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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문학> 제37집에 실린 "제9회 창녕문학 신인상
소설부문 당선작" / 손해수 ㅣ "나의 즐거운 공장 설립 계획서" 를 올립니다.
제9회 창녕문학 신인상 소설부문 당선작 / 손해수
나의 즐거운 공장 설립 계획서
느닷없이, 별안간, 다짜고짜 무릎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자욱하고 끔찍하고 지속적인 형태로, 전율을 일으키는, 잡아당기는, 무겁고 어둡고 희미한 경계,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 있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져 있으며 비통하고 애잔하고 애처로우며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질 듯이 날카로운
그의 이름은 슬픔이다.
슬픔은 기쁨이 넘치는 장소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밝은 표정과 즐겁고 산뜻한 대화, 훈훈한 인정과 유쾌한 웃음 사이에서는 극도로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안내하는 곳은 습습한 동굴 속이거나 사람들의 증오와 분노가 창궐하는 싸움터이다. 그곳에서는 불청객이라고 쫓겨날 일도 없고 따돌림을 당할 이유도 없다. 슬픔이 특히 좋아하는 장소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내력이 복잡한 가족, 실연과 악몽, 폭력과 어두운 기억 속이다. 그곳에서만큼은 휘황찬란하게 주목을 받거나 독보적인 감정으로 등극할 수 있기에 그렇다.
슬픔은 물질에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슬픔은 종종 돈의 쓰임새에서 발생하거나 돈으로 슬픔을 사고 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다면 당신도 슬픔을 상품화하여 돈을 벌 수 있다. 내 슬픔은 60년대산인데 당신이 보기엔 어떻소? 참으로 훌륭하오. 산업태동기에 맞추어 알뜰하게 착취당하며 가족에게 봉사하고 국가에 이바지한 민주화의 초석이 된 슬픔이구려. 또는 이만한 슬픔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었으니 이 슬픔을 부디 후세의 교훈으로 삼아주시오. 그런데 슬픔은 늘 변함없이 슬퍼하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고, 언제나 슬퍼함으로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가학적 취향을 가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슬픔은 나에게 노래를 주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우면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게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하여 자기 몸에서 비명을 짜내어 운율을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그랬다. 가족사에서 암이라는 질병만큼 슬픈 것은 없다. 병인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슬픔을 조달한다. 나는 외롭고 서글픈 현상에 대해서는 이골이 났다. 겨울날 동사무소 앞마당에서 생활보호대상자의 자녀들로 구성된 새카만 아이들이 코 묻은 스웨터를 단정히 하고 버석거리는 갈색 밀가루 포대를 끌어안고 찡그린 얼굴로 단체사진을 찍을 때 정작 그 자루 속에 들었던 것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퍼내고 또 퍼내도 금세 고이는 슬픔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어쨌냐고? 나는 점점 슬픔과 친구가 되었으며 슬픔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고 슬픔을 늘어지게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 슬픔이 나를 조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나는 슬프기만 하면 저절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슬픔은 일기장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나와 같이 잠을 자고 나와 같이 꿈을 꾸었다. 만약 사나흘 그가 보이지 않으면 섭섭할 지경이었다. 슬픔은 놀라운 질투심을 자랑한다. 처음엔 가족 간의 결속을 방해하더니 사랑을 갈라놓았고 나중에는 친구 사이의 가벼운 농담까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다. 말하자면 슬픔은 나의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감시할 뿐만 아니라 무시로 내 삶에 들이닥쳐서 뻔뻔하게 진을 치는 해충이었다.
