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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가고 싶은 나라
김 광 욱
1
팔월 한 달 간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올해는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구월 들어서도 비는 찔끔찔끔 그치지 않고 내려서 프로야구 경기하는 데 지장이 많았다. 경기는 웬만큼 비가 내려도 연기하지 않고 속개되었다. 포스트시즌(한국 시리즈)을 앞두고, 그 동안 비 때문에 밀린 경기를 한꺼번에 치르느라 선수들도 감독도 지쳐 있었다.
빗속에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선수들이 부상을 입고 경기에 결장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채진수도 다리에 부상을 입고 한 달 간 경기장에 나가지 못했다. 팬들은 어서 채진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의 부상은 생각보다 깊었다. 부상이 낫는다고 해도 경기 감각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리고 슬럼프에 빠질지 모르며, 어쩌면 그 부진은 한국 시리즈까지 이어질지 모른다고 모두들 걱정했다.
누구보다도 걱정이 많은 사람은 감독이었다. 주전 멤버들이 줄부상을 입고 2위를 지키기도 어려웠는데, 국가 대표이고 부동의 에이스인 4번 타자 채진수의 부상은 팀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채진수뿐만이 아니고 3번 타자와 5번 타자가 모두 부상으로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클린업트리오가 빠진 팀의 공백을 대체 선수, 하위타자들의 분전과 투수력으로 메꿔 갔다. 페넌트레이스(정규 시즌)에서 2위를 하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결승전까지 올라간 것도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시리즈에 올라간다고 해도 클린업트리오가 빠진 상태에서 우승이란 또 하나의 태산, 페넌트레이스 2위보다 더 큰 기적을 바라는 일이었다. 주전 멤버가 빠진 상태에서도 결승전에 오른 선수들의 노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10월은 찾아오고 한국 시리즈는 개막되었다. 1승 3패로 초반에 밀리다가 2승을 따라붙어 간신히 3승 3패의 동률을 이루었다. 벼랑 끝에서 탈출하여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투수가 잘 던져 주기만을 기도했다.
우리 편이 이겨 주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한둘이랴먄, 누구보다도 야구를 사랑하는 한 사람, 채진수의 열열한 팬의 한 사람인 도희영의 소망은 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채진수의 홈런 볼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팬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야구장을 자주 찾아가서 주운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야구장 밖에서 가만히 앉아서 벌어들인 수확이었다. 아마 돈으로 치자만 수십, 수백억원이 될 것이다.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유명 선수의 홈런 볼을 받아냈는가? 그녀의 가게가 야구장 뒤편 담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장외 홈런으로 날아온 볼이 저절로 그녀 손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채진수가 친 장외 홈런 볼은 도희영의 가게 쪽으로 많이 날아왔다. 편서풍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지만 채진수의 타격 방향이 우측으로 많이 치우쳐 있기 빼문이었다. 좌타자가 당겨 친 볼은 1루쪽, 즉 그라운드의 오른쪽으로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채진수는 좌타자이고 당겨치기에 강한 선수였다. 그의 방망이에 정통으로 맞게 되면 큰 장외 홈런이 나왔다. 벤치의 관중들 머리너머로, 야구장 외벽 담벽을 넘어 허공 드높이 까맣게 아치를 그리며 날아가서 사라졌다. 그 볼은 관중들의 몫이 아니었다.
야구를 구경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정사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시청해야만 하는 도희영에게 채진수가 보내 주는 선물이었다. 볼은 야구장 밖 도로 위에 툭 떨어져 데굴데굴 그녀의 가게 앞까지 굴러왔다. 어느 땐가는 가게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그녀의 발치까지 굴러와서 멎기도 했다.
