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의 유파
하남성 온현 가구 '진가태극권'(陳家太極拳)은 오랫동안 진씨 일족 외에는 가르치지 않는 문외불출(門外不出)의 비전(秘傳)으로만 전승되었다. 그러나 14대 진장흥(陳長興)때 진씨 가문이 경영하는 약재상에 하인으로 고용된, 하북성 영년현 출신의 양로선(楊露禪)이 진장흥으로부터 진가태극권의 전통 투로(套路)인 노가식(老架式)을 배우고, 나중에 북경으로 나가 황족․문인․학자들을 위시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양로선에서 시작되어 양씨 가문에서 전한 태극권을 '양가태극권'(楊家太極拳)이라고 불렀는데, 양로선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람은 둘째 아들 반후(班侯)와 셋째 아들 건후(健侯), 그리고 같은 마을 사람인 무양(武禹襄) 등이 있었다. 무우양은 다시 진가구의 진청평(陳靑萍)에게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 '무가태극권'(武家太極拳)을 제정하고 조카인 이역여(李亦畬)에게 전하였으며, 이역여로부터 배운 학위진(郝爲眞)은 '학가태극권'(郝家太極拳)의 종사가 되었다. 또한 당시 형의권과 팔괘장의 명수였던 손록당(孫祿堂)은 학위진에게 배운 태극권을 개량하여 '손가 태극권'(孫家太極拳)을 제정했다. 그리고 양로선과 차남 양반후로부터 태극권을 배운 황실의 호위 전우(全佑)는 아들인 오감천(吳鑑泉)에게 전하여 '오가태극권'(吳家太極拳)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 태극권의 여러 유파가 형성되었는데, 태극권의 본질적 내용은 일치하지만 각 유파마다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개성 있는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태극권의 '4대 유파'라고 하면 진가태극권, 양가태극권, 오가태극권, 손가태극권을 꼽고, '5대 유파'라고 하면 여기에 무가태극권을 덧붙여 일컫는다.(박재홍, 1997)
①진식태극권(陳式太極拳)
13세 투로의 신가는 14대의 진유본(陣有本)이 개정한 것이다. 진유본의 생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장흥과 같은 학렬이다. 진장흥은 건륭 36년(AD1-1년)에 태어나 함 풍3년(AD 1853년)까지 83년 동안 살았으니 진유본의 연대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소가는 15대 진청평(陳淸蓱)이 개정하였다. 진청평은 건륭 60년(AD1795년)에 태어나 동치(同治) 7년(AD1868년)까지 74년을 살았는데, 진장흥과 진유본보다 20세쯤 아래였다. 진청평은 진유본에게서 신가를 배우고 이를 개정하여 소가로 만들었다. 따라서 소가는 신가의 제2의 투로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진청평은 인근의 조보징(趙堡鎭)에 데릴사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권을 가르쳤다. 소가는 조보진 일대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조보가(趙堡架)라 불리기도 한다.
원래 정형화한 가식으로 신가가 있었기 때문에 진장흥이 전한 것은 노가라 불리게 되었다. 또 대가라는 명칭은 가식이 커서 가식이 강조되고 작은 것과 구별된다는 뜻에서 나왔다. 진장흥 계열에서 전한 것은 노가 계통의 두투 13세와 이투 포추로서 대가이다. 진유본 계열에서 전한 것은 신가 계통으로 역시 두투 13세이며 대가이다. 진청평 계열에서 전한 것은 신가의 소가 계통이며, 두투 13세의 제2투로의 가식으로 간략하게 소가로 칭한다. 태극권의 이투인 포추는 정형화한 이후에 개정되지 않았고, 오직 진장흥 계열에서 전한 이투 포추 한 종류뿐이다. 포추는 동작이 복잡하고 빠른데다가 도약하고 발경하는 것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태극권으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진가태극권은 14대 진장흥이 외부인인 양로선을 제자로 받아들여 양가태극권이 형성되는 기틀을 마련하고, 양로선에게서 노가를 배우고 다시 15대 진청평에게 소가를 배운 무우양이 무가태극권을, 전우가 오가태극권을 각각 창시하고, 무가태극권을 전수받은 학위진이 손록당에게 무가태극권을 전수하여 손가태극권을 창시하여 각각 하나의 유파로 성장하여 전파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진가태극권도 15대 진청평이 조보진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곳에서 소가를 가르쳐 외부에서 진가태극권이 전파되는 기틀을 만든 이래로 각지에서 진가태극권이 전파되고 있다. 16대의 진영희(陳延熙)는 진발과(陳發科)의 아버지로 진장흥 계열의 노가의 전승자이다. 