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철학14 –존 위클리프 ‘목회직론(성직론)’(2016년 5월 2일 월요일)
오늘은 위클리프 ‘성직론’에 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여기에 들어가기 이전에 로마 카톨릭 교계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그것은 피라미드로 설명될 수 있다. 가장 밑에는 평신도, 그 위에는 수녀가, 그 위에는 사제들이, 그 위에는 추기경과 마지막으로 교황이 존재하는데, 사제의 계급은 또 네 가지로 나눠진다. 이것의 첫째는, 자문사제들과, 둘째, 대학교회의 교수, 그리고 셋째, 수도사들과, 마지막으로 교구사제가 있다. 이들은 고위층으로 갈수록 성직 록이라는 것을 받게 되는데, -교구사제는 거의 받지 못한다-그것에는 연금과 집, 그리고 성직과 재산 등이 성직 록 안에 속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생계의 수단으로 성직 록이 상용되었지만, 후에 갈수록 게을러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성직 안에 있지 않고 나온다 하더라도 이 성직 록은 그대로 따라 갔기 때문에 성직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받고 그 자리를 매매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성직매매인 것이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무오설과-교황은 죄를 범하지 않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 성직록을 받으며 점점 부패해 가고 있는 그들에게 반박하는데, 그것이 바로 ‘목회직론’인 것이다.
정리와 요약 오늘은 위클리프의 ‘목회직론(성직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목회직론’은 말 그대로 목회직에 관한 이야기로서, 목회자의 거룩 성과 설교의 건전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는 오늘 첫째 부분인 목회자의 거룩 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에 관한 문제였다. 위클리프는 처음 자신의 삶과 결여하여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교황과 목회-직-자들이 부패했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위클리프는 용감히 교황에게 반기를 드는데, 목회자들은 성직 매매로 인해 교회가 부패되지 않기 위해 세습적인 방법, 즉 성직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성직매매와 십일조 강조 등, 본래 그리스도와 너무나 상반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몇몇 성직자들은 이렇게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속권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주권을 소유해야 하고, 모든 사제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품을 나눠 주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감독은 대접을 잘해야 하기에 좋은 집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동일한 근거로 목사와 부목사에게도 허용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권을 속세의 주권자들에게 허용하였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겐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족할 것이라고 위클리프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위클리프는 주장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즉 목회자들은 성직록이 아닌 일하여 일용한 양식을 얻어야 하는데, 만약 제정 적 여유가 있다면 그것에서, 없다면 십일조에서 먹을 것과 입을 수만 있는 정도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먹는 것과 입는 것의 기준은, 굶어서, 혹은 덥거나 추워서 죽지 않을 정도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 세습적인 방법, 즉 지금의 형식인 교황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감상문-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시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아시고 인도하시고, 우리 인간은 그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만 순종해야 하는데, 만약 명한 것 외의 사소한 것까지 하나님께 의탁하여 수동적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과, 둘째로는 성경 말씀을 기초로 실천하는데서 온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의 이런 예화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육체적으로 몸을 씻어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씻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기에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순종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행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죽는 것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지속할 필요가 있으며 이점에서 양식과 수면, 그리고 필수 쾌락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후자의 사람은 성경의 위와 같은 본문을 가지고 삶에서 실천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성경은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는 위의 문구들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한 문장, 위의 문구들로 설명되실 수 있었더라면, 성경책과 예수님의 말씀은 필요 없었거나 쓸모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과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은 진리이다. 따라서 그 문구들에는 부연 설명이 있을 것이며, 그 말씀을 하신 목적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리고 후자에 있어서는 인간은 한계성을 가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없기에 성경이 탄생되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만약 인간이 한계성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고 들을 수 있었다면 성경은 필요하지도, 탄생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며,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하다. -필요 없는 죄의 탄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었다.