성년이 된 후의 슬픔은 종종 기억할 수 없는 아득한 곳에서 왔다. 굳세게 무슨 일인가를 준비하면서도 이내 포기하고 마는 비겁함을 논하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슬픔은 색이 없는 흐릿한 상태로 변해갔다. 그 모호한 슬픔에 쬐일 때는 불행이 극렬하게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기습적으로 출동하여 비탄의 음주가무를 즐겼고 배신과 광분, 모멸감 속에서 키운 고비마다 가혹한 검열관으로 등장했다. 감수성이 폭발하던 해에 충동적으로 행해진 자살사건은 애교로 넘어갔다. 걸핏하면 불우한 처지를 원망하고 주체적 노력이 결여된 자아를 드러내며 폭음하는 것도 귀엽게 봐주었다. 힘차게 불렀던 미래와 무참히 짓밟힌 희망의 속삭임들, 나에게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쳐온 사람들의 비리와 허상이 밝혀지던 순간,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낡고 작은 자취방, 유행가 가사 같은 이별을 하고 돌아서던 그 순간에도 가장 먼저 내 어깨를 안아준 것은 슬픔이었다. 그의 대담한 흡인력에 빨려 들어가 밤새도록 술과 레드 제플린과 교감하며 환상적인 미래를 초청했다. 슬픔이 과대망상과 친한 줄은 그때 알았다.
슬픔은 점점 과격해졌다. 나를 독차지하려는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선의와 이타적인 마음, 환호와 갈채를 끔찍하게 여겼다. 슬픔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갖 기교와 만용을 부렸다. 훼방꾼, 아교, 악덕기업주와 같은 슬픔으로 인해 내 삶은 내내 비리고 비참했다. 나는 번번이 애인으로부터 답신을 받지 못했고 불안하고 흔들리는 하루를 간신히 견뎠고 밤마다 악몽의 연서를 받았다. 슬픔의 철저한 감시망에서 단 하루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슬픔은 생명의 늪가에서 너무 일찍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그의 부정한 정신과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한 세계관에 포섭되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다시 잠들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무섭고 두려웠다. 슬픔에도 마일리지가 있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이 적립한 사람이 나일 것이다. 슬픔은 시대를 초월하여 다시 재탄생되거나 새롭게 포맷된다. 어떤 슬픔이라도 한 사람의 삶에 착상하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놀라운 생명력으로 그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놀라운 도구가 손안에서 황금빛 기교를 부리는 이 시대에도 슬픔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어떻게 순조로운 생을 살 수 있겠는가? 그와 동행하는 한 어떻게 내 몸이 내 것일 수 있겠는가?
오래 전, 슬픔 퇴치를 위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적이 있다. 나는 생각을 멈추는 알약을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시키는 행복만들기모임에 나올 것을 권했다. 나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행복을 억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왜 행복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이 있기에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어쩌자고 모두가 행복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 따위 생각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날마다 혼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세상사 어두운 일들만 쫓아 다녔다. 그때 이미 나는 슬픔에 중독되어 있었다. 슬픔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행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슬픔에 노출된 사람,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은 왠지 가까운 혈연처럼 여겨졌고, 그와 대번에 친해질 것 같았고, 그의 전생과 후생을 훤히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런 예감조차 슬픔의 비상한 기운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슬픔이 총애하는 애제자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즐거운 공장. 이것이 내가 세우고자하는 공장의 이름이다.
나는 감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울게 하였으며 지금도 울게 하는 감정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지상에서 슬픔만 사라진다면 그래도 삶은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생겼다.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추출하여 고체화하거나 액체화하여 제품으로 생산할 색다른 공장을 설립하고자 한다.
