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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지파(11) - 에브라임 지파 / 창 48:17-20
성경에 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레카(berakah) 곧 영어의 Blessing이란 단어가 약 327회 정도 나옵니다. 축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쉬레(헬라어: 마카리오스)가 약 93회 정도 나옵니다. 도합 420회 정도 등장합니다. 축복과 관련성이 있는 단어를 합치면 구약에서만도 약 640회 이상 등장한다는 것이 성경연구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보통 명사형으로는 “사랑”이란 말 다음으로 신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복, 축복”이란 단어입니다. 성경에 믿음장으로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전당에 올라있는 여러 가문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의 가문을 통해서 축복의 가문이 어떻게 대를 이어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문에 대한 히브리서의 평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으면, 아버지가 복의 근원이 되면, 그것이 자녀들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을 동일한 약속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히 11:9절하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비전을 받고 약속을 받았지만, 내 자손들도 동일한 비전과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비전은 곧 내 자식들의 비전이다. 내가 받은 축복과 약속은 동일하게 내 자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이것을 내 자손들에게 나누어야 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복은 계승됩니다. 자손대대로 이어집니다. 복된 가문의 세대 계승 원리가 무엇입니까? 축복하는 일입니다. 히 11:20-21절상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자기가 받은 비전과 복을 가지고 자손들을 축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축복된 가문을 이어갔습니다.
야곱이 12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대로 12지파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뭐든지 예외가 있고 변수가 생기곤 합니다. 레위와 요셉이 이에 해당됩니다. 레위 자손을 레위 지파로 부르긴 합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12지파에는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모세 때 레위 자손들이 특별한 사역을 위한 지파로 부름받게 됩니다. 그들은 성막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분배 받지도 못했고, 어느 한 지역에 모여 살지도 못했습니다. 레위에 대한 야곱의 예언축복기도 내용은 좋지 않았습니다. 창 49: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시므온과 함께 세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한 것에 대해, 저주를 받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주의 내용은, 그들이 야곱 중에서 나눠질 것이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야곱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다른 지파들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만 놓고 저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지파들 속에 살면서, 그들에게 말씀 사역한 걸, 어떻게 저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레위 지파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낸 지파가 된 것입니다.
요셉도 공식적으로는 12지파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그의 두 아들이 12지파에 포함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므낫세 지파와, 오늘 말씀드릴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요셉은 장자가 아닙니다. 출생 서열로 볼 때, 끝에서 두 번째인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아무리 라헬의 아들이라는 이점이 있지만, 그래도 열 계단이나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그가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자에게는 두 몫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두 몫을 받되, 두 아들의 이름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요셉 지파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합쳐서 그렇게 부를 때도 있고, 므낫세나 에브라임을 독자적으로 그렇게 부를 때도 있습니다. 레위와 요셉을 제외하면, 열지파가 되고,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하면 열두 지파가 됩니다. 레아 계열에서 일곱지파가 나왔습니다. 레아가 낳은 다섯 아들과, 여종 실바가 낳은 두 아들입니다. 라헬 계열에서 다섯지파가 나왔습니다. 라헬이 낳은 한 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과, 여종 빌하가 낳은 두 아들입니다. 한 엄마에게서 열두 아들이 나왔어도, 형제간의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는데, 엄마가 무려 네 명이나 되었으니, 애초에 평화와 화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엄마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챙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아빠가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게 안 되었습니다. 같은 아내였지만, 레아와 라헬 중에 라헬을 편애했습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고 오랜 시간이 지나, 라헬이 어렵사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요셉입니다. 야곱의 첫사랑 라헬을 통해 태어난 첫 아들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노년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끼고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벌써 입히는 옷부터 달랐습니다. 창 37:3-4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형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요셉에게 말도 잘 안 걸었지만, 어쩌다 말 한 마디를 해도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형들이 보기에 밉살스러운 행동을 곧잘 했습니다. 눈치도 없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한테 고자질하곤 했습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기름을 부은 것은, 그의 꿈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끼고 도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언젠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가게 되었고, 그날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끔찍한 인신매매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벗겨둔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은 거 같다며,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이고, 애통하는 아버지를 위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시장에서,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다가, 그의 성실함에 반해 가정 총무 자리에 올랐습니다. 행실이 불량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바로의 관원장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 주었는데, 그 해몽대로 한 사람은 복직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복직한 관원장이 자기를 도와 줄 거라고 기대를 걸었지만, 헛된 기대였습니다. 그러다 바로가 꿈을 꾸게 되고, 아무도 해몽하지 못할 때, 술 맡은 관원장이 그때서야 감옥에 있는 요셉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해몽과 함께 대책을 알려줬고, 바로에 의해 총리에 전격적으로 발탁되었습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기원
