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함께 했던 시간과 투쟁을 기억합니다.
고단하고 험난한 투쟁의 길에서 먼저 가신 동지들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코뮤니스트의 실천을 다짐합니다.
이름 없이 싸우다 간 노동자를 기리는 새긴 돌(시비)을 세우자
오세철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문명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다. 다시 한 번 야만인가 새로운 대안 사회인가를 선택해야하는 길목에 서 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거나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수억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지키는 짐승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세계 곳곳의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는 그 노동력을 팔 시장에서 쫓겨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는 공권력에 쓰러지거나 감옥에 갇히고 있다.
약육강식과 이윤의 법칙에 철저한 이 자본주의 문명은 인류의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쟁터로 힘없는 노동자들을 민족과 국가의 이익이라는 미명아래 총알받이로 내몰고 극악한 파시즘 체제 속에 가둔다. 경제의 위기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인류는 진정으로 자유와 평등이 살아 숨 쉬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를 갈망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위대한 혁명가나 투사만이 아니고 이름 없이 싸우다 죽어 간 노동자들이었다.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 지배세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추앙하고 그들의 죽음도 떠받들어 미화한다. 노동운동, 민중운동 세력 역시 명망가나 지도적 인물들만 기록하고 역사에 남긴다.
인간다운 삶과 사회를 만들려고 싸우다 죽은 이름 없는 노동자와 민중을 기리는 역사적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유럽 등지를 가보면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지배세력과 싸웠던 투쟁의 현장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기념비에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박물관이나 묘지에만 가두어 놓지 않고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열사들의 묘역을 몇 군데 만들기는 했으나, 이름 없는 노동자 민중의 기록과 현장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일용노동자 가대기 언니
얼마 전 백기완 선생의 회고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읽다가 눈에 띄는 이야기 “내 눈을 띄어준 스승, 가대기 언니”에서 백 선생의 뜻 깊은 제안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그가 열서너 살 때 만나 스승으로 받아드렸던 이름 없는 일용노동자 가대기의 이야기였다. 가대기란 창고나 부두에서, 쌀가마니 따위의 무거운 짐을 갈고리로 찍어 당겨서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제 어깨 밖에 없는 그가 진짜 싸움에 대해 깨우쳐 준 말이다. “싸움은 턱없이 뺏어대는 놈, 있는 놈하고 하는 거야 , 임마 가진 것이라고는 ‘이’ 밖에 없는 놈끼리 붙어봐야 코만 터져, 이놈들아”였다.
그러면서 백 선생은 “나는 그적지까지 가장 따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몽양도 아니고 백범도 아니고 조소앙 선생도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가대기 언니였다”고 고백한다.
백 선생은 제안한다. 서울역 어딘가에 새긴 돌(시비)이라도 하나 세워 예순 해도 앞서서 일러준 노동자의 철학을 지금의 노동자들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 땅에 가대기 언니가 하나뿐이겠는가?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울 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싸우다 간 노동자들을 기리는 시비를 투쟁의 현장 곳곳에 세우는 운동을 펼치자고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제안한다.
<출처> 「다시 혁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