인간 복제에 버금가는 비인간적인 사기행위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돈벌이 수단으로 슬픔을 택하지는 않았다. 19세기의 기술복제를 계승하여 별의별 복제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이즈음에 슬픔까지 복제하여 이 암담한 시대의 주역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먼저 남다른 도전정신과 뛰어난 분석력, 새로움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창의적인 사원을 뽑을 것이다. 어떠한 곤궁에도 타협하지 않는 굳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다. 학력과 배경, 혈연 따위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서 내부의 비밀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다. 기쁨이나 슬픔 같은 무형의 감정을 다루는 공장은 자칫 엉뚱한 모방과 이상한 일에 연루될 수 있으며 위협적인 무기로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장의 총 책임자격인 공장장은 찰리 채플린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를 무덤에서 살아 나오게 할 수는 없으니 이승에 있는 사람 중에서 고를 것이다. 아마도 웃음을 주는 직업군에서 뽑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이것을 슬픔제로파일이라고 명명하겠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수치화할 수는 없겠지만 기계적이든 은유적이든 슬픔이란 슬픔은 모두 사라지게 하리라. 사람들은 나를 실성했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명망이 높은 양반들에게 자문을 받으러 가서는 퇴짜를 맞거나 잘못하면 따귀를 맞을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퇴치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마치 나치의 만행을 떠올리게 해서 인종차별주의자로 오인 받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피부에 바르기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약, 먹기만 하면 곧바로 즐거울 수 있는 약을 개발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인가?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나는 특별한 제품 개발 연구에 매진을 한다. 나는 어느새 시대의 이단아가 되어 있다.
나는 상상한다. 만약 슬픔이 땀이나 눈물처럼 몸 밖으로 배출될 수는 없을까? 일반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것을 약간의 변형을 가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기술의 발전이다. 나의 목표는 체내에 기생하는 슬픔 성분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 그러나 슬픔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꼭 배출만 있겠는가. 슬픔을 먹기 좋게 만들어 도리어 체내에 소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수확기에 거두는 곡식처럼 생의 일정한 시기에 슬픔을 타작할 수 있다면 허무주의와 자살 충동, 화병과 스트레스, 억울해서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영혼과 난데없는 귀신의 등장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우선 슬픔을 소비하기 좋게 과립과 액상으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 삶에서 추출한 슬픔을 고체화한 다음 가루로 만들겠다. 슬픔을 간단히 섭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슬픔 가루를 반죽하여 수제비를 만들어먹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수제비의 이름은 당연히 슬픔수제비가 될 것이다. 가루가 남으면 저장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즐거운 생을 만들기 위하여 열심히 슬픔을 먹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슬픔은 이내 소화하여 몸 밖으로 배설될 것이고 침울한 정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뿐하게 맑아질 것이다. 또한 슬픔에서 추출한 가루는 일종의 식량이 되어 먹을 것이 없는 나라의 소박한 원조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슬픔을 추출하여 한 사람을 기쁘게 하니 좋고, 추출한 슬픔으로 또 다른 생명을 구하게 되니 진정 아름다운 공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말 기가 막히는 것은 자신의 배고픈 슬픔을 거두어 들여 식량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완벽한 순환과 재활용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신을 덜 미워하거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슬픔추출기는 세계인의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으뜸가는 발명품! 식품영양학계의 놀라운 이변! 굶주린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기여하였으므로 노벨평화상감!
슬픔액과 슬픔가루는 커피와 홍차처럼 세계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될 것이다.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슬픔을 주재료로 하는 다양한 요리들이 선보이고 학계의 권위자는 슬픔이 우리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설파할 것이다. 슬픔액과 슬픔가루를 먹기가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가공처리제품이 개발된다. 슬픔이 지닌 뭉클하고 짜릿하고 몽롱한 결정체는 살균 처리되어 용기에 담겨져서 각 슈퍼나 백화점에 진열될 것이다.
슬픔 재료를 응용한 요리들은 수도 없이 많이 개발된다. 슬픔탕, 슬픔튀김, 슬픔국수, 슬픔보쌈, 슬픔전골, 슬픔햄, 슬픔갈비, 슬픔음료, 슬픔아이스크림, 슬픔만두, 슬픔양념, 슬픔빵, 슬픔캔, 슬픔주스…… 슬픔껌은 만국인의 애용품이 된다.
슬픔 광고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톡톡 씹히는 이 슬픔의 감칠 맛! 살아있는 슬픔주스! 정통 슬픔탕 전문점!!
