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지금 코로나시대를 지나면서도 한국교회가, 여전히 기세가 꺽기지 않고, 기복신앙이 하나님의 복으로 둔갑해서, 교회가 요구하는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가는 것 자체(예배. 헌금, 봉사 기도, 전도 등)가 복받는 도구가 된다는식의 설교가 버젓이 말해지고, 우상화하는 현실태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예전의 글의 소환해 봅니다.
기복(祈福)신앙이란 한 마디로 정의하면 본인에게 득이 되는 복(福)을 바라는(祈) 신앙행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을 한국교회 상당수가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어, 그 신앙적 행위가 자유롭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복신앙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가 분명 종교적인 신앙적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 입시철이 도래하니, 역시 대부분의 종교기관에서는 이를 위한 특별기도회나 새벽기도회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는 계절이 찾아 온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도 전반적으로 행행(行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형적으로 축복을 가장한 기독교의 기복신앙적인 양태(樣態)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여튼 종교적 기복과 성경적 축복은 많은 차이가 있는 개념이지만, 오늘의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는, 기복이 축복처럼 축복이 기복같이 제대로 구별해서 잘 사용하지 않고, 그냥 두루뭉술하게 기복신앙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대충 전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 나타나는 축복 ‘에셰르’는 저주와 마찬가지로 구약과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의 형태를 취하거나(창49:25) 구원 역사와 연관되어(창17:7-8) 있는 등,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죄 사함을 받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의로우며, 결국 구원에 이르는 것임을 보여주는 영적개념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축복의 개념으로 ‘복된’, ‘행복한’을 의미하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헬라적인 개념으로 신들의 복됨을 가르칩니다. 이후에는 부자들이 일상적인 걱정근심으로부터 해방하는 의미로 세속적인 물질적 가치 등을 위주로 적용했으나, 원래는 ‘지복’(macarism)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금언(禁言)이나 비문(碑文) 등의 전문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시대에 와서는, 미태복음 5장 3-10절에서 축복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팔복’을 통해 세속적인 기복적 축복이 영적인 축복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져서 마카리오스가 선언됩니다. 결국 이 선언은 모든 세상적인 기복적 가치들을 전환시켜, 하나님나라의 지고(至高)의 복이 역설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인간적인 기복적 축복의 가치를 뒤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축복은 가난하고 억눌릴지라도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이 영적인 복임을 선언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천국이 그 땅에서 소유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특별히 이 팔복의 첫 번째 화두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는 산상수훈의 마차를 이끄는 말(馬)과 같은 화두입니다. 팔복 화두의 영적 깨달음 핵심은 ‘마음’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인 물질적 기복의 개념을 마음의 상태에 관한 개념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메타노이아’ 깨달음은 바로 마음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이 ‘마음’의 깨달음에 대한 자기 비움적 케노시스의 화두가 팔복의 골수(骨髓)입니다. 이처럼 팔복의 화두는 여덟 가지 복을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메타노이아-케노시스’의 마음-실천적인 삶의 형태를 방편적 언어로 진술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팔복의 화두가 마음을 떠나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고, 첫 번째 복의 화두가 다른 화두와 짝을 이루면서 상호의존적인 연관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즉, 팔복 화두가 각각의 독립적인 화두 같지만, 첫 번째 화두인 마음의 상태를 이룬 자는 다른 나머지 화두도 이루는 마음상태의 표현입니다. 마치 포도가 포도송이를 이루는 것처럼, 첫 번째 화두의 마음의 상태를 이루지 못한 자는, 다른 나머지의 마음의 상태를 온전하게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 상당수 목사들은, 약장수가 약을 팔 듯, 무당이 긋거리 하듯, 그리고 광대노릇처럼 축복을 팔고 있다는 문제인식을 갖게 되고 그 심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속적축복(돈, 건강 등)을 약장수가 만병통치약을 파는 듯이,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는 기복신앙을 축복으로 가장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복을 앞세워 왜곡된 설교로 팔고 있다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기독교TV방송매체 등을 통해 여기저기서 약장수 같은 국내외 부흥목사들이 약을 팔고 있으나,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방송국들이 스스로 보여주는 그 모르쇠를 목도하게 됩니다.
마무리합니다. 종교적인 기복신앙이 분명히 기독교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또 성경 속에 나타난 기복신앙도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복신앙과 축복, 곧 영적 축복을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로운 영성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바라기는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무당같이, 광대 짓으로 요란스럽게 사람을 불러 모으듯이, 자기를 선전하는 무대로 야단법석을 떠는 교회가 되질 않기를 기대하면서, 기복적 축복이 영성적인 축복으로 변혁되기를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충심(衷心)으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기도해 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