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같은 사이
2023년 6월 29일 때 이른 장맛비가 굵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날, 제2 여선교회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여든살이 훌쩍 넘은 회원들이 월례회로 모여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다. 몇 회원들이 비 때문에 불참했지만 참석률이 좋았다. 시골 한식 뷔페 집에서 나눈 애찬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자체가 감사였다. 고급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다. 거동할 수 있고 먹는 대로 소화되는 것이 그저 감사의 조건인 셈이다. 젊었을 때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노년의 시간을 살다보니 그게 진정 큰 은혜였음을 깨닫는다. 정례 모임이니까 당연히 그날의 활동 경비는 모두 회비에서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이런 은혜에 감동한 김석래(金錫來) 원로권사가 본인이 대접하겠다고 하면서 기뻐서 한바탕 춤사위를 펼친다. 한편에서는 '회장님 최고'라는 탄성이 쏟아진다. 모든 식사가 끝나자 이제는 한국인의 전통 차(茶)의 반열에 올려도 될 믹스커피로 그윽한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러자 오늘 이 모임에 초대해 준 고마움에 최숙희 사모가 즉석에서 후식을 준비하여 예쁘게 포장된 엿가락을 하나씩 나눠주며 엿 먹으라고 한다. 식당 판매대에 진열된 하얀 잣엿이다. 치아가 션찮아서 안 먹겠다는 권정순 원로권사에게도 이빨에 달라붙지 않으니 괜찮다고 설득하여서 결국 모두가 엿을 먹게 되었다.
엿은 곡식을 증기로 찐 지에밥(고두밥)을 엿기름으로 삭힌 뒤 자루에 넣어 짜낸 국물을 고아 굳혀서 먹는 한과(漢菓)다. 묽은 엿(飴)과 된 엿(餳)이 있는데 졸인 식혜나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이라 한다. 조금 졸인 것을 조청, 바로 굳힌 것을 갱엿(검은엿), 갱엿을 먹기 좋게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흰엿이 있다. 엿은 설탕이 없이 만드는데도 달달한 맛이 있다. 엿기름에 들어있는 아밀라아제(amylase)가 지에밥의 녹말을 엿당(말토스)으로 가수분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맛이다. ‘밥을 삭히다’는 말이 엿당을 추출해 내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엿이 처음 활용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고려시대에 중국과 교역하면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1481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611년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중 제26권 도문대작(屠門大爵)에는 흰엿과 검은엿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한과는 평민들에게 구경도 못할 비싼 식품이었지만 김홍도의 씨름도(圖)에도 묘사된 것처럼 엿은 길거리에서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민 음식이었다. 6.25 전란 이후 엿장수는 돈 대신 고물을 받아 되파는 고물상을 겸했다. 그 후 ‘OO 엿 바꿔 먹었냐?’는 말이 생겼다. 고물에 비해 바꿔주는 엿의 양이 일정하지 않아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회자되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이 엿이 욕설로 사용되어 듣는 사람의 심정을 불편하게 한다. ‘엿 같네’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못마땅하여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뜻의 비속어다. ‘엿 먹어라’는 상대방을 슬쩍 골려 주거나 속여 넘길 때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입 닥쳐’(shut the mouth)라는 욕설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입 벌리고 죽은 사람의 그 입을 다물게 하려고 엿을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29년 3월 17일 동아일보에 윤백남(尹白南)이 연재한 「신석수호전」(新釋水滸傳)에 ‘이놈들아, 엿이나 먹어라 나를 누군 줄 아느냐 흥나는 장소공(張捎公)이다’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용된 듯하나 그것이 욕설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욕설로 굳히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일명 무즙파동이다. 때는 1964년 12월 7일, 전기중학시험 제18번 엿 만드는 재료를 묻는 문제에 정답이 두 개인 것을 하나만 인정하면서 생긴 해프닝이다. 출제자의 의도는 디아스타이제가 답이었다. 그러나 제시된 보기 문항 중 무즙도 엿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고 교과서에 있었으므로 이것을 택한 학생들이 명문중학교에 낙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낙방자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서 문교부, 교육청에 찾아가 이 엿을 들이대면서 ‘엿 먹어라’고 항의했다. 이후 이 말은 심한 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엿은 끈끈하게 붙는 성질 때문에 좋은 뜻을 가진 음식이다. 특히 대학 입시철에는 귀한 몸이다. 미역은 미끈거리는 특성 때문에 낙방한다고 해서 혐오 식품이지만 엿은 착 달라붙고 떨어지지 않는 특성 때문에 인기 만점이다. 사실 무즙파동으로 좋은 음식의 이미지가 나쁘게 오용되기보다는 그 식품의 특성을 살려서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엿은 떨어질 수 없이 가깝게 하면서도 달콤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신비한 음식이 된 셈이다. 교회는 한 몸 공동체다. 서로 떨어지면 안 되는 사이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 떨어트리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를 떨어트리려고 에덴동산에서 공작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고 스승을 돈 몇 푼에 팔려는 생각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넣었다(요 13:2).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절대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붙어있으라고 교훈하셨다(요 15: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엿 같은 사이가 되어야 한다. 엿을 먹이는 사람, 엿 먹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다. 꼭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 달콤하게 만드는 엿 같은 사이는 참 보기에 좋다. 특히 하나님과 엿 같은 사이가 되면 생기는 게 많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야고보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