추출된 슬픔으로 조리된 음식은 가능하면 빨리 섭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소화흡수가 잘 되고 맑고 경쾌한 정신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조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요리의 빛깔도 달라질 것이다. 요리는 마음의 거울, 슬픔국을 끊였을 때 거무칙칙한 색이 나온다면 그는 거무칙칙한 마음을 한 숟갈 떠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무슨 색이든 그 슬픔은 곧바로 체내 밖으로 배출되어 사라지게 될 테니까. 잠깐! 슬픔은 절대로 날것으로 먹지 않아야 한다. 자칫 멸균되지 않은 슬픔 중 일부분이 삶에 깊숙이 관여하거나 치명적인 흠집을 낼 수도 있으므로 꼭 부작용에 대한 경고문을 알려야만 한다. 그것만 주의하면 슬픔에 시달릴 일은 없다.
소비자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마침내 슬픔 농축액이 개발된다. 이 농축액은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고민과 가출, 폭력, 탈선의 유혹을 떨치는 탁월한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구불만을 누그러지게 할 뿐만 아니라 학습욕구를 향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슬픔의 자식들인 불안, 초조, 긴장, 외로움, 공포와 두려움 등은 보다 강력한 슬픔으로만 다스릴 수 있다. 수십 배, 수백 배로 농축된 슬픔이 작고 가벼운 슬픔들을 물리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약효가 증명되면 많은 학부모들의 주문이 쇄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약 슬픔을 물리치는 슬픔약을 개발한다면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제공하겠다. 감옥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전쟁터에서 군대에서 병원에서 공원에서 골목에서 집안에서 친구에게 깡패에게 이웃에게 암살단에게 몰래 참혹하게 공공연하게 잔인하게 과격하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직적으로 어이없이 기아와 질병 가난과 과로로부터 목숨을 앗긴 모든 이에게. 특히, 나는 전태일이란 슬픔별미를 만들 생각이다. 그 이유는 공장 설립을 앞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슬픔이 생산되었던 곳이 공장이며 그의 노력으로 공장의 슬픔이 폭로, 승화되었고 그때 공장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년이 된 후에도 여전히 슬픔독에 빠져 있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식들만은 절대로 공장에 내보내지 않기 위하여 줄기차게 아이들을 채근하고 채근하는 만큼 슬픔을 양육하므로 슬픔은 거의 대물림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은 머지않아 인류를 괴롭혀온 그 몹쓸 행악을 드러낸 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의 묘비명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한때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의 필수애용품으로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기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 제품은 워낙 고가여서 가난한 아이들은 학습 향상은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향상이란 이전보다 조금씩 나아지거나 월등히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줄곧 생각해왔다. 눈에 보이지 않고 수치를 측정하기도 힘든 정신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왜 절망을 땅속에 묻거나 권태를 무화시킬 수 없을 것이며 희망을 살찌우고 기쁨을 배가하지 못할 것인가? 말하자면 희로애락을 선택적으로 조절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감정을 마음껏 이용하는 것인데 여보시오들, 나의 상상이 황당무계하다고 욕하지 마시라, 인류사에서 문명의 발전은 때로는 황당함, 미친 짓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장차 무형의 감정을 유형의 기구 속에 담아 용해하고 변환시키는 이른바 복합감정제조기를 만들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라도 축소하거나 배가, 촉진하는 형태로 개발될 것인데 인류 평화와 우수한 종족보존에 큰 보탬이 되리라 확신한다. 제약회사와 제휴해서 간편한 투약이나 언제 어디서나 지참할 수 있는 상비약으로도 생산할 것이다. 그렇다면 금문교나 한강 다리를 서성이는 우울증 환자들을 즉시 삶의 예찬자로 변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시골 버스정류장이나 역 대합실 한구석에서 치마를 훌렁훌렁 치켜 올리고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구걸을 하는 미치광이 여자들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겠다.