창 41:46-49절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그때 그의 나이 삼십이었습니다. 벼락출세란 말은 이럴 때 쓸 수 있습니다. 노예 신분의 죄수에서, 하루 아침에 일약 대제국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로가 그렇게 한 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요셉은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총리로서 일처리를 잘하여 바로의 신임을 듬뿍 얻었습니다. 바로는 그런 요셉에게, 당대 최고 가문인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을 아내로 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지켜야 했던 요셉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와 함께 하셔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50절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두 아들의 이름에, 그의 신앙고백을 담아냈음을 볼 수 있습니다. 51절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요셉이 장남을 보니, 지난날의 고단했던 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갑니다. 형들에게 붙들려 웅덩이에 던져진 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간 일, 애굽 노예시장에 진열되었던 일,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일,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감옥에 갇힌 일 등, 이런 숱한 고난들을 하나님께서 잊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집 생각을 해왔습니다. 늙은 아버지도 생각나고, 어린 베냐민도 생각이 납니다. 자기가 아버지 집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를 낳고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 집 생각을 잊게 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잊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면서 잊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기억해서 자기한테 손해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그래서 결국 자기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자기가 자기를 파멸로 모는 것입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 내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셉에게도 고난을 잊는 것이, 아버지 집 생각을 잊는 것이, 시간이 걸렸습니다. 므낫세를 낳고서야, 하나님께서 잊게 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잊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답은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아픈 과거를 잊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용서가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서해야 하는 것은, 그래야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하였습니다. 52절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고백을 담아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과거를 잊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그게 번성이었습니다. 그냥 번성이 아닌 자기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입니다. 자기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된 것이 축복입니다. 자기가 수고하지도 않은 땅에서 번성하게 된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고난 후, 폼만 잡고 거드름 피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창 41:45-46절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구체적인 업무를 수행하고자, 애굽 온 땅을 순찰했습니다. 탁상행정이 아닌, 발로 현장을 누비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고를 더할 생각을 하지 않고, 땅을 바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을, 하나님이 내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2. 에브라임에 대한 야곱의 축복
야곱은 죽기 전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먼저는 아버지 연세가 높으니까 걱정이 되었고, 두 아들을 축복받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요셉을 보고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해줬습니다. 그중에는 요셉의 엄마인 라헬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연세가 높아 눈이 어두웠던 야곱은, 뒤늦게 요셉의 두 아들이 와 있음을 알았고, 그들을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두 아들을 야곱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장자인 므낫세를 야곱이 보기에 오른쪽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왼쪽에 세웠습니다. 요셉은 당연히 야곱이 오른손을 장자에게 올리고, 왼손을 차자에게 올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올리고, 왼손을 장자인 므낫세에게 올렸습니다.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요셉은 순간 당황하여 아버지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창 48:17-18절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요셉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서, 순리대로 오른손을 장자의 머리에 얹어야지, 한사코 팔을 엇바꾸어 가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요셉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아버지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야곱의 반응이 이례적입니다. 19-20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여기서 “허락하지 아니하며”는 강한 거부를 뜻합니다. 