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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곤(坤)
坤은 元하고 亨하고 利하고 牝馬之貞이니,
곤(坤)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암말의 정(貞)함이니,
【本義】 坤은 元亨하고 利牝馬之貞이니,
【본의】 곤(坤)은 크게 형통하고 암말의 정(貞)함이 이로우니,
【傳】 坤은 乾之對也라 四德同而貞體則異라 乾은 以剛固爲貞이요 坤則[一作以]柔順而[一作爲] 貞이라 牝馬는 柔順而健行이라 故로 取其象曰牝馬之貞이라 하니라.
곤괘(坤卦)는 건괘(乾卦)의 상대이다. 사덕(四德)은 같으나 정(貞)의 체(體)는 다르다. 건괘(乾卦)는 강고(剛固)를 정(貞)으로 삼고, 곤괘(坤卦)는 유순하여 정(貞)하다. 암말은 유순하고 굳건히 걸어간다. 그러므로 그 상(象)을 취하기를 ‘암말의 정(貞)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君子의 有攸往이니라.
군자(君子)의 갈 바를 둠이다.
【本義】 君子有攸往인댄
【본의】 군자(君子)가 갈 바가 있을진대
【傳】 君子所行이 柔順而利且貞하니 合坤德也라.
군자(君子)의 행하는 바가 유순하고 이롭고 또 정(貞)하니, 곤(坤)의 덕(德)에 합한다.
先하면 迷하고 後하면 得하리니 主利하니라.
먼저 하면 혼미하고 뒤에 하면 얻으리니, 이로움을 주장한다.
【本義】 得하여 主利하니,
【본의】 얻어 이로움을 주장하니,
【傳】 陰은 從陽者也니 待唱而和하나니 陰而先陽이면 則爲迷錯이요 居後라야 乃得其常也라 主利는 利萬物則主於坤이니 生成이 皆地之功也라 臣道亦然하니 君令臣行하여 勞於事者는 臣之職也라.
음(陰)은 양(陽)을 따르는 것으로 선창하기를 기다려 화답하니, 음(陰)이 양(陽)보다 먼저 하면 혼미하고 어그러짐이 되고, 뒤에 처하여야 떳떳함을 얻는다. ‘주리(主利)’는 만물을 이롭게 하여 곤(坤)을 주장하니, 생성이 모두 땅의 공(功)이다. 신하의 도리 역시 그러하니, 인군은 명령하고 신하는 이행하여 일에 수고로운 것은 신하의 직분이다.
西南은 得朋이요 東北은 喪朋이니 安貞하여 吉하니라.
서쪽과 남쪽은 벗을 얻고 동쪽과 북쪽은 벗을 잃을 것이니, 안정(安貞)하여 길(吉)하다.
【本義】 安貞하면 吉하리라.
【본의】 정(貞)을 편안히 여기면 길(吉)하리라.
【傳】 西南은 陰方이요 東北은 陽方이라 陰必從陽하니 離喪其朋類라야 乃能成化育之功而有安貞之吉이라 得其常則安이요 安於常則貞이라 是以吉也라.
서쪽과 남쪽은 음(陰)의 방위이고, 동쪽과 북쪽은 양(陽)의 방위이다. 음(陰)은 반드시 양(陽)을 따르니, 그 붕류(朋類)를 잃어야만 만물을 만들어 자라게 하는 공을 이루어서 안정(安貞)의 길함이 있을 수 있다. 떳떳함을 얻으면 편안하고, 떳떳함을 편안히 여기면 정(貞)하다.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本義】 ⚋者는 偶也니 陰之數也요 坤者는 順也니 陰之性也라 註中者는 三畫卦之名也요 經中者는 六畫卦之名也라 陰之成形이 莫大於地하니 此卦三畫 皆偶라 故로 名坤而象地요 重之又得坤焉이면 則是陰之純, 順之至라 故로 其名與象이 皆不易也라 牝馬는 順而健行者라 陽先, 陰後하고 陽主義, 陰主利라 西南은 陰方이요 東北은 陽方이라 安은 順之爲也요 貞은 健之守也라 遇此卦者는 其占이 爲大亨而利以順健爲正이니 如有所往이면 則先迷後得而主於利리니 往西南則得朋하고 往東北則喪朋이니 大抵能安於正則吉也라.
⚋는 짝수이니 음(陰)의 수(數)이며, 곤(坤)은 순하니 음(陰)의 성질이다. 주(註) 가운데의 것은 3획괘의 이름이고 경(經) 가운데의 것은 6획괘의 이름이다. 음(陰)이 형체를 이룬 것이 땅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 괘(卦)의 3획은 모두 짝수이다. 그러므로 곤(坤)이라고 이름하여 땅을 상징하였고, 이를 거듭하여 또 곤(坤)을 얻으면 이는 음(陰)이 순수하고 순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과 상(象)이 모두 바뀌지 않은 것이다.
암말은 순하고 굳건히 걸어가는 것이다. 양(陽)은 먼저이고 음(陰)은 뒤이며, 양(陽)은 의로움을 주장하고 음(陰)은 이로움을 주장한다. 서쪽과 남쪽은 음(陰)의 방위이고, 동쪽과 북쪽은 양(陽)의 방위이다. 안(安)은 순함이 하는 것이요, 정(貞)은 굳셈을 지키는 것이다. 이 괘(卦)를 만난 이는 그 점(占)이 크게 형통하고 굳셈을 순종함으로써 정도(正道)를 삼는 것이 이로우니, 만약 가는 바가 있을진댄 먼저 하면 혼미하고 뒤에 하면 얻어서 이로움을 주장할 것이다. 서남(西南)으로 가면 벗을 얻고 동북(東北)으로 가면 벗을 잃을 것이니, 대저 정도(正道)를 편안히 하면 길할 것이다.
彖曰 至哉라 坤元이여 萬物이 資生하나니 乃順承天이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지극하다, 곤(坤)의 원(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생겨나니, 이에 순히 하늘을 받드니,
【本義】 此는 以地道로 明坤之義而首言元也라 至는 極也니 比大면 義差緩이라 始者는 氣之始요 生者는 形之始라 順承天施는 地之道也라.
이는 땅의 도(道)로써 곤(坤)의 뜻을 밝히면서 먼저 원(元)을 말한 것이다. 지(至)는 지극함이니, 대(大)와 비교하면 뜻이 다소 느슨하다. 시(始)는 기운의 시작이요, 생(生)은 형체의 시작이다. 하늘의 시행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땅의 도리이다.
坤厚載物이 德合无疆하며,
곤(坤)의 두터움이 물건을 실음은 덕(德)이 무강(无疆)에 합하며,
【傳】 資生之道 可謂大矣로되 乾旣稱大라 故로 坤稱至하