0000년 모월 모시. 나는 드디어 발명에 성공한다.
사용법은 아래와 같다.
슬픔추출기 사용법
① 먼저 편한 자세로 앉은 다음 눈을 감는다. ② 마음을 가다듬고 짧게라도 명상이나 기도를 하면 효과가 더 좋다. 천천히 기구의 손잡이를 잡고 이마에 1분간 갖다 대시오. ③ 기구가 과열될 수도 있으니(화병이나 신경발작으로 전이한 딴딴한 슬픔의 경우) 꼭 장갑을 낀다.
[효능 효과] 악에 받친 감정, 분노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의 즐거운 기억 회복에 탁월함.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축적되어온 모든 슬픔이 청소기에 흡입되는 먼지처럼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 몇 시간 후면 이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밝고 행복한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 주의
설명서대로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회수를 바꾸거나 함부로 조작을 시도한다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 있음.
나는 제품의 실효성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거리로 나간다. 슬픔추출기는 카메라와 청진기를 복합한 모형에 초소형이므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며 목걸이처럼 걸고 다녀도 무방하다.
나는 어둑한 한길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울고 있다.
“당신은 무슨 일로 슬퍼하십니까?”
그녀는 방금 자신이 빠져나온 어둑한 길 끝을 가리키며 말한다.
“왜 사랑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짐승처럼 사나운가요?”
나는 그녀의 이마를 짚게 해달라고 말한다.
“왜요? 당신이 왜 내 이마를 원하는가요? 대체 이유가 뭔가요?”
나는 약간 짜증이 나지만 재차 말한다.
“그런 질문 따윈 필요 없어. 당신의 짐승 같은 사랑에 종지부를 찍게 해주겠소.”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도리질을 한다.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요. 여기서 울게 내버려둬요.”
나는 여자를 설득해야만 처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기역에게 준 사랑은 니은을 통해서 천천히 돌아올 것입니다. 니은이 아니라면 디귿을 통해서도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사랑은 기역에서 히읗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답니다.”
“아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오열하는 그녀의 이마에 슬픔추출기를 갖다 댄다. 검게 퇴색한 슬픔이 점점이 화면에 떠오르다가 깜박이는 붉은 숫자로써 표기된다. 나는 실연한 여자의 슬픔을 최대한 빨리, 남김없이 흡입한다. 사랑했지만 사랑받지 못한 그녀의 슬픔은 하도 오래되어서 묵직하게 덩어리가 져 있다. 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아 개운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야. 그가 떠났으니 이제 내 생활도 윤택해지겠지? 마침내 나는 자유로워진 거야!”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슬픔을 털어버린 여자의 걸음걸이는 정말 경쾌하고 씩씩하였다!
이로써 경미한 슬픔 정도는 아주 쉽게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언제나 즐거운 공장은 활기차게 돌아간다. 불편한 점이라면 하도 많은 슬픔이 공장을 찾아와서 방문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슬픈 원인과 그 내용이 다르듯 슬픔의 무게도 일 그램에서부터 수백 킬로그램까지 다양하고 색도 천차만별이어서 분류하기가 까다롭다. 나는 양질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외롭고 슬픈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 거기다 물질적으로 윤택하지만 역시 외롭고 심신이 얄궂은 사람의 것도 골고루 섞는다. 그래야만 더욱 반갑고 신선한 맛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가끔 슬픔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불량 기쁨이 발생할 때도 있지만 나는 슬픔이 슬픔을 소외하여 더 기막힌 슬픔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남녀노소, 학연, 지연, 정치색에 흔들리지 않고 슬픔 불순물을 걸러내고 깨끗한 슬픔 만들기에만 매진할 것이다.