그래서 앉아서 돈 번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희영은 그 공이 최소한 1억원짜리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의 비중에 따라 그 열 배가 될 수도 있다. 그 공에 묻어 있는 한 인간의 피땀어린 노력의 대가가 돈으로 치자면 그런다는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손에 들어온 공을 진열장에 채곡채곡 진열해 두었다. 그렇게 진열한 공이 34개나 되었다. 공에는 채진수의 이름과 경기 날짜, 시간, 상대 투수의 이름까지 세세히 적어 놓았다. 상대 투수의 눈물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공은 채진수의 얼굴,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희영처럼 가까이서 채진수의 향기를 맡고 체감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는 채진수란 불세출의 영웅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2
한 인간을 많이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 인간성까지 체험해 봐야 내릴 수 있는 답이다. 그녀에겐 그녀만이 아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 비밀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고 발설해서도 안 된다. 그녀 자신과 한 약속이었다. 진수는 성격이 쾌활하고 가식이 없는 남자였다.
이 자리에서 장사하면서 몇 년 간 만나 보니 터프한 외모와는 달리 깔끔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시끄러운 야구장에서 해방되면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감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희영이 그의 스물 여덟 번째 생일로 사 준 세계명시집을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며 귀퉁이가 다 헤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야구장 밖에서의 생활에서도 그가 퍽 성실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소소한 물건 하나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성실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사랑한다.
진수는 야구장 안에서건 밖에서건 그 누구와 입씨름 한 번 하지 않을 만큼 긍정적이고 온순한 성격이었다. 그의 표정은 항상 웃는다. 상대편 투수의 싱커볼을 치지 못하고 삼진당했을 때도 웃고, 채진수가 미워서 일부러 투수가 던진 빈볼에 맞아 쓰러져서도 허허 웃었다. 그는 고통을 밖으로 표출하기 싫어했다.
야구장에선 공포의 4번 타자이면서도 여자 앞에선 수줍음을 타고 또 많은 여자와 사귀지도 않았다. 그가 사귄 여자는 딱 한 사람, 도희영이었다. 아직까지는 희영이 외에는 다른 여자와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희영이 그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술을 좋아해서 그녀의 카페를 단골로 찾기 때문에 알았다. 스물 한 살 때부터 이 카페에서 일을 했으니까 그와 만난 게 햇수로는 다섯 해이다.
카페는 간판뿐이고 오다 가다 들를 수 있는 선술집처럼 자그만 목로주점이었다. 넓은 도로변에 다른 술집, 식당과 함께 붙어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야구 경기장 주변이 외진 곳이어서 야구 경기가 없는 날은 거의 손님이 없고 시합하는 날만 반짝 장사가 잘 되었다.
홈팀을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이 우리 편이 지면 화가 나서 한 잔, 이기면 기분 좋아서 한 잔하는 곳이다. 그녀는 작은 카페 여종웝원에 불과한 신분이지만 주인이란 긍지를 잃지 않고 품위 있게, 교양 있게 행동한다. 진짜 주인은 가게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잠깐 왔다가 사라졌다.
주인이 모든 가게 운영을 희영에게 다 맡기고 있었다. 희영이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안주거릴 푸짐하게 대접하고 차 한 잔만 팔아도 팝콘, 사탕을 접시 그득 담아 넉넉하게 서비스했다. 꼭 이겨야 할 경기에서 우리 편이 이기면 술값을 아예 안 받을 만큼 기분파였다. 아마 시리즈에서 우리 팀이 우승하면 그 때는 큰 잔치를 벌이려고 준비해 두었다. 물론 무료 제공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 편이 시리즈에 패배해서 씁쓸한 마음으로, 준비한 음식을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자신의 우울한 모습을 머리에 그렸다. 경기가 종반으로 접어들었는데 우리 편이 3대 5로 지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상대 팀을 응원하는 함성소리였다. 상대 팀이 공격하고 있었다.
8회 초에 노아웃 만루로 대량 실점할 위기에 놓여 수비하는 쪽 관중은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상태 팀의 응원 소리가 텔레비전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타자는 이름도 무서운 4번 홈런 타자였다.