요셉의 말을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인정에 끌려서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왜 요셉의 마음을 몰랐겠습니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차자 에브라임을 장자 므낫세보다 앞세웠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때서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모태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창 25:22-23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런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는, 야곱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당신의 섭리를 알려주셨던 거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지만, 그의 뜻을 거절해야 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운명입니다.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도 그렇게 했음을 알려줍니다. 행 4: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건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3. 에브라임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3-17절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모세도 죽음을 앞두고 열두지파를 축복했습니다. 모세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묶어서, 요셉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확실하게 구분 지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삼상 18:7절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사울 왕을 환영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사울이 그 노랫말에 불쾌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만만의 축복을, 므낫세 지파는 천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축복이 모세의 축복으로, 그게 하나님의 섭리라는 게, 다시 확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사울과 달리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과 크게 문제 없이 지냈습니다. 땅을 분배받았을 때도,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야곱과 모세의 축복대로,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번성하긴 했습니다. 인구도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만과 천천처럼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므낫세도 작은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땅 면적은, 되레 에브라임 지파보다 더 컸습니다. 므낫세가 동생의 축복을 시기했더라면,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지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자기 칼에 엎드러졌습니다. 이게 므낫세와 사울 왕의 차이였습니다. 므낫세도 처음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할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나올 때,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그 일을 아버지한테 물어봤을 거고, 아버지가 잘 설명하여 이해를 시켜주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천천의 축복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천천의 축복이 작은 게 아닙니다. 만만의 축복과 비교해서 그렇지, 천천의 축복이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만만의 축복대로 번성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나왔습니다. 갈렙이 속한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동쪽에 유다 지파가 있었다면,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있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도, 유다 지파가 남왕국의 핵심 지파였고, 에브라임이 북왕국의 핵심 지파였습니다.
4. 에브라임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6:1-10절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샘 동쪽, 곧 여리고 곁 요단으로부터 광야로 들어가, 여리고로부터 벧엘 산지로 올라가고,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서쪽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족속의 경계와 아래 벧호론과 게셀에까지 이르고, 그 끝은 바다라.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 에브라임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지역은 이러하니라. 그들의 기업의 경계는 동쪽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호론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나아가 북쪽 믹므다에 이르고, 동쪽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 야노아 동쪽을 지나고, 야노아에서부터 아다롯과 나아라로 내려가, 여리고를 만나서 요단으로 나아가고, 또 답부아에서부터 서쪽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이르나니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 이러하였고,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분한, 모든 성읍과 그 마을들도 있었더라.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
에브라임 지파는 중앙 산악지대의 정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북쪽에는 형 므낫세 지파가 있고, 남쪽에는 친삼촌 베냐민 지파가 있으며, 지리적으로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유명한 곳으로 실로가 있는데, 실로는 369년간 이스라엘의 초대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40여년간 유랑한 후, 땅 없는 설움, 집 없는 괴로움을 끝낸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와 나라를 시작한 곳이 실로였습니다. 실로는 히브리어로 ‘그에게 속한 곳’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속한 곳이라는 이름을 짓고, 감사의 땅에서 살아갈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실로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겹겹이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실로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결할 수 있는 정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실로에 성막과 법궤가 들어서면서 열두지파의 땅 분할이 이뤄졌습니다. 실로에 성막이 있었기에 매년 이스라엘 인파가 밀려 왔습니다. 특히 사무엘이 실로에 거하면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도시가 됩니다. 블레셋의 침공으로 법궤가 강탈당하기 전까지, 실로는 369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첫 수도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라마가 있습니다. 라마는 가난한 산중 도시로, 현대 지도에도 표기가 없습니다. 이 무명의 에브라임의 산지 소읍에 사무엘이 출생함으로, 유명한 도시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 실로가 파괴되자,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와 침공을 대비하며 라마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라마는 히브리어로 ‘높은 곳’이란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산동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은 라마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혔습니다.
