图1
内蒙古通辽市奈曼旗沙力好来1975年出土的緑釉鸡冠壶,高25、口径6厘米。
그림 1 네이멍구 퉁랴오 시 나이만 기 샤리호래에서 1975년에 출토된 緑유료 닭 관호는 높이 25, 구경 6센티미터이다
图2
首都博物馆展出的水晶嵌金舞狮纹带板。
그림 2 수도박물관에 전시된 수정감금무사자무늬대판.
여율직루구(서기 ?-1213년 미시험), 시요우인종차자, 시요나라 말기 황제.재위 기간은 서기 1178-1211년에서 34년이다.
서요숭복 14년(서기 1178년)에 서요나라에서 궁정 사변이 일어나자, 예율 보속완은 남편의 동생과 간통을 하여 남편을 폄살하고, 驸마의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었다.이렇게 하여 제위는 여율 이열의 아들 예율 직루구가 계승하였고, 개원천희(1178~1211)는 요말주를 위한 것이었다.
서랴오(西辽) 통치집단은 집권 후반기부터 부패와 쇠락을 거듭했고, 병권은 외성 대신의 손에 넘어갔다.노구가 즉위한 후 용병이 잦아져 국력이 날로 쇠락하고 있다.이와 함께 화라자모국(。子模國)이 서서히 일어나 서요나라의 통치에서 벗어나 중앙아시아를 제패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서요나라의 여러 속국 관리들도 갈수록 부패하고 있다.
시랴오는 1198년(천희 21년) 후아산에 진출해 구어왕국 및 현지 일부 지방군과 격전을 벌인 결과 1만2000명이 사망할 정도로 참패했다.
1204년 가을, 시랴오는 마침내 안드후이에서 구어 국왕을 무찔렀지만, 큰 대가를 치렀고, 후아산에서 화자모의 발전을 위해 장애물을 쓸어버리고 득보다 실이 많았다.
1205년 몽골 칭기즈칸은 만부(蛮)를 멸망시켰고, 만부 수장 태양한(。)은 패망하고 아들은 율을 물리치고 도망갔다.연초에 규칙을 어기고 서요로 도망가다.예율 나오루구는 딸을 굴출율에게 시집보냈다.율을 굽혀서 또 시랴오의 병력을 빌려 동쪽으로 가서 수집하는 것은 만만의 잔부이다.
1206년 화라자모국인 술탄모호마가 시랴오나라를 벗어나자 시카라한국도 화라자모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209년(천희32)에 고창회鹘왕은 서요파가 주재하는 소감의 억압과 약탈과 능욕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소감을 죽이고 몽골로 돌아가 칭기즈칸을 상실하였다.
1210년(천희 33년)에 화라지모왕 마호말은 대군을 이끌고 동진하여, 탈라스강 골짜기에서 시랴오군을 쳐부수고, 그 통수권자인 타양고를 포로로 삼았다.후시료는 다시 서부의 허중 지역을 상실했다.
1211년 망명한 노먼 왕자는 율을 굽히고 화라자모와 약속해 서요를 협공했다.요말주 나오루쿠를 틈타 사냥을 나갔을 때, 군사를 거느리고 8000명을 체포하여, 서요제위를 찬탈하였고, 묘호는 긍지 황제였다.굴출률이 서요제위를 찬탈한 후, 겉으로는 직로고를 태상황으로, 황후를 황태후로 추앙하고, 실제로는 하라시요의 이름으로 자신의 통치지위를 안정시키고 공고히 하였다.이로써 서요는 사실상 멸망했다.2년 뒤(1214년) 나오루구는 비분사했다.
몇 년 뒤인 서기 1217년 칭기즈칸파 대장 철별은 몽골 대군을 이끌고 서정칠하지구에 들어가 도성호사斡루투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갔다.이듬해에, 굴출률이 몽골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자, 시요나라가 멸망하고, 몽골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시랴오가 죽자 일부 핼라치단 사람들이 이란 케르만성으로 옮겨서 아이만 왕조를 세웠는데, 속칭 후시랴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