나는 어쩌면 세계만방에 떠돌아다니는 슬픔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련한 슬픔, 딱딱한 슬픔, 물렁한 슬픔, 가난한 슬픔, 들큼한 슬픔, 뻑뻑한 슬픔, 뚱뚱한 슬픔 등등. 나는 그 슬픔들 중 몇 개는 표본으로 삼아서 유물전시관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20세기의 슬픔은 이러 이러한 종류와 색상과 형태를 지니고 있었느니라. 후손들은 슬픔에 대한 연구서적을 발표하고 슬픔이 유래된 시기와 그 의미를 분석하려고 밤샘토론을 벌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의사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다. 그들은 나의 공장에 대해 인간존엄성의 파괴, 신의 모독이라는 이유로 맹공격을 펼칠 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세계 각국의 파란만장한 슬픔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잘 섞어서 만든 제품을, 특별한 혈족애와 특별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차제에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양하고 반가움을 배가시키는 제품 개발에 착수할 지도 모른다.
기쁨촉진제의 사용법
① 알약은 삼켜도 좋고 젤리처럼 씹어 먹어도 된다. ② 가루약은 미지근한 물에 타서 마신다. 꿀물에 타서 마시면 더 좋다. ③ 캡슐은 어른만 사용한다.
[효능 효과] 이 알약이나 가루약은 입 안에 털어 넣기만 하면 즐거워진다. 한껏 슬픔에 취한 사람이나 막 슬픔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권함. 괴롭고 슬프고 비참하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죽고 싶은 사람의 필수품!
[참고] 약 먹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기쁨연고를 바르거나 기쁨주사를 맞는 방법도 있음.
나는 밤거리를 배회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얼마 전에 실직을 했고 가화만사성은 달나라 꿈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신세 한탄을 한다.
“실업자가 되고나서 몇 달 동안은 참 열심히 직장을 구하러 다녔슴다. 그런데 말임다. 어디 사람 쓰는 데가 있어야 말임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곳이 없단 말임다!”
남자의 낡은 점퍼 주머니 속에 비스듬히 꽂힌 것은 반쯤 구겨진 봉투이다. 그 안에는 그의 생을 몇 줄로 요약한 이력서가 들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슬픔의 덩어리, 이력서는 한 사람의 슬픔인증서와 같다. 나는 얼른 그의 술잔에 기쁨가루약을 집어넣는다. 약효는 금방 나타난다.
“술은 말임다. 못난 사람이건 잘난 사람이건 똑같이 기분을 헤아려주는 데에 있슴다. 술만큼 평등한 친구는 없다, 이 말임다. 안 그럿슴까 선생?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만.”
그는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가족사진을 쓱 꺼낸다.
“요놈들이 내 밥줄임다. 요놈들이 내 목심을 쥐었다 놓았다함다. 그래서 요놈들이 버겁슴다만, 요놈들이 있어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그저 살붙이 있는 것이 고맙슴다. 그래서 말임다, 끝까지 살기로 했슴다. 하루 골백번 콱 죽어뿌자고 생각타가도 요놈들 생각에 참슴다!”
사진 속에는 아내와 두 아이가 활짝 웃고 있다. 순간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슬픔을 잠깐 내려놓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슬픔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은가?
남자는 비틀거리며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 남자의 고단한 하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나 저 남자는 슬픔이 있다고 해도 기쁨이 더 많은 사람이다. 저런 사람들에게 슬픔추출기가 과연 필요할까? 갑자기 이런 딜레마에 빠질 줄 몰랐다. 나는 슬픔이라면 무조건 박멸해야 하는 해충처럼 여겨왔는데 이런 난제가 생길 줄이야.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즐거운 공장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제2의 인생을 가능케 하는 신묘한 제품! 한 일간지에는 인류 행복의 암적 존재인 슬픔을 소멸할 감동적인 발명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광고 문안은 낯 뜨거울 정도로 현란하다. 신이 놀랄 만한 무서운 사건! 인류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운명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제품 설명회를 열어 달라, 선주문을 하겠다는 전화가 빗발치고 나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로 공장 앞은 연일 장사진을 이룬다.
