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직업 / 나정례
살다 보니 하늘이 도와서 내 집 앞에 지하철역이 생겼다. 값이 폭등하는 일도 있었다.
내 나이 30대 후반은 부동산 시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공인 중개사 시험을 보려고 책을 여러 권 구입했다. 책을 보고 있는데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때 집을 짓고 보니 가계가 세 칸이었다. 한 칸은 공인 중개 사무실 하면서 공부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혼자는 못 하는 일이니 같이 하자고 했다. 한 칸은 미용실, 나머지 칸은 슈퍼 이렇게 간판을 붙이고, 1인 4역을 했다. 슈퍼는 세 내 주었다. 한 가지만 해도 힘든 직업이다. 미용사를 한 사람 두었다. 자격증이고 뭐고 책을 볼 틈이 없었다. 2남 2녀의 자녀들도 돌봐야 된다, 공무원인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 퇴근해야 집에 들어온다. 집안일이나 잘하고 아이들이나 돌보지 이렇게 복잡하게 사냐고 투덜댄다. 일은 버려 놓고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계는 공인중개사가 모든 관리를 한다. 매일 그 분의 지시를 따랐다.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일곱 명이다. 월급제가 아니다. 계약 건이 커도 수수료 부분을 소홀이하면 책임의 의무만 돌아오고 고생만 한다. 실적과 수익률 위주다. 쉴 틈 없이 활동했다. 부동산 경기가 활발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물건을 찾아다니기만 했다. 아파트 매매하실 분, 구입하실 분 찾는 홍보를 매일한다. 신축 건물 사진도 촬영해서 손님들께 보여준다. 유달 정보에 내놓은 물건을 찾아갔다. 장부다리에서 조금 들어가는 곳이다. 대지 200평, 건평60평, 산속에 있는 집과 근처에 논과 밭 포함해서 이천칠백 평을 계약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1주일 후면 그 곳으로 퇴거를 해야 등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고객들은 서로 넘기라고 아우성이다. 친구한테 배액을 받고 넘기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물릴 줄 뻔히 알면서 그럴 수 없었다. 곱을 더 주고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본전에서 백만 원 포기하고 해약을 했다.
그때는 저 산 꼭대기도 사람들이 계약하자고 달려든다. 자기들끼리 재계약해서 넘기기도 했다. 주로 공무원 퇴직한 사람들이 한두 번해서 재미를 보면 투자를 한다. 나도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 직원들이 여덟 명이다. 여섯 명은 현장으로 돌아다녔다. 너무 바쁘다. 간식을 사려고 슈퍼에 갔다. 그때마다 한 남자가 안주도 없이 소주를 병째로마시고 있었다.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아주머니 저하고 얘기 좀 해요.” 사정을 들어보니 너무 딱했다. 서울에서 서류로 보고 영암 산을 계약했는데, 곧 넘기려 했지만, 막차를 타고 말았다는 것이다. 중도금까지 주었는데, 해약하려고 찾아가도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들어보니 큰시숙님 처갓집 산이다. 사돈댁에 사정해서 손해없이 일을 해결해 주었다.
1년 후 그분이 다시 찾아왔다. “아주머니 저 좀 살려 주세요. 우리 형제 명의로 된 집이 두 채인데 경매 들어와서 곧 넘어가겠어요.” 전에 일을 손해 없이 처리해 주었더니 나를 믿고 목포까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공인 중개사와 의논하고 겁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상봉터미널이 가까운 곳이었다. 집에 가 보니 경매 물건이라 법원에서 보낸 서류가 우체통에 가득 찼다. 법무사를 찾아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영감님과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분은 “동생이 여기저기서 빚을 쓰고 못 갚아서 집 두 채가 넘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사무장은 “합의로 공증한 물건은 아무나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무사는“시골에서 온 젊은 여자의 처지가 딱해서 모른 체할 수도 없고, 도와주겠다.”고 한다.
경매 붙여 놓고 집을 가로채려고 전화도 안 받는다. 사람 찾기가 어려웠다. 집주인은 한 채라도 구해주라고 애원한다. 법무사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영등포에서 채권자를 찾았다. 우선 목포에 우리 집을 은행에 잡히고 오천만원을 보내 주라고 했다. 등기 압류한 사람에게 돈을 갚으려는 것인데. 간판도 없는 2층이었다. 한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의자에 기대어 책상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정중히 인사하고, 돈 빌릴 때 구비 서류를 주라고 했더니 없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에 시골 여자라고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명함 뒤에 영수증을 써 준다. 사기꾼들이 쓰는 수법이다. “일억, 변재조”라고 써 주었다. ‘중’자를 ‘일억’ 뒤에 쓰고 일천만 원 ‘변재조’라고 쓰면 일부만 갚은 것으로 된다. 구천만 원은 남아 있다는 것으로 인정되는 부분이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상대가 속임수를 알았다는 느낌이다. 급히 담배 피운다고 자리를 피했다.
실장이라는 다른 사람이 돈 빌릴 때 차용증을 가지고 왔다. 정상적으로 빚을 정리했다. 왜, 민법을 달달 외우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서울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또 다른 채권자가 압류하기 전에 사무장은 등기소에 들어갔다. 나는 그 사람과 밖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20평집은 그분 명으로 등기했다. 다른 20평집은 내 이름으로 등기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 법무사를 잘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분은 고맙다고 절을 했다.
공인 중개사는 안정된 직업은 아니었다. 그 후 부동산 경기는 하락했다. 3년 동안 열심히 하다 접었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모임하면서 지내고 있다. 하마터면 이익금 때문에 친구를 잃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