던 '새 대가리 삼칠이'가 죽음으로 발견된 건 뜻밖의 일이었다. 삼칠이나 자신이나 투전판에 이름을 내민 건 그 길로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모닥숨을 지탱하려 움켜진 밧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발버둥 친 우여곡절이 세월의 마다마디에 머물러 있었던 그가 간밤에 반홍(礬鴻)이란 기녀를 불러들이더니 반라의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갑작스런 홍진사의 죽음은 너무 의외여서 서과와 함께 마른내골로 달려간 정약용은 일단 검시기록부터 펼쳐들었다.
"주검이 어떤 상태라 보느냐?"
"쉰이 가깝다 들었으니 외상은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겉으로 보기엔 흔적이 없습니다. 얼굴은 평온하고 편안한 자세니 자연사로 보입니다만···."
"자연사?"
"어여쁜 미인이 있고 또 순간적으로 음심을 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는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 집에 온 미인 역시 목숨을 잃었잖습니까."
"사인은 뭐라 보는가?"
서과는 주검을 돌아보았다. 눈이 약간 충혈된 기미는 있으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고 복부가 약간 팽창한 채 대소변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갑자기 크게 놀랐거나 흥분된 상태에서 코와 입이 막힌 게 분명합니다."
서과는 이 사이에 끼어있는 종이 부스러기를 찾아냈다. 그것은 제삼자에게 젖은 종이로 코와 입이 틀어막혀 죽임을 당한 증표였다. 그런 이유로 복부의 팽창을 지적했다.
"복부가 팽창한 이유는 몇 가집니다만 홍진사 주검에 가장 가까운 건 코와 입이 종이로 막혔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단번에 절명하지 않고 시체는 눈을 뜨고 있었겠지요. 이렇게 되면 눈동자는 돌출하고 입과 코 안엔 핏물이 고입니다. 그러므로 얼굴 전체는 피가 맺혀 검붉게 되고 대변과 소변으로 의복이 더럽히지만 홍진사는 금방 숨이 끊겼습니다."
"허면, 타살이다?"
"그렇습니다."
서과는 두 걸음 앞에 숨져있는 여인을 살피며 검험을 내놓았다.
"나으리, 이 사람은 교살입니다."
"흔적이 있느냐?"
"자액으로 위장한 흔적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사용치 않았단 말이냐?"
"끈이나 띠, 새끼줄이나 천을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허나, 범인에게 '조손'이 있을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조손'이란 손톱 등으로 할퀴어 나타난 상흔이다. 목에 난 상흔 외엔 몸의 어느 구석에도 상처가 없었다.
'쉰이 눈앞인 사내와 젊은 미인이 한 자리에서 옷을 반쯤 벗은 상태라···. 어쩌다 시비가 생겨 소란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미인이 상대의 코와 입을 막아 질식시키고 자신도 상대방에 의해 목이 졸려 숨졌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은 가설이었다. 현장을 보존하려고 서리배들에게 금역지역을 설치케 하고 통행을 금지했을 때였다. 소식을 들은 홍진사의 조카 홍언학(洪彦鶴)이 뛰어들었다.
"숙부님이 돌아가시다니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는 가쁜 숨을 다독이며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유라는 걸 늘어놓았다.
"소인이 형부(刑部)의 말단 지위에 있는 탓에 구질구질한 소문을 자주 듣습니다만, 며칠 전 신익희(申翼熙)라는 화원이 도박판을 기울이다 낭패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지가 워낙 딱하다는 생각에 숙부님이 작지 않은 금액을 빌려준 모양입니다만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한 화원은 반홍(礬鴻)이란 기녀에게 그림 한 점을 쥐어준 모양입니다. 자신을 대신해 그림 한 점을 숙부님께 드리라 한 거지요. 모처럼 기루에 갔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만 대수롭게 생각지 않은 탓에 신익희라는 화원과 술잔을 기울였는데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흐음."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숙부님 위명에 손상 가는 것이라 삼가야지만 숙부님이 목숨까지 잃으셨으니 무작정 함구하는 것은 옳지않다는 생각에···."
"편하게 말하시오."
정약용이 얼른 뒤를 받쳤다. 사건 현장에선 잡담 하나라도 사건을 여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레 전의 그날은 봄비가 추적거렸다. 뜨락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홍진사는 조카에게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언학아, 네가 나를 따른 지 몇 해나 됐느냐?"
"이제 고작 두 햅니다."
"내 들으니 투전을 다룬 네 재간이 몹시 빼어나다는 소문이 대비전까지 자자한 모양이다만."
"별 말씀 다 하십니다. 괜한 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너를 만나면 해줄 말이 많았다만 이렇게 네가 왔으니 얘길 하마."
"예에, 숙부님."
"내가 투전짝을 돌리는 기방에 들어온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만, 생각해보면 후회가 막급이다. 사람은 자기가 모시는 이가 누군지에 따라 후손의 복록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잡기(雜技)가 아무리 능해야 그 곁엔 날파리가 모이기 마련이고, 천하에 있어선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권세의 자리에 있다 보면 온갖 쓰레기로 주변을 채우고 천하가 자기 것인 양 날뛰는 속물들이 많지 않더냐."
"숙부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와 생각하니 모든 게 후회스럽다. 힘겹고 가난한 자들에게 장리(長利)를 깔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권세라고 착각해 낄낄거린 지난 일들이 후회스럽구나. 저렇듯 내리는 봄 비에 모든 걸 씻어내고 싶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이란 종족이 모인 곳엔 야차와 같은 벼락맞을 위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뭘하는 지도 모르며 개인과 가문을 결딴내는 몰염치한 떨거지들이다. 홍진사의 어투가 쓸쓸해졌다.
"언학아, 너는 원인손(元仁孫)이라는 이를 아느냐?"
"투전의 고수 말입니까?"
"그렇다. 그는 효종의 딸 경숙옹주의 손녀다.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로 나중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만 그는 투전의 고수인 타짜(打子)였다. 기방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투전목 80장을 한 번 보고 섞은 채 뒤집어 놓고도 그걸 모두 알아낼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대단하다고 소문났지. 나도 한 때는 그의 소문을 사모해 투전판에 기웃거렸다."
"그 분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투전하는 걸 늘 못마땅히 여겼지. 때로는 투전을 할 수 없도록 뒷방에 가두기도 하고. 그러자 아들은 투전꾼을 불러 병풍으로 사방을 가리고 촛불을 켠 채 투전에 골몰했지. 투전 패를 읽어내던 아들의 기량을 몰래 지켜보며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며 귀신의 지혜(此乃生也 神智也)'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나 역시 그에 버금 가는 실력자란 걸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홍진사를 누가 죽였단 말인가?
[주]
∎조손 ; 손톱으로 할퀴어 난 상처
∎원인손 ; 효종 때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