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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 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 그 뒤를 애굽 사람이 건너다 죽었다. 드디어 애굽 사람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여기에서 그들의 한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주 쉽고 싸게 구원을 받았다. 싸우지도 않고 거져 구원을 얻었다. 구원의 완성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홍해를 건넘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장정만 60만이요 적게 잡아도 200만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겨우 2명이었다. 구원에 경험한 자는 많았지만 구원의 열매를 가진 자는 극소수였다.
구원을 받기는 쉬우나 구원을 지켜내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들과 우리는 차이가 있는가? 구원을 향유하고 유지하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인가?
이사야 55장 2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지 못한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요 너희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기서 핵심은 “청종하라”이다. 핵심은 청종이다 그렇다면 청종이 무엇인가?
유대인이 라면 누구나 암송해야 한다는 신명기 28장에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여 네게 이르리니” 신명기 28:1,2
여기서 청종을 모세는 두 가지로 다른 뜻으로 풀어 쓰고 있다.첫째는 “삼가 듣고 ” 여기서 "삼가“를 어학사전으로 풀이하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듣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상대 방과 의견이 달라도 듣기 싫은 말을 할지라도 예의를 다해 듣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콧등으로 듣는다.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서 생긴다.
휴대폰에 국가에서 보낸 재난문자가 너무 자주 와 보지도 않고 수시로 지워 버린다. 작년에 아주 추운 겨울에 상수도가 잠깐동안 얼어서 녹이느라 수고를 좀 들이다가, 올들어 상수도가 얼지 않게 단단히 단속을 해 절대로 얼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얼마 전 최강 추위를 앞두고 동파방지에 관한 재난 문자가 수시로 왔지만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습관적으로 지웠는데 아뿔사 퇴근 후에 와 보니, 상수도가 다시 얼었다. 영하 20도 이하의 강추위에서 다시 녹이느라 고생을 했다. 알고보니 전에 다시 단속을 한 것이 잘못되었는데 한 번만 확인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불상사였다. 삼가 들고 행했으면 될 일이었다.
청종은 또 ”지켜 행하라“고 풀어 쓴다. 가족을 지키든지 재산을 지키든지 가치관을 지키든지 지킨다는 것은 주로 소중한 것에 무게를 둔다, 가치 없고 필요 없는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소중하다. 그러므로 지킬 가치가 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다. ”행하라“ 소중하다면 행하라.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서에서 청종을 이렇게 풀어 쓰고 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4:7.8)
이 구절을 Living Bible에는 이렇게 번역 한다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전력으로 생각하는데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 대신 영적인 사물에 적합한 것에 초점을 맞춰 연습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는 데만 시간을 보내라”
시대의 소망 37쪽에는 우리의 청종을 어떤 상황에 적용시킬 지에 명백한 해답을 준다.
“그 분은 우리를 진토에서 건져내어 손상된 품성을 당신의 거룩하신 품성을 따라 재형성하시고 그 품성을 당신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만드시기 위해 오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늘에 사는 사람으로 적합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품성으로 재형성 해야 하는데 이것을 이루는 최고의 지름길이 청종이다라는 의미다.
필자는 청종이 가장 어려운 사람 중 하나다. 아내가 두 마디만 해도 듣기싫다고 구박하곤 했다. 아내의 잔소리도 인내심을 갖고 잘 듣기만 해도 품성이 자라난다. 이것이 생활 속에 복음이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 관해 기록해 놓은 교회에게 보내는 권면 153쪽에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의 형제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형상을 보았다. 서로 간의 한 가지 관심사 만이 편만하였다. 한 가지 특출한 주제가 다른 모든 문제를 삼켜 버렸다. 신자들의 유일한 포부는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요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품성의 변화에 관한 결론적인 원칙은, 한 가지 원칙 즉 그리스도의 품성을 밖으로 발현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하늘에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다음에 이에 대한 해답을 명백하게 준다.
“이 생에서 우리가 형성한 품성은, 우리가 영원한 세월(하늘의 생애)을 통해 살기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게으름을 피우면서 안전한 채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목사 379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 품성은 하늘까지 가지고 간다. 그렇다면 소름끼치도록 중요한 진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 해설하셨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8장 18절
땅에서 지금 매이는 삶을 살면 하늘에서도 매이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지금 이 땅에서 살면서 품성의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증언보감에서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
“이생에서 형성된 품성은 장래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은 어떤 개인의 품성도 변화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귀중한 은혜의 시기(지금)는 우리의 품성의 옷을 빨아서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는데 사용되도록 주어졌다.” 증언보감1권 537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부족한 점은, 손상된 우리의 품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고상한 품성으로 재형성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리도 품성계발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오신 목적과 너무나 먼 모습을 보인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흔히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라고 주장하는데도 그들의 말과 정신과 품행의 변화를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실물교훈에 이에 대답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구절이 있다.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이 속에서부터 부풀게 하는 작용을 일으켜 점차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역사도 먼저 마음속이 새로워짐으로 이루어진다. 외적인 개선만으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런 악습, 저런 악습을 교정함으로 품성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실물교훈 97
출발점은 마음 즉 생각의 변화에서부터이라고 배웠다 그러면 마음 즉 생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마음속에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셨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단지 의무감에서 지키는 자들은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성향과 충돌되기 때문에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애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순종은 마음속에 간직한 원칙을 따라 행(Act :實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순종은 의를 사랑하고(좋아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즐기는) 데서 생긴다. 모든 의의 진수는 우리 구주에 대한 충성이다” 실물교훈 97
부연설명 하자면 가루속에 감추인 누룩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모든 가루를 부풀게 만들 듯이 말씀에 의해 깨닫게 된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기를 결심하면, 누룩이 부풀듯이 조용히 끈기있게 마음이 변화된다 아울러 타고난 본성이 부드러워지며 억제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상과 감정과 동기가 심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은 없었던 기능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던 기능들이 좋은 방향으로 활성화 되어 품성으로 고정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사랑하고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과학적이 증거와 일치 되어야만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실행은, 좋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억지로 하는 것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순종으로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뱀을 “쳐다본 즉 살리라”는 민수기 21:9을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이는 이미 고개를 쳐 들 수 없을 만큼 독이 퍼진 이도 있었다. 그들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쳐다본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역시 구원을 받았다. 억지로 하는 행동조차 시작하면 그 것이 큰 동기를 얻어 큰 결과를 볼 수 있다. 이것이 행하는 믿음이다.