-그렇기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문자로만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받아드려 그 목적을 생각하고, 그 목적에 맡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험이자 계시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못한 앎은 죽은 지식이요, 죽은 지식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직론 본문 : 1부 1. 목회자의 지위에 관련되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목회자의 거룩성과 그의 설교의 건전성이다. 먼저 목회자의 거룩성을 살펴보자.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이탈하는 죄를 범하기 전에 모든 종류의 덕에서 강건하여 온갖 종류의 인간적 교제, 현세의 모든 세속적인 것, 심지어 이승의 삶 자체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2. 이러한 교훈에서 사도들의 규율,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가 기원했음이 분명하다. 사도는 알리멘타(필수 양식)라는 단어로 영양에 충분한 음식과 음료를 표현했다. 이는 호화로운 음식이나 남아도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필요한 몸의 영양을 의미했다. 사도는 테구멘타(덮개)라는 단어로 폭풍우와 폭염에서 보호해 줄 적당한 집과 옷을 표현했다. … 이 원리에서 보건대 현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과잉의 재산을 쌓아서 사도적 규율을 넘어서고 성도의 수도에 참여하지 않는다. 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반대하는 이유들이 제시된다. 첫째, 속권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음식과 옷 이상의 주권을 소유해야 한다. 만일 위의 주장이 맞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속권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둘째,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선택해 구제를 맡도록 했다. 그러므로 높든 낮든 사제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품을 신중하게 나눠 주는 것이 허용된다. 셋째, 감독은 대접을 잘해야 하며 좋은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사도는 가르친다. 좋은 집은 단지 필수적인 음식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딱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음식과 옷을 소유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는 동일한 근거로 목사와 부목사에게도 허용된다. 첫 번째 반대 이유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스도께서 속세의 주권자들을 임명하셨고 그들에게 속권을 맡기셨다고 말해진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두 드라크마를 로마 황제에게 주셨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반대 이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가정했던 것을 명확히 하자면, 위에서 언급된 사도적 규율은 사도 자신을 포함해 특별히 사제들과 감독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도의 말을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확대해 적용한다면, 옷과 덮개는 각자의 지위에 맞는 직무 수행에 필수적인 것들 이외에도 순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성직에 관계하여 ‘덮개’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말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에게 재산의 포기와 소유에는 세 단계가 있다. 1)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소유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버리는 것이다. 2) 직무 수행에 불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단념하는 것이다. 3) 사제직에 필수적인 것 이상의 보화나 재산을 단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어떻게 소유들을 포기했는지 살펴보고 그와 같이 행해야 한다. 반면 세속 주권자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직무에 관해 비록 육적인 욕망, 세속적 탁월, 혹은 나태한 관리로 소유를 남용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소유 포기의 선언에서 물러서는 것이 인정된다. 그들에게는 정의 실현과 구제가 그들의 책임이기에 이를 위한 권력과 재산의 소유는 필수적이다. 4. 두 번째 반대 이유에 대한 반박으로, 집사들의 직무에 관해 말하자면 집사들은 모두 가난했으며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세속 주권자라는 기미도 없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물질적인 구제를 하기 위해 부를 축적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증거가 너무 빈약하다. 세 번째 반대 이유에 대한 반박으로, 사도는 감독들이 교구 안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그들이 양 떼를 성실하게 돌보며, 직무를 통해 신자들을 지원하며, 간단한 식사가 만찬이 될 수 있는 노숙자들을 대접하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위 성직자들은 타락해 마귀의 편에 서 있어서, 빈자들을 대접해 돌보지 않고, 도리어 구제품이 필요하지 않은 세속의 주권자들과 폭군들을 지원한다. 그리고 이들은 비인간적이며 탐심이 가득한 연회에 항상 빠져 있으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빈자들의 재산에서 자신들의 배를 사치스럽게 살찌우고 있다. 5. 이러한 논거로 먹을 것이 다른 곳에서 부족할 때에 성직자들은 교구원의 구제로 살아야 하며, 이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영적인 것들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 주고 받는 일에 주님이 모범이 되셨다. 