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법화경과 그 영향
2. 천태(Tiantai, Tendai) 사상
일반적으로 천태종(天台宗)은 화엄종처럼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창조적으로 국제화한 예이다.
물론 이 두 종파간에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넓게 보면 이 두 종파는 불교에 대한 접근 방식과 교리면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종파는 매우 융화적인 성격을 띠며 아울러 경전들을 서열화하여 교판 체계를 세웠는데,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을 소의(所依)경전으로 삼는다. 두 종파는 일심(一心)과 보편적 불성,
그리고 우주와 동등한 개념의 법신불을 강조하였다.
두 종파는 (삼천대천세계가 한 생각안에 있다고 천태가 주장하듯이) 상즉상입의 교리와 돈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의 평범한 것 들에도 진리가 존재함을 강조한다. 두 학파 중에서 천태종이 먼저 출현했다.
천태종의 위대한 창시자는 지의(智?, 538-97)이다. 그는 중국의 중관학자 길장(吉藏)과 동시대인이고,
법장보다는 한 세기 앞선 사람이다. 지의가 천태산에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천태가 종파 이름이 되 었다.
지의는 붓다가 이 세상에 온 궁극적인 목적은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법화경』은
내용면에서도 최고의 경전이며 시기적으로도 붓다 최후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법화경』을 붓다 최후의
경전으로 여기는 동아시아 불교도들이 가지는 한 가지 문제점은 동아시아에서 붓다의 열반을 묘사한
『대반열반경』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이 두 경전을 같은 서열로 교판하였다. 붓다 최후의 가르침은 『법화경』이지만,
근기가 낮아서 이 경전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붓다는 자신의 불멸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반열반경』을 설하였다고 한다(Hurvitz 1963: 237 이하). 이에 따라 『법화경』에서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과 『대반열반경』 의 불성이론을 일치시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지의는 『법화경』에 나오는 붓다의 무량한 수명이 진정한 붓다는 영원하며 시공을 초월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천태종은 불멸의 붓다(원인; 『법화경』 후반부 14품의 주제)와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출현한 붓다(결과; 전반부 14품에서 발견되는 것) 사이에 개념의 차이를 두었다.
화엄종과 일본 밀교학파에서는 종종 전자는 비로자나불이고, 후자는 특히 석가모니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지 개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실상 석가모니는 본원불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상즉상입한다.
중국에서 천태종은 수(隋, 581-618)왕조와 결합되어 있던 까닭에 당나라에 와서는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고 대신 화엄종이 득세하였다. 천태종은 거의 사라졌고 그들의 책 대부분은 9세기의 박해로
분실되었다. 그 결과 천태종의 전통과 저서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재도입되었다.
일본에서 천태종은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천태산에서 공부하였던 최징 (最澄, Saich?, 767-822)이
도입하여 하나의 종파가 되었다. 최징이 천태종을 도입하려 할 때 나라시대 이전의 화엄종 같은 불교
종파들 에서는 매우 반대했다. 일본에서 제도권 불교는 때로 수계하지 않았거나 혹은 정식으로 수계하지
않고 방랑하는 산중의 수행자들과 ‘성인’들에 대해 반대하기도 하지만 초기부터 국가 권력과 결합되어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신도들은 사찰에서 행해지는 종교적 의식이 국가의 안녕과 세속적인 이익을 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종교의식과 경전의 신통력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가 교체기에 국가는 외래 종교를 더욱 관대하게
포용하였고, 때로는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찰과 군주들의 밀접한 정치적 관계는 일본역사에서
종종 충돌하 기도했다. 일본이 결국 794년에 나라에서 헤이안-교토(平安, Heian[1]Ky?to, 따라서
헤이안시대라고 함)로 천도한 것이 귀족적인 나라 불교의 막강한 승려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이었다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최징은 천태종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비예산(比叡山, Hiei)에 조그만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사찰은 새 도읍지와 거리상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 지역의 불교 종파들은 수도를 정하는
데 환무(桓武, Kammu, Kanmu) 황제가 최징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최징은 나라지역의 불교가 부패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나라 지역에서 벗어났지만, 일본불교와 정치
사이의 밀접한 관계로 보아 천태종은 아마 나라 지역 불교를 견제하기 위하여 왕실에서 엄청나게
후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엄격하고 청렴한 최징은 그의 사찰이 국가 수호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천태종 승려들은 비예산에서 12년간 치열한 수행기를 보내야 한다. 여기서 닦는 계율의 완성은
불도(佛道)의 생명력이다. 수행을 마치면서 최징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행동과 말, 이 두 가지에 모두 능한 자는 승단의 지도자로서 이 산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이들은 바로