다음으로 세겜이 있습니다. 세겜은 히브리어로 ‘어깨’라는 뜻입니다. 어깨처럼 가나안의 초입에 위치했습니다. 세겜은 지리적 영향으로 가나안의 심장부였고, 문화와 종교, 정치의 일번지로 등극되었습니다. 세겜은 풍부한 물의 공급처였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세겜은 매우 개방된 도시였고, 실기가 좋고 쾌적한 기후를 가졌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나온 야곱이 맘에 들어, 정착하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딸 디나가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세겜은 여호수아의 고별사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여호수아는 평생 세겜에 살면서, 가나안을 지키다가 세겜 언약을 세운 후 눈을 감았습니다. 세겜은 예로부터 올리브 주산지였습니다. 오늘날도 집집마다 올리브 기름을 제조하며, 올리브로 만든 비누를 유럽으로 수출합니다.
또한 벧엘이 있습니다. 벧엘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산지의 경계에 위치한 산골입니다. 벧엘에 이르는 곳은, 산세가 완만하고 넓은 바위가 많습니다. 야곱이 이곳을 지나며 노숙할 때, 꿈에서 깬 후 기름을 붓고 맹세했습니다. 야곱에 의해 벧엘은 하나님의 집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남북왕국으로 나라가 쪼개진 후, 안타깝게도 바알 숭배의 거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이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에게 숭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5. 에브라임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에브라임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호박입니다.(화면) 호박은 셋째줄 첫 번째에 위치합니다. 호박이 영어성경에는 리규르(ligure) 또는 재신스(jacinth)로 번역되었습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호박은 보석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나무의 진액이 굳어지면서 생긴 화석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크기로 보석의 가치가 매겨지는데 비해, 호박은 호박 속에 어떤 생물체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고, 두 가지 이상이 들어 있으면 가치가 더 높아집니다. 호박은 경도가 2-2.5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경도가 10이니까, 호박이 얼마나 무른지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석은 경도가 6-7정도 됩니다. 다이아몬드는 경도가 너무 높아서 가공하기가 힘들고, 호박은 경도가 너무 낮아서 가공하기가 힘듭니다. 더 민감하게 다뤄야 하는 게, 의도하지 않게 모양이 변형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듬어 놓으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보석입니다. 황금색이기에 더 아름다운 광채가 납니다. 호박은 가공하기 힘든 특징에서 유래하여, 고난 후에 찾아오는 영광을 의미하는 보석으로 칩니다. 침엽수에서 흘러내린 송진액이, 훗날 보석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 화석이 되고, 보석으로 거듭납니다. 나무의 눈물이, 인고의 시간을 지나면서, 응고가 되어, 황금색 광채를 내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면, 오늘의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삶이 호박처럼 황금색 보석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축복의 권세를 주었노라. 너는 이미 복의 근원이 되었느니라. 축복하라. 네 자손들을 축복하라. 네 교회를 축복하라. 네 이웃들을 축복하라.’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해온 아이는, 건강한 인격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의 축복이 모자라는 아이는, 열등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축복 받고 자란 아이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문제를 헤쳐나갑니다. 부모의 축복은 예언적인 의미, 예언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부모의 축복은 씨가 되어 자라납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의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로 하여금 축복의 통로로, 또 다른 복의 근원이 되어, 그 자손들을 축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가문은 아브라함의 가문, 축복의 가문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 끝에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이 병들어 있어도, 그 손은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늙어 손 끝에 힘이 없다할지라도, 권세가 힘이 없어진 것 아닙니다. 축복의 능력이 사라진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심장, 우리 삶, 우리 손 끝에는, 축복의 권세가 있으므로, 그 권세를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그 동안 열심히 살아 왔지만, 더 큰 영적 세계를 향해 열려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며, 그 뜻을 온전히 이루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연세가 드신 어버이들, 여러분의 손이 병들어 있어도, 그 손은 축복의 권세가 있으며, 늙어 손 끝에 힘이 없다할지라도, 손에는 축복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그 손으로 축복하게 하옵소서. 때로 죄에 오염되어진 손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보혈로 무장하여, 사랑하는 내 자녀들에게 손을 얹을 때, 축복이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