진연희는 원세개(袁世凱)의 아들에게 6년간 태극권을 가르치고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17대의 진발과는 북경에서 노가와 포추를 전수하였다. 중국 전역 및 세계 각지의 노가와 포추의 전파는 이 부자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유본 계열의 신가를 전파한 주요 인물은 진흠과 진자명이다. 16대의 진흠은 태극권의 거작인 <진씨태극권도설>을 지어 진가태극권을 널리 알렸으며, 17대의 진자명은 개봉(開封)등지에서 태극권을 전수하고 <진씨세전태극권술>을 지어 신가를 간명하게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진가태극권의 전파는 중국 대륙의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 사승계보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지를 만들어 나갔다. 그 가운데 노가의 대표적인 전승자로 북경에서 활발한 전수 활동을 벌이고 있는 풍지강(馮志强)이 있다. 풍지강은 대중 보급형으로 24식 혼원심의 태극권을 전수하고 있다. 또한 진가구에서는 태극권 학교를 설립하여 외국인과 외지인에게 진가태극권을 전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서도 여러 명이 이곳에서 진가태극권을 배워왔다. 진가구의 19대 전인인 진소왕(陳小旺)은 현재 해외에서 활발한 보급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가식은 조보가 혹은 홀뢰가(忽雷架) 등의 다른 명칭으로도 불리며 역시 적잖은 전승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대사건으로 인하여 무술계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저명한 무술가들이 투옥되거나 홍위병에게 피해를 당하여 죽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 근래들어 중국 무술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광범위하게 퍼진 양가태극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승자가 적은 진가태극권 역시 전란을 피해 대만으로 건너간 일부 전승자에 의해서 대만에도 전수되었다. 진가태극권을 대만에 전파한 주요 인물과 그들의 사승(師承)관계는 다음과 같다.
○ 두육택[杜毓澤: 자는 제민(濟民)]
하남성 박애현(博愛縣) 사람으로 먼저 진연희에게서 노가를 배웠다.
○ 곽청산[郭靑山: 자는 영지(迎之)]
하남성 온현 북관(北關)사람으로 진성삼(陳省三)에게서 신가를 배웠다.
○ 왕진양[王晉讓: 자는 손보(遜甫)]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사람으로 진응덕(陳應德)에게서 소가를 배웠다.
○ 왕몽필[王夢弼: 자는 모소(慕召)]
하남성 박애현 사람으로 진발과에게서 노가를 배웠다.
○ 왕학림(王鶴林)
하남성 박애현 사람으로 진발과에게서 노가를 배웠다.
○ 반영주[潘詠周: 자는 작민(作民)]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사람으로 진발과에게서 노가를 배웠다.
진가태극권의 노가․포추․신가․소가 모두 구색을 갖추었고, 이 문하에서 적잖은 전승자가 배출되었다.(박종구 밝은빛태극권, 저자)
②양식태극권(楊式太極拳)
하북 영연(永年)사람인 양로선(楊露禪)은 어렸을 때 하남 오현(溫縣) 진가구(陳家構)로 가서 일을 하며 진식(陳氏) 14대인 진장흥(陳長興)으로부터 태극권을 배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무하청(武河淸)의 추천으로 북경에서 무술을 가르치며 수많은 명수들과 대적하여 모두 물리치니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고, 후에는 청(淸)나라의 궁왕(宮王)에서 무술을 가르치는 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무술을 배우는 사람이 대부분 귀족의 자제로서 그들의 체질이 연약하여 그에 알맞도록 권가(拳架)를 수정하여 지도하였다. 즉 본래의 진식태극권 투로 중 전사경과 뛰고 달리며 도약하거나 발경(發勁)을 요하는 등 난이도가 높은 동작들을 비교적 단순하고 부드럽게 개조하여 종횡으로 뛰거나 도약하는 동작이 없도록 재구성하였다. 후에 그의 셋째아들 양건후(楊健侯)의 수정을 거쳐서 무가식(中架式)이 되었고, 그의 손자인 양징보(楊澄甫)의 수정을 통해서 요즘 널리 유행하고 있는 양식태극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식태극권의 특징은 그 권가가 전체적으로 크고 넓게 펼치는 동작을 위주로 하나 강함과 부드러움을 담고 있고 부드럽게 단련하여 강함을 이룰 수 있어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는 외유내강의 품격을 이룬다(안진수, 2003).