만약 이들이 충분한 수입이나 세상적 부를 소유한다면 마땅히 양 떼의 물질적인 구제를 위해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6. 이런 맥락에서 성직자는 출교 혹은 징계로 위협해 교구원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그와 같은 문제들에 관해 그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고 그 대신에 필요한 옷과 음식에 자족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셨다. 7. 위와 같은 내용에서 신자는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성직자는 징계 또는 세속적 위협을 통해 자신의 교구원들에게 받은 구제물로 자신의 고위 성직자에게 헌물을 바쳐서는 안 된다. 사실 요즘 고위 성직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가난한 양들과 어리석은 교구원들에게서 많은 돈을 강탈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혹독하게 파문하고 그들의 교회 출입과 예배 참석을 중단시킬 것이다.” … 아! 애석하도다. 교회에는 극악무도한 자들로 넘치는구나! 한 명의 성실한 성직자가 자신의 임무를 끈질기게 수행하더라도 마귀에 속한 천 명의 말썽꾼들이 거리낌 없이 그 자리를 강탈하고 자신의 교활한 서약에 따라 그의 주님을 빼앗는다. 8. 그러므로 신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직자가 목회에 심각할 정도로 태만하다면 교구원들은 마땅히 헌물과 십일조 그리고 그의 사악함을 조장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철회해야 한다. 9. 그 대표적인 사례로 세 교회를 들 수 있다. 그것들은 수도사, 참사회, 대학교회이다. 그런데 십일조가 이들 교회들과 그들의 사적 활동을 위해 전유된다. 십일조를 내는 이들은 목회직에서 악명 높게 습관적으로 일탈하는 교회들에게 바치는 헌금과 십일조를 철회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옥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평신도와 악마가 목회자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사도의 말씀이 적용될 수 있는 이들에게서, 즉 직무를 충실하게 담당하지 않는 목회자들에게서 구제를 철회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10. 어떤 이들에게 구제품을 주어야 하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교훈은 풍부하다. 첫째, 어떤 이들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영적인 도움을 내세우며 물질적 도움을 꺼린다. 그러나 주님의 일꾼은 자기 소유를 다른 일꾼들에게 단순히 배분해야 한다. 둘째, 무엇을 배분하는가? 빈궁한 자들에게,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소경들에게, 절름발이들에게 주님의 소유를 나누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인 일을 통해 그러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11.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죄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성직자는 자신의 교구 안에 거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적격의 대리인을 두면서 자신은 더 탁월하고 유용한 임무인 기도와 명상에 몰두한다. 만약 그러한 성직자가 기도와 명상에 몰두한다면, 그 직무와 직책을 내려놓으라. 혹 수도사와 참사회원이 기도와 명상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초대교회의 교부들처럼 자신의 직책을 내려놓고 명상과 기도에 임하도록 하라. 만약 세속의 소유를 탐하면서 거룩한 직책을 은밀히 가지고자 한다면 그의 삶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게 하라. 이런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기도가 없는 것이 교회에 더 유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 마음을 품는 기도는 대개 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리자의 염려만으로도 목회직에 충분하다면, 그 남아도는 자를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거하라. 그리고 그 대리자가 교구 목회자가 되게 해서 그리스도 곁에서 그의 양 무리들 속에 거하게 하라. 12.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에게 전유에 대한 인준을 받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이의 제기에 관해 로마 교황의 인준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정도 외에 타당하지 않다고 종종 언급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황이 하는 일을 무엇이든지 인가하신다고 믿는 것은 신앙의 일이 아니다. 그러면 교황은 죄를 범할 가능성이 없는 지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교황이 전유를 허가했다면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허가일 뿐이다. 13. 몇몇 신자들은 이 점에서 로마 교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다만 신앙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에 우선하는 하나님으로 믿는다. 그리고 악명 높은 흠이 지적되고 밝히 드러날 때 이들은 대담하게 “교황이나 다른 이가 이것을 제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악하다”라고 말한다. 만약 교황이 뻔뻔하게 잘못을 계속 저지른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 베드로의 좁은 길에서 이탈한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될 것이다. 14. 여기서는 교구원이 십일조를 부당하게 철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검토해 보자. 다음에 경우는 십일조를 성직자들에게 주어야 한다. 성직자들이 성실히 교구를 섬기고 있으며 그들이 곤궁하다는 점이 분명히 알려진 경우이다. 반면 그 외의 경우에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셨기에 개인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5. 그리스도의 청빈을 따르는 교구 목회자들은 십일조를 적당하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남는 부분을 곤궁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목회자의 수입에 대한 분류에는 반대한다. 