행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찌 하는 것이 행하는 믿음인가? 실물교훈에서는 구체적으로 행하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라고 주장함에도 그들의 말과 정신과 품행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또 자기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반대를 참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며 말이 거칠고 거만하고 툭하면 성을 잘 내는 자들이 많이 있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활에서 세상 사람들의 생활에서나 볼 수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과, 이기심과, 급한 성미와 성급한 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처럼 자만하기를 잘하고 선천적인 못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괴벽한 품성을 자주 나타내는 것을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까닭이다. 그들은 진리의 누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그 누룩이 작용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들의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나쁜 성벽이 누룩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되지 않았다.” 실물교훈 99
누룩을 부풀리는 핵심은 누룩을 곱게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물을 넣어 혼합하는 일이다. 그리고 진득하게 숙성되도록 반드시 기다린다. 우리 중 더러는 말씀을 듣거나 읽고 깨닫지만 그 말씀이 실천 되도록 쪼개고 부수어 마음속에 적용하여 간직하지 않는다. 말씀의 실천은 목사나 일부 믿음이 좋은 교인의 몫이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천하여 나의 생활 속 일부에서 말씀이 적용되도록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진리의 누룩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그리고 그결과를 바로 보지 못하면 실망하여 낙담한다. 진득하게 결과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진리의 누룩이 없는 이들은, 그들의 생애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핍 즉 품성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 실물교훈 100
즉 하나님의 진리의 누룩이 마음속에 능력으로 작용하도록 허용도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설명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성경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연구하고 지키면 마음속에 작용하여 모든 거룩하지 못한 성벽을 복종시킨다. 성령께서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속에 생긴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역사하게 되어서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우리의 속에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밖으로 나오게 되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받은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게 한다. 성경의 진리는 사람의 가장 큰 필요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심령의 거듭남을 이루게 해 준다. 이 큰 진리의 원칙을 우리의 일상 생애에 실천하기에는 너무 순결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진리는 하늘에 미칠 만큼 높고 영원을 포용할 만큼 원대하지만 그 진리의 생생한 감화가 사람의 경험 속에 짜여 져야 한다.” 실물교훈 10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변화는 하루일의 생활 가운데 하나씩 결심하고 하나씩 실천함으로 조금씩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실천의 기쁨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기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품성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도달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마련해 두신 재료들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품성을 건설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와 같은 실천을 하기만 하면 그와 꼭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성화된 생애 107
나이가 드니 느끼는 바 중에 하나는 나이 들수록 품성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더욱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많은 믿음을 지니고도 거친 말을 쓰는 품성 덕에 나락에 빠지는 예를 너무나 많이 보았다. 좋은 신앙의 지식을 뽐내며 자신을 나타내어도 너그럽지 않는 품성을 드러냄으로 실망하는 예를 더욱 많이 보았다. 교회 원로들에게 필요한 최고의 가치는 품성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가장 가치가 높다. 모세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민12:3)다고 했다.
오래 전에 존경하는 아는 선배 장로님에게 식사 초대를 받아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는 눈치도 안 보고 (옆으로 가는) 게를 시켜 잡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선천적으로 온유한 심성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의 품성 안에 약속된 말씀의 실천이 결여됨이 확인 되자 더 이상 깊은 신앙적 교류는 단절 되었다. 모세의 품성의 온유함은 최고 수준의 절제와 하나님의 약속을 생활 속에 실천하는 품성에서 왔다. 나이든 교인일수록 원로일수록 하나님의 약속이 생활 속에 실천되는 품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면 더 존경을 받는다.
“품성은 믿음을 신뢰해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약속)하신 것들을 신뢰함에서 얻는다." 성화된 생애 1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성경의 허락을 실천함으로 배가 된다.
“일생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 즉, 그 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따르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로의 계단 134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실천하기로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그일(약속)을 실천하는 자에게 반드시 이루사(are made a whole) .. (실천하는) 우리로 거룩한 품성의 생애로 살수 있게 (must to be live) 하신다.” 정로의 계단 146
뜨거운 가마 속에서 구워낸 도자기는 그 찬란한 빛깔이 바래거나 우중충해지지 않는다. 말씀으로 단련된 품성은 하늘에서도 쓰임을 얻고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