③오식태극권(吳式太極拳)
오감천(吳鑒泉,1870-1942)에 의해 전해진 태극권을 오식태극권이라 한다. 황실의 호위로 있던 만주족인 전우(全佑)가 양로선에게서 대가식(大架式)을 배우고, 나중에 그의 아들 양반후에게서 소가식(小架式)을 배워 발전시켰으며, 전우의 아들인 감청에 의해 완성되었다. 감천은 후에 한족의 성을 따라 오감천으로 개명하였으므로 오식태극권이라 한다. 오식태극권의 특징은 부드러움으로 그 명성이 높으며, 추수를 할 때는 고요함을 지키면서도 움직임을 잊지 않으며, 가식(架式)의 크기가 적당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치밀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④무식태극권(武式太極拳)
청나라 말 하북 영연 사람인 무양(武禹襄,1812-1880)은 양로선에게 대가식(大架式)을 배우고 후에 진씨 15대인 진정평에게서 소가식(小架式)을 배웠으며, 그가 두 가지를 연구 발전시킨 권술을 무식 태극권이라 한다. 무우양은 그의 조카인 이역여(李亦畬, 1832-1892)에게 전수하였고, 이역여는 다시 학위진(郝爲眞, 1849-1920)에게 가르쳤고, 학위진은 그의 아들 월여(月如)와 소여(少如)에게 전수하였다, 그 후 월여가 직업적으로 권법을 가르치게 됨에 따라 무식 태극권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역여와 학위진의 권법을 이씨태극권(李氏太極拳) 또는 학씨태극권(郝氏太極拳)이라 한다. 무식태극권의 특징은 동작이 가볍고 재빠르며, 보법이 민첩하고 구성이 치밀하고 아름답다.
⑤손식태극권(孫式太極拳)
청나라 말 하북 사람인 손록당(孫祿當)은 북경에서 팔괘장(八卦掌)과 형의권(形意拳)으로 유명한 고수였다. 무식 태극권의 전인(傳人)학위진이 북경에 왔다가 큰 병을 앓게 되었는데, 손록당의 도움으로 쾌유할 수 있었다. 학위진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손록당에게 무식태극권을 전수해 주었고, 손록당은 형의권, 팔괘장, 무식태극권을 하나로 융화시켜서 손식태극권을 창시하였다. 손식태극권의 특징은 개합(開合)이 신속하고 권가가 높으며 보법이 활달한 독특한 품격을 지닌다.
⑥정자태극권(鄭子太極拳)
절강성 영가현 사람인 정만청(鄭曼靑)은 양식태극권의 3대 양등보(楊登甫)로부터 태극권을 전수받았다. 1938년 봄 정만청이 호남성 국술원 관장으로 재직할 때 중국무술이 호남성 전지역의 대중운동으로 이루어지자 태극권을 보급하게 되었는데, 2개월마다 각 현의 관장 및 사범 40명에게 태극권을 가르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양가 108식의 태극권을 압축, 요약하고 보법격식(步法格式) 자신의 연구를 추가 발전시켜 37식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양가간이태극권(楊家簡易太極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후에 대만으로 건너가 태극권을 널리 보급하였으며,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미국, 유럽 등 세계각지로 널리 전파되면서 정자태극권이라는 독자적인 문파로 형성이 되었다. 정자태극권의 특징은 동작이 섬세(纖細), 우월하고 지대한 탄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권가(拳架)가 기공수련 및 채용에 있어 효율적이다(안진수, 2003).
<동양의 치유 움직임 비교 연구/ 이재아 경희대학교 대학원 무용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