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라” / 이훈
지난 27일 경기도 부천시 유한공업고등학교 안에 있는 ‘유일한 기념관’. 인접한 유한대학교의 스포츠재활전공 신입생 20여명이 학교 창립자인 유일한 박사의 유물과 사진, 어록을 둘러보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업의 이윤을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는 건학이념을 들으며 눈을 반짝였다.
기념관 오른편에는 유 박사가 1971년 3월11일 타개하면서 남긴 유언장이 전시돼 있다. “손녀 유일링에게 대학 학자금 1만달러를 준다. 딸 유재라에게 유한공고 안의 내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물려주니,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놀게 하라. 유한양행 주식 14만여주는 전부 유한재단에 기증한다.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라.” 사실상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내용이다.
유 박사는 병세가 악화하자 타개 2년 전 유한양행의 사장직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다. 수석부사장이었던 외아들은 회사와 상의없이 내보냈다. “내가 죽은 뒤 가족들 때문에 회사 안에 파벌이나 알력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이유였다. 유한양행이 국내 첫 소유-경영 분리 기업, 전문경영인체제로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사장 시절에는 종업원들에게 보유주식을 나눠줘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다. 사회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히 실천한 유일한 박사는 지금까지 많은 국민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
자녀들도 부친의 유지를 충실히 따랐다. 아들은 부친이 남긴 손녀 장학금 1만달러 가운데 절반만 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했다. 딸은 1991년 사망하면서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유한양행 사장을 지낸 창업자의 동생 유특한 유유제약 회장도 경영에서 은퇴한 뒤 유유문화재단을 세우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형의 뜻을 따랐다. 창업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과 상관없이 경영권을 승계하고, 이를 위해 불법과 편법도 마다치 않는 재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134632.html
기업은 총수 가족 재산이다. 그러므로 대를 이어 자식에게 물려준다.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주식회사는 교과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깬 사람이 있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것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대체로 그러하니까 그런대로 넘어간다고 쳐도 자식에게 재산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주의로 무장한 우리나라에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그런 데다 자식들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실천했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재벌이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그 2세, 3세가 재산 상속을 놓고 다투고 가족의 연까지 끊는 일을 흔하게 보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다른 일에서 그러하듯이, 좋은 뜻은 잘 이어지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저 기사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바로 유한양행에서 유일한 박사의 유지가 깨뜨려지고 있다고 한다. 몹시 안타깝기는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놀랍게 비치는 우리의 '상식'이 굳건하게 유지되는 현실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한다.
이 지구화 시대에 개인의 착한 마음에 기대 큰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라는 ‘유일한식 경영철학’(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36322.html)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방면에는 문외한이라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신문 기사에서 얻어들은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 또 기업의 합병이나 분할 등 주주의 이익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액 주주가 참여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이번에 새로 국회의원을 뽑았으니 이런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이런 것이야말로 선거 유세 기간 내내 주제가 되었던 ‘민생’의 핵심 사안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