국보이다. 말에는 능하지만 행동에서 부족한 자들은 국가의 스승이 될 것이다. 행동에는 능하나 말이
능하지 못한 자는 국가의 관료가 될 것이다. (de Bary 1972: 286)
관료들 가운데 일부는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며 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였다. 정치 참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을 통해서 종교적 실천을 행하려는 자세는 전통적인 인도의 태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이것이 바로 일본불교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Oda Nobunaga, 織田信長)는 1571년에 자신의 반대파에 참가했던 비예산의 연력사
(延曆寺, Enryakuji)를 불태웠다. 연력사는 약 3,000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찰로 막강한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연력사는 매우 거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0세기 후반 천태종 내부의 분쟁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왕실의 지원을 받은 양원(良源, Ry?gen)선사는 반대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용병을
조직했다고 전해진다. 승병들은 곧 정부에 대항하는데 동원되었으며 11세기에는 종파의 이익을 위하여
교토 거리로 무장 조직을 파견하는 일이 공공연하였다.
이들 무리들은 신성한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바로 반대자를 신성 모독으로 만들어 공격하는 일이었다.
시라카와천황(Shirakawa, 1073- 86)은 언젠가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세 가지를 지적한 적이
있는 데, 바로 강물이 범람하는 것, 도박에서 행운을 잡는 것, 그리고 비예산의 승려들이었다
(Eliot 1935: 246-7; Sansom 1958: 222-3, 270 이 하). 13세기에 연력사의 무장 승병들은 수도를 20회
이상 침공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일본인 대다수는 이러한 현상들이 말법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우울한현상들은 단순히 경제와 정치권력 같은 세속적인 문제이므로
불교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시각으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판단 착오일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세속적 삶이나 물질세계와 종교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 친숙하다.
그러나 이것이 특히 인도 밖의 전통적 대승불교 세계관의 특징은 전혀 아니다. 일련(日蓮)의 교리에서
보겠지만 정법을 위해서라면 - 정법과 자신의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포함하여 살생을
허용하는 내용의 대승 정전이 널리 유포되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재가신자들이 승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장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16세기 초반에 일련 추종자들과 천태지지자들 사이의 논쟁 이후, 천태 추종자들은 흥분하였고 3만의
천태 승병들과 일련종을 지지하는 2만의 군사가 5일간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이때 천태측이 승리하여
21개의 일련종 사찰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때 뛰어난 선승 휴정(休靜)이 이끄는 승병들은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
호국운동은 한국에서 선종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폭력이 동아시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티베트 전통에서 전해진 이야기에 의하면 승려 펠기도제(dPal gyi rdo rje)는 9세기
중반에 랑달마 왕이 행한 불교 박해로부터 정법을 구하기 위해 그 왕을 암살하였다.
17세기 티베트의 제5대 달라이라마(1617-82)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가 속한 게룩파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한 응답에서 베리 지역은 달라이라마의 몽골 연합군이 파괴할 것이고, 그의 반대파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였다. 왜냐하면,
보살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공덕―즉 나와 다른 사람은 같다고 생각 하는 방식―에 의지하는 것은 뒤에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구실에 따라서 행동할지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몇 년 후에 반란에 직면한 티베트의 지도자로서 달라이라마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명령했다.
약탈을 일삼는 적군들은 그대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남자는 나무의 뿌리를 잘라 버리듯이 싹을 잘라
버려라; 여자는 겨울에 말라 버린 시냇물처럼 만들어라; 아이와 손자들은 바위로 계란을 치듯이 하라;
종들과 추종자들은 불타 버린 풀더미같이 만들라; 그들의 영토는 기름이 말라 버린 등불처럼 만들라;
요약하면 그들의 어떤 흔적들도 전멸시켜라, 심지어 이름마저도.
따라서 폭력의 동기 가운데 정치·경제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의 본질이 종교적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한 종파의
번성은 단지 종교적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대승불교에서 살생을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경전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고 역사적 현상으로서 대부분의 불교가 살생을 허락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