첫째,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십일조와 헌금의 일부를 적당하게 취해야 한다. 둘째, 성직자들은 주위의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들에게 그 일부를 신중하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유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넷째, 자신들의 집수리와 적절한 관리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분류에는 뱀의 교묘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구 목회자는 그의 직무에 필수적인 음식과 옷만을 갖고, 이와 같은 경박하고 유해한 전통들을 버려야 한다. 16. 이러한 사람의 법과 악마의 술수에서 자라온 죄의 뿌리들을 검토하는 것이 이제 우리가 할 일이다. 고위 성직자는 자신의 성직록이 비대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매년 탕진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자랑한다는 것은 루시퍼와 같은 허영심의 징조이다. 이러한 허영심을 물리치기 위해 그들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성실한 결산을 드릴 의무가 있다는 점을 신중히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교구 목회자들이 연회에서 방탕하지 않도록 그리고 교인의 빈약한 구제품을 개인적인 용도로 오용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고삐가 될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교구 목회자들은 과다한 세속의 소유들로 과도하게 자신들을 치장하고 있다. 이들은 복음 설교와 교구원을 위한 간구의 기도에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교구 목회자들은 과부와 가난한 교인들에게서 넉넉하지 못한 수입을 받는 것을 신앙의 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 집단들, 즉 감독, 수도사, 참사회원, 탁발 수도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는 연회와 치장을 위해 가난한 교인들의 구제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관해 만야 청빈한 고위 성직자가 사악한 허영심으로 눈멀지 않았다면 그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힐 것이다. 17. 교구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영혼의 세 대적들과의 싸움의 모본이 되어야 하는가? 음욕에 관해 소위 소수의 교구 목회자들은 교구 교회 하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회에 딸린 예배당을 소유하거나 함께 체류하든지 따로 호화롭게 살든지 교구의 재정으로 충분히 지원을 받는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며, 부부관계를 넘어서 노골적인 간음을 행하며 산다. 이는 교인이든 목회자이든 동일하게 혐오해야할 죄임에도 분명하다. 교인들은 이러한 사제들의 미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와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극도의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극악한 범죄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교인들은 그에게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 한다. … 그는 자신의 연인을 지원해 호사한 옷과 은금의 세공품으로 치장하며 돌아다니게 할 것이다. 음욕으로 창녀에게 빠지기 위해 가난한 교구원들의 십일조를 탈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런 형국인데도 자신의 영혼과 교인의 영호의 구원을 위해 목회직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는 묻는다. 그러한 목회자의 양심은 오히려 강탈자의 양심이지 않겠는가? 확실히 그런 자는 탐욕스러운 늑대이며 심지어 몸과 영혼의 구원을 명분으로 순진한 양들을 교살하는 자다. 이러한 지적은 가난한 교인들에게서 구제를 확보하고 다른 성직록이나 특권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을 서성이거나, 자신의 교구를 벗어나 런던이나 다른 음탕한 곳에서 살면서 자신의 가난한 교인들에게서 받은 것으로 먹고사는 목회자에게도, 인문학과 법학에 관계하는 목회자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훈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동일하다. 교구원들은 소위 목회자라고 불리는 자의 일탈을 옹호하거나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의 구제를 철회하는 것이 허용된다. 18.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뜻과 인간의 뜻에 따르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보다 자신들의 가족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요, 성직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그들로 성직 매매의 방식으로 다수의 교회직을 추구하게 한다. 19. 고위 성직자들이 세상의 화려함과 탐욕으로 어떻게 오염되는가? 그들은 감히 가난한 자들의 소유로써 타락한 자들을 먹여서 그들을 세상의 눈에 부유한 자들이 되게 하고, 그들은 배우가 되어서 목회자들이 후히 베푸는 자임을 공개적으로 외친다.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는 교인들에게서 필요한 것을 받지만,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첫댓글
선생님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직론을 제가 요약한 파일이 사라졌어요. 따라서 급히 감상문의 요약으로 대처하여 올렸습니다.
일단은 알겠고, 강의내용은 좀더 성실히 네 것으로 정리해 올리면 좋겠다. 재밌는 발상이긴 해. 하지만 불결 - 더러움도 역시 죄로 되어 있지. 성경에 ~ㅋㅋ 그렇다면 첫째 설정은 성경에 무지한 자의 억지 주장이겠지. 우리가 어떤 의문제기와 그것에 따른 설정들을 할 때에도 당연히 그것이 타당한지 따져봐야 해. 암튼 첫 설정에 대한 반대 논리를 전개한 내용은 설득력이 있다고 봐. 물론 항상 모든 것들은 한 목적을 갖고 있지.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많은 사람들이 의미만 통한다면 사실 여부에 관계하지 않고 주장을 펴 나가고, 상식선의 이야기를 지루하고 길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상진은 목적은 편집되기 쉬우니 늘 사실 여
부를 따져보고 사실인 한에서 논리를 전개했으면 좋겠다. 수고~^^
선생님, 수정하였습니다. 특히 '무지한 자의 억지 주장'에 관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