세계 곳곳에서 기쁨촉진에 관한 각종 세미나가 열린다. 산부인과에서는 더 이상 출산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기는 방긋 웃으며 태어날 것이다. 며느리들은 화 잘 내는 시어머니에게 우황청심환보다는 기쁨알약을 권할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대신 기쁨을 얼마나 많이 느끼는가를 재보는 기쁨자랑대회가 열릴 것이다. 가끔 헤로인이나 대마초, 환각제와 같은 사이비 기쁨약이 활개를 치겠지만 제품의 현격한 질적 차이로 인해 고객의 입장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마약은 사람의 영혼까지 피폐하게 만들지만 언제나 즐거운 공장의 제품은 후유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독성이 없으므로 안심할 수 있으며 악순환에 빠지기 쉬운 향정신성의약품에 비해 깔끔하게 슬픔을 제거한다는 이점이 있다.
인류는 언제나 보다 빠르고 간편한 생활방식을 선호해왔다. 초고속, 초소형, 초일류를 향한 집념이 기술문명을 발달시킨 예는 무수히 많지만 슬픔추출기나 기쁨발생약 만큼 놀랍도록 진화적인 발명품은 드물 것이다. 단지 흠이라면 비싸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또 한 번 심각하게 고민했다. 슬픔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가난한 슬픔을 소외시키는 일은 나의 공장 운영방침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내 삶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슬픔이기도 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보급용 슬픔추출기이다. 이제 언제라도 책 한 권 살 돈만 있다면 너끈히 슬픔추출기를 살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가끔 어둠의 경로를 이용한다. 기쁨 밀거래가 형성되고 뒷골목 으슥한 곳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 그 기쁨 가짜 아니오? 이보시오, 내 아무리 살기 팍팍해도 기쁨 갖고 장난치지는 않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요새 가짜 기쁨이 나돈다는 소문이 있소. 가짜 기쁨은 오히려 슬픔과 불행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는 말이 있습디다. 거 참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기쁨에 중독된 일부 사람들은 기쁨인식장애나 기쁨불감증이 생겼다고도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나는 온갖 기쁨을 생산하느라 고생한 나의 즐거운 공장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특별보너스를 두둑하게 준비한다.
바야흐로 개막된 기쁨 독주시대에는 더욱 많은 절제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즐겁고 유쾌한 일에 싫증을 내고, 너무 웃은 나머지 입이 커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작은 입술이 세계적으로 유행할 것이다. 입술이 작은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슬픔이 적어서 입술이 커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희한한 이점을 가질 것이다. 입술이 크고 두툼한 여자가 섹시하다는 말도 사라진다. 성형외과의 벽에는 서구적인 미인보다는 김홍도의 미인도가 내걸릴 것이다. 기뻐서 못 살겠다! 너무 기뻐! 이렇게 기뻐서야 원! 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터진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체행동을 좋아하는 어떤 집단에서는 세상이 점점 밝아지는 현상을 참지 못하고 공장 폐쇄를 요구하거나 불행을 증가시키는 약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객은 주로 슬픔에 잠겨 있거나 곧 슬퍼질 사람, 슬픔을 평생 몸의 일부처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부 보수적인 어른들은 사방에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경박하다 하여 기쁨을 회피하는 조직을 만들지도 모른다. 기쁨에 식상하여 따분할 때는 '근엄하고 경건한 기쁨 가꾸기' 강연에 나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즐겁고 기쁜 환경을 박차고 나갈 용기 있는 사람이 그때까지도 살아있을 지 궁금하다.