와아 하는 함성이 들렸다. 타자가 친 볼이 총알같이 날아가서 유격수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갔다. 2루 주자도 동시에 아웃되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가 친 공은 허공 높이 치솟아서 포수가 홈플레이트 뒤쪽 덕아웃 팬스까지 쫓아가서 잡아냈다. 상대 팀은 한숨을 내쉬고 우리 편은 안도의 박수를 보냈다.
희영도 박수를 보냈다. 홀엔 손님 없이 그녀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가끔 청소원 아저씨가 들어와서 그와 함께 보는데 오늘은 쓰레기 줍기에 바쁜지 보이지 않았다. 청소원 아저씨는 야구 열성팬이었다. 우리 편이 시합에 지는 날은 밥을 먹지 않고 술만 마셨다. 희영은 술값을 받지 않았다.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청소원 아저씨는 술값 대신 시골에서 가져온 옥수우와 감자 따위를 한 보따리씩 선사했다. 오늘은 질 줄 알고 경기도 안 보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가슴 조마조마하며 자신을 학대하느니 차라리 야구에서 등돌리는 게 좋지. 이번 게임만 보고 절대 안 본다 하면서도 새경기가 열리면 새마음으로 텔레비전 중계에 푹 빠지곤 했다.
3
밖에는 비가 오는지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야구장에도 실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경기 끝판애 부슬비가 오니까 땀으로 목욕하는 선수들 시원하겠다고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농담을 했다. 8회 말 공격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 이닝에서 점수를 뻬지 못하면 9회 말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9회 초 수비 때 실책을 해서 1점이라도 더 주게 되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상대 팀은 신이 나서 껑충거리고 투수는 사력을 다해 직구, 커브, 싱커를 자유자제로 구사하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라운드엔 상대 팀 선수들의 모습만 크게 보이고 우리 편은 기가 죽어 허재비처럼 위축돼 보인다. 가게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실내로 들어왔다. 희영은 야구에 열중하느라 들어오는 손님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리 부상으로 한국 시리즈에서 어제까지 엔트리에서 제외됐던 채진수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희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홈런타자를 반겼다. 진수는 빙긋 웃고 그가 항상 앉았던 창 옆 자리로 가서 낯을 약간 찡그리고 앉았다. 앉을 때 다리에 통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부상이 아직도 낫지 않아서 그는 중요한 게임에 뛰지 못했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감독님이 엔트리에 넣어 줬지만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오느라 이제야 온다고 하며 희영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끝까지 팬들에게 좋은 모습 보여 주지 못해 미안해 죽겠어. 희영 씨에게도 미안하고.”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경기가 이번뿐인가요? 올해 지면 내년에 잘해서 이길 수 있잖아요?”
“희영 씨는 항상 그렇게 말했지. 희영 씨를 만나니 힘이 나는 것 같군. 그 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해.”
희영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그가 병원에서 치료 받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진수가 한 달 간 카페에 안 찾아왔다고 해서 서운할 건 없었다, 어서 그가 낫기만 바라고 있다. 부상이 너무 커서 내년 시즌에도 경기에 뛰지 못하면 팬들은 그의 멋진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경기장에 가실 건가요?”
“감독님이 엔트리에 넣어 놓셨다니 가 봐야 예의겠지.”
진수는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공격에서 번번히 허탕치는 동료들을 실망에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노아웃 2루인데 믿었던 3번 타자가 병살타를 치고 말았다. 루상에 주자가 없어졌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항상 그렇죠 뭐. 게임 있는 날만 반짝 장사가 되고 그 외는 파리 날려요.”
“어서 돈 벌어서 시집가야 할 텐데. 카페 그만두고 시골 형부 과수원으로 가겠다더니 그 얘긴 어떻게 됐어?”
“사장님이 아직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요.”
“카페보다 과수원이 나을까?”
“더 나을 게 있겠어요? 거긴 시골인데, 모든 게 여기보다 불편하겠죠.”
“그리고 힘들 거야. 과수원에 가면 노동을 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가냘픈 몸으로 노동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야구 스타님께서 저 같은 여자 걱정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어서 가 보세요. 감독님이 기다리실 텐데. 진수 씨가 경기장에 모습을 보임으로 해서 경기가 더 잘 풀릴지 모르잖아요?”
