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성에 대한 성찰
예술철학 시간에 발표하는 학생이 ‘순수예술’ ‘순수문학’ 등에 대한 개념을 말하였는데, 이 개념이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아서 약간의 모호함이 있었고 또 이후 학생들의 질문들에 대한 분명한 답변도 잘 주어지지 않았다. 순수성은 무엇이며, 순수예술이란 또 무엇이며 나아가 순수문학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선 ‘순수하다’는 것에 대한 개념을 규정해보자. 어떤 것이 순수하다는 것은 이 ‘어떤 것’에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금의 순도를 말 할 때 ‘순도 99%’ ‘순도 85%’등의 말을 한다. 이는 그 금에 금 이외의 금속성분이 1%정도 혹은 15% 정도가 섞여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순수한 금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순수하지 않는 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우정’이라고 할 때, 이는 두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우정’ 이외에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다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 어떤 것이 ‘순수하다’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것’ ‘원래적인 것’ ‘참된 것’ 등의 개념이 먼저 있어야 한다. 보다 이 근본적이거나 본래적인 것에 근접해 있을 때 순수한 것이며, 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면 순수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예술’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예술이란 것의 본질’, ‘원래적 의미의 예술’ 혹은 ‘참된 예술’이라는 말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만일 ‘예술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사람에 따라서 혹은 관점에 따라서 모두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순수예술’이라는 말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순수하다는 말도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혹은 본래적인 의미의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예술이란 창작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創作)이란 무엇인가? 이는 ‘창조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두세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무에서 유’를 산출하는 신의 세계창조에 있어서의 창조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창조의 의미는 인간의 예술작업에 있어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왜 ‘예술작업’을 창조라고 하는가? 그 것은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한 예술가의 ‘개성’ 혹은 ‘인격’이 담겨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예술가와 장인을 구별하면서 전자는 ‘자유’가 있지만, 후자는 ‘자유’가 없다고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반만 말해주는 구분이다. 만일 오직 자유의 유무만이 문제가 된다면 어린아이의 자유로운 낙서도 모두 예술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새로운 양식(스타일)의 창조’는 진정한 창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원래적인 혹은 근본적인 의미의 창조란 ‘한 예술가의 모든 것’, ‘그의 기쁨과 고뇌’ ‘그의 삶에 대한 환희나 환멸’ ‘그의 열망이나 분노’ ‘그의 감동이나 회한’ 등이 그의 작품에 담겨 ‘형상화’ 될 때, 다시 말해 한 개별자의 ‘인격(persona)’ 혹은 ‘자아’가 작품이라는 것으로 외형화 될 때 이것이 곧 창조작업이 된다. 왜냐하면 세계에 두 개의 동일한 인격이나 자아가 이을 수 없으니, 이 경우 그 어떤 사람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작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인격’ 혹은 ‘자아’ 혹은 ‘영혼’이 담겨있는 작품을 산출하는 것이 곧 본질적 의미의 예술행위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신의 ‘내면성’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전문적인 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곧 ‘예술가’인 것이다. 그의 작품행위가 오직 이것에만 목적을 두고 있으며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 섞여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순수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의 예술을 순수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현대예술은 이 같은 창작을 목표로 하지 않고 다른 이유들이 끼어들고 또 섞여 있다. 그것이 ‘유명세’이거나 ‘경제적 이득’이거나 ‘정치적 이득’이거나 원래적인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이 섞여 있을 때, 그 만큼 ‘순수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수문학이라는 것은 본래적인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문학을 말하며, 순수하지 않는 문학이란 문학의 본래적인 혹은 본질적인 의미에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개입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순수한 환경운동, 순수한 의사, 순수한 학자, 순수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순수한 집회나 불순한 집회, 순수한 촛불집회나 순수하지 못한 촛불집회라는 말도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촛불은 ‘빛’을 상징하며 ‘빛’은 또한 ‘진리’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오직 ‘진실’ 혹은 ‘진리’를 갈망하는 촛불 운동은 순수한 운동일 것이며, 그이 다른 목적이 섞여 있다면 섞여 있는 그만큼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순수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순수한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순수한 음식만을 먹는 사람은 면역성이 약화되어 바이러스나 다른 독성물질을 조금만 삼켜도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도 이를 대변해주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염된 것 보다는 순수한 것이 보다 나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또 최소한 무엇이 순수한 것이며, 무엇이 순수하지 못한 것인지 구분되어야 하고, 또 사람들이 이를 구별할 수 이어야 한다. 아마도 순수성과 관련하여 현대인의 가정 큰 오류가 있다면, 사람들이 ‘순수하다는 것의 특성’이 가지는 가치를 너무나 평가절하하거나 심지어 더 이상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거나, 짝퉁이 원본을 대신하고,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며, 진정한 정치인이나 위선적이 정치인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순수성이나 참됨 혹은 진실이나 진리에 있어서 ‘아노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현대사회란 ‘순수성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