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77)
딸 1주기
주말에는 장산 숲속 길을 자주 걷는다. 하루는 걷다가 쉬는데 안면 있는 중년 여성 한 분을 만났다.
“잘 지내시지요?”
“아, 원장님~” 하면서 이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딸을 대장암으로 잃었습니다. 부산의 작은 회사에 다녔지요. 하루는 복통이 심해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었는데 일주일 뒤에 외래진찰실로 오라고 했지만 회사일이 바빠 가지 못했지요.
두 달 후에 가니 위통이 호전되었다며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대장암은 CT 검사나 대장내시경을 하지 않으면 진단을 거의 못한다). 6개월 후에 하혈이 있어 가까운 내과에 가서 검사하니 산부인과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초음파검사를 해보더니 자궁 주위는 무관한데 자궁 아래 대장 쪽에 덩어리가 보여 대장검사를 추천했습니다. 서울에서 정밀검사를 해보니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늘 근무 마치면 회식을 했고 하루도 술을 안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 없을 정도였어요. 수술했는데 태아 크기만 한 혹을 제거했지요. 회사에서 배려해 주어 직장을 다니며 항암치료를 했습니다.
딸은 천성이 낙천적이고 성격이 밝아 치료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친구들과 며칠씩 놀러 다니곤 했습니다. 딸이 치료받던 서울의 암센터에 가니 의외로 젊은 환자들도 많아 놀랐습니다. 딸은 그런 와중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투병 중 통증이 심할 때마다 ‘엄마, 나 이제 그만 살면 안 좋은 데 가나?’ 하고 종종 물었어요. 저는 절에 다닙니다. 딸에게 ‘자살하면 지옥불에 던져진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마라’라고 말했지요. 그 당시에 딸의 친구가 암 치료 중 자살을 했는데 모습이 아주 평안해 보였다고 합니다. 투병 중 진통제를 써도 통증이 심했습니다. 암에 안 좋을까 봐 식탁에 육고기를 올리지 않았는데 딸이 화를 내었어요. ‘엄마,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 거라고 고기를 올리지 않았어요? 쇠고기 등 맛있는 것 다 먹고 죽고 싶으니 맛있는 것 다 해주세요.’
서울의 병원에 가니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하더군요. ‘엄마, 이제 가야겠어요. 힘들어 도저히 못 살겠어요. 엄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제사를 꼭 지내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피자, 치킨, 쇠고기 등 음식을 꼭 제사상에 올려주세요.’ 자녀 제사를 지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딸이 하도 당부를 하길래 1주기 때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딸의 소원대로 준비해두니 남편이 무슨 제사상을 이렇게 차렸냐고 크게 화를 내며 상을 뒤엎으려고 하더군요. ‘여보, 딸이 원해서 이러니 꼭 해줍시다.’
딸은 짧고 굵게 살다 갔습니다. 암환자 엄마가 겪는 큰 고통을 제겐 많이 주지 않고 갔어요. 원장님에게 말을 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후련합니다. 딸이 가면서 ‘엄마, 나 죽어도 엄마는 예전대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세요’라고 해서 딸 1주기가 되기 전에 여행도 몇 번 다녀왔습니다. 딸 제사는 내 살아생전에는 꼭 지내주려고 합니다. 딸을 좋아한 남자가 있었는데 딸 쪽에서 이제 그만 만나자고 잘랐다고 합니다. 그 남자도 후에 사정을 자세히 전해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24세에 입사하여 직장일로 자주 술을 마셨고 제대로 된 건강검진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큰 사업장에서는 아주 까다롭게 건강검진을 강제하는데 딸 회사는 소규모라 건강검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넘어갔다고 합니다.”
젊다고 암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젊다고 공단에서 시행하는 건강검진을 미루지 말자. 암이 4기가 될 때까지 몸에서 꾸준히 위험신호를 보냈을 텐데 그런 전구증상을 무시하고 몸을 혹사한 것이 이런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 건강검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수십만 원어치 가치가 있고 많은 병을 사전에 걸러내며 암 조기 발견율도 높다. 대변검사나 대장검사를 한 번이라도 해보았으면 대장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맺힌 슬픔은 쏟아내어야 병이 되지 않는다.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 딸과의 인연이 여기까지였던가.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딸을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던가.
중년 부인은 딸이 사랑하던 반려견 해피(Happy)를 데리고 오늘도 장산을 오르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