“벌써 8회 말인데 뭐. 이미 진 경기야. 두 점을 따라 붙어 동점이 된다고 해도 원점에서 새로 새작애야 되거든. 타격도 타격이지만 투수력에서 우리 팀이 열세야.”
“경기는 꼭 실력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운이 있어야 된다고, 특히 오늘 같은 큰 게임에서 기적 같은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수없이 말씀하신 걸 기억해요. 어서 가세요, 9회 말이 끝나기 전에……”
진수는 희영의 한 손을 살며시 잡고 빙그레 웃었다.
“마담에게 술 한 잔 얻어먹고 가야지.”
“안 돼요. 경기에 나가실 땐 술 드릴 수 없어요.”
“꼭 마누라같이 구는군.”
4
진수는 의자 등받이에 한 쪽 팔을 짚고 일어섰다. 또 낯을 찡그렸다. 희영이 붙잡아 주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선 주자도 없이 마지막 타자가 파울을 열 개까지 쳐내며 끈질기게 승부를 하고 있었다. 진수가 일어섰을 때 또 파울이 관중석 쪽으로 튀어 날아갔다. 그렇게 해 가지곤 안타를 치고 나가도 1점을 뽑기 어려웠다. 다음 타자가 그 투수에 가장 약한 연속 19이닝 무안타 타자였다.
“어서 가세요. 경기 끝나겠어요.”
희영이 안타까운 듯 재촉했다.
“저 친구 아웃되는 걸 보고 갈 테다.”
“얼른 안 끝날 것 같은데요. 파울로 시간 끌며 진수 씨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아유, 아까운 시간 다 가네.”
“그게 내게 할 말의 전부인가?”
진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예요?”
“더 부드러운 말 좀 듣고 싶다. 경기 얘기가 아닌 걸로, 우리 인생의 이야기 같은 것 한 마디 해 줄 수 없나?”
이 절박한 시간에 진수는 일부러 늑장 부리듯 여유를 부렸다. 그가 경기장에 도착하기 전에 경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희영은 그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경기에 지친 내게 항상 희망의 말을 해 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지. 희영 씨가 준 세계 명시가 내게 얼마나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 주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난 경기가 잘 안 풀리고 몸이 내 말을 안 들을 때면 세계 명시를 속으로 암송햇던 거야. 희영 씨에게 감사하고 있다.”
“어서 가요 어서 가.”
희영은 진수를 출입문 밖으로 떠밀어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경기장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열 네 번째 파울이었다. 스타의 무거운 뒷모습을 보고 희영은 울고 싶어졌다. 위대한 스타를 경기장으로 떠밀어 보낼 권리가 그녀에겐 없었다. 아니 있었다. 단 하나. 그 말을 그에게 해 줘야 한다.
“채진수 씨!”
희영의 부름에 진수가 어둠 속에서 돌아보았다. 희영은 빗속으로 걸어가서 그와 함께 비를 맞으며 경기장 입구까지 나란히 걸었다. 그들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수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 임신했어요.”
그녀 말에 진수는 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그녀의 하얀 손을 보았다.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듯 울상을 지었다. 둘은 한 동안 석상처럼 서 있었다. 빗줄기가 아프게 두 얼굴을 때렸다. 아프지 않는데 아프게 느껴졌다. 비가 내리면 경기가 중단될 수도 있는데 비는 더 세차게 내린다. 경기가 중단되면 강우 콜드게임으로 끝날 것이고 그는 경기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희영은 목석처럼 서 있는 그를 경기장 출입문으로 밀어 보내고 나서 가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는디 모른다. 사랑에 조건을 달지 말자고, 아낌없이 바친 그 사랑에 만족하자고 자신과 한 약속을 저버린 것 같아 죽고만 싶었다. 그녀의 말이 진수에게 무거운 죄책감으로 작용하지 않기를 빌었다.