자신의 존재가 특별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은 나의 언제나 즐거운 공장 운영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단 하나. 기쁨을 평등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량생산을 중지하라! 기쁨의 질을 높여라! 그들은 타인과 똑같은 기쁨을 누리고 사는 일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만의 기쁨, 개성적인 기쁨을 주문하겠다는 등 요구사항이 많아질 텐데 나는 그렇게 이기적인 품목을 요구한다면 과감히 생산중단을 검토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을 계급적으로 다룬다면 필시 무시무시한 감정이 새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흑가, 상류층만 나의 즐거운 공장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욕에 눈 먼 인간도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감정제조를 하는 기계라면 얼마든지 투표자들의 심리를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날마다 협박전화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공장을 폭파하겠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 등등. 항용 영화에서 그렇게 전개되듯 나는 비법을 손에 넣으려는 자들과 사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나의 연인은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만약 나의 연인이 사력을 다해 공장을 지켜낸다면 그를 껴안고 통곡할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비법을 빼앗긴다면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치유하기 힘든 슬픔을 안고 죽을 때까지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비법을 손에 넣은 정치가는 사람의 판단력을 흐릿하게 조정하는 약을 개발하여 최고의 권력자로 둔갑할 것이다. 훗날 그의 자서전에는 국민을 속이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는 고백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이 점점 줄어들다보니 오히려 슬픔을 찾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때는 어둡고 불행한 과거였으나 기쁨이 흔전만전한 시대에는 새로운 소재로 인기를 끌게 된다. 가상의 슬픔을 맛보는 체험도 유행 아이템이다. 새로 만들어지는 가짜 슬픔은 역사적인 불행을 다루는 사극이나 지금은 아득해진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이야기에 사용될 것이다. 나는 세상이 충분히 즐거워졌다고 생각되므로 공장을 매각할 것이다. 나는 꽤 많은 돈을 벌었고 앞으로 기뻐할 일만 남은 셈이다. 결국 슬픔이건 뭐건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비난을 받겠지만 기꺼이 감수하겠다. 걱정할 것은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슬픔이 뭐야? 그런 게 있었어? 나는 그 옛날의 슬픔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것이다. 슬픔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던가. 슬픔에 짓눌려서 숨조차 쉬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기쁨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나는 게으르게 책을 읽거나 고상한 취미를 가질 수 있으며 몇 달 씩 돌아오지 않는 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나는 행복한 전업독자가 된다.
혹간 저항적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기쁨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의문을 표하며 전제주의의 도래를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쁨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데다 이미 슬픔면역균이 생성되었으므로 어떠한 슬픔도 세를 불리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기쁨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게 되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하지만 똑똑한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흑백의 감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한 감정이 소멸했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 설령 슬픔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자리를 메울 감정은 얼마든지 있다. 고독, 절망과 우울, 허무, 파국, 혼란 등. 농약 과다 살포가 이 땅의 황폐함을 가져오듯 기쁨 과다사용 또한 마음의 부작용이 없겠는가고 묻고 있는 당신은 선악의 몽둥이찜질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사람이다. 나도 묻고 싶었다. 천편일률적인 행복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지만 이제 슬픔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세계의 슬픔은 소멸되었다. 이 세기가 가기 전에 슬픔이란 단어는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국어사전에서도 지워진다. 차후에 세상이 바뀌어 슬픔제로파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위법이나 국민사기극으로 판명되어 엄중한 처벌을 받을지라도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결코 슬퍼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꿈을 꾸었을 뿐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언제나 즐거운 공장을.
이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 당신은 이 모든 일들이 허구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그리하여 나의 즐거운 공장 설립 계획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슬픔이란, 아무리 마음 안에 발을 못 붙이게 애를 써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세상과 더불어 살게 하는 지독한 삶의 조련사이자 불멸의 소재.
‘언제나 즐거운 공장’은 세워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신인상 시상식
* 당선소감
단편소설부문 당선자 / 손해수
고맙습니다.
게으른 데다 무던함이 없어 오래 가지 못하는 형편을 내보이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동력이 될 듯해서 기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손해수 1964년 창녕군 고암면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제9회 <창녕문학>신인상에 단편소설이 당선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녕문인협회 회원이다.
첫댓글 책으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상큼합니다.
고맙습니다.
잘익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