5
초여름, 그가 부상을 입지 않고 한창 홈런 방망이를 휘두를 때 그가 한밤중에 카페를 찾아왔다. 손님이 없어도 카페는 자정까지 장사를 하지만 카페가 곧 희영의 잠자리이기 때문에 장사할 때 외에는 그녀의 집이었다. 겅기에 지고 나서 그는 술로 화풀이했다. 화풀이할 때는 혼자였다.
진수는 술을 마셔도 절대 만취되게 마시지 않고 맥주 두 병이 주량의 전부였다. 그 날은 소주를 곁들여 마셨다. 그는 구심의 볼 판정에 불만이 많았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해도 그 구심은 뇌물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엉터리 같은 볼을 모두 스트라이크로 판정할 리 없었다. 구심의 엉터리 판정 때문에 망친 경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스타는 소인배들을 경멸하면 안 돼요.”
희영의 위로에 진수의 분노는 누그러졌다. 그가 항상 하는 농담으로, 술장사 그만하고 시집가라느니, 그녀가 결혼하면 제일 비싼 웨딩드레스를 선물하겠다느니, 허물없는 대화를 밤 늦도록 주고받았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진수는 희영의 카페에 오면 얼른 떠나지 않고 맥주 두 병을 두세 시간 가량 오래오래 마시면서 시간을 끌곤 했는데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자정이 지나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진수의 주량을 잘 아는 희영은 맥주 두 병 이상 안 주려고 했는데도 진수는 소주까지 곁들여 세 병을 혼자 다 마셨다.
밖에는 장마비가 장대비로 내리고 택시를 잡기도 어려웠다. 콜택시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진수는 콜택시를 불러 놓고 홀 의자에서 잠들어 버렸다. 희영은 택시 운전사에게 택시비만 주고 돌려보냈다. 술 취한 야구 스타를 차마 택시 기사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그녀 방에 재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에 진수가 깨어 보니 희영은 그의 옆에서 팬티만 입은 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팬티바람이었다. 희영이 깨어 수줍게 웃으며 황급히 옷을 걸쳐 입었다. 옷을 입다가 발이 바지에 걸려 팬티가 밀리며 중요한 부분이 노출되었다. 진수는 자신이 취중에 실수를 했단 걸 알았다. 취중에 느낀 그녀의 육체는 숫처녀가 아니었고 남자 경험이 꽤나 있는 여자였다.
그녀의 방을 나갈 때 입에 바른 말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희영은 입 다물고 웃기만 했다. 그녀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맥주 한 잔 대접한 걸로 생각할래요.”
희영은 야구 스타 채진수가 첫동정을 바친 여자였다. 그가 색을 밝힌 사내라면 그 후에도 희영에게 몸을 요구했겠지만 그는 여전히 여동생처럼 희영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대했다. 그의 여동생이 하필이면 희영과 같은 여고 동창생이었다. 여동생은 희영의 학교 시절 품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범생에 공부는 반에서 5등 안에 들고 시를 꽤 잘 썼다고 한다.
3학년 때 사업하던 아버지가 지병으로 별세했다. 위로 오빠가 둘, 언니가 셋이나 있어서 막내인 희영은 대학을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카페 마담이 된 동기였다. 카페에서 만난 한 남자를 좋아해서 그에게 첫순결을 바쳤다. 그 때도 맥주 한 잔 대접하는 기분으로 아낌없이 바쳤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만 나라에 살고 있다.
진수가 희영에게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남미의 끝 칠레라고 대답했다. 첫순결을 바친 남자가 그 곳에서 포도 농장을 하고 있는데 그를 한 번 만나 보는 게 소원이었다. 칠레는 그녀 인생의 최후 여행지가 될지도 모른다. 진수에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그 나라가 아름다울 것 같아서라고 했다.
진수란 남자를 알게 된 뒤로 그 첫남자에 대한 영상은 점점 희미하게 지워졌다. 이제 누가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칠레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인생의 최후 여행지는 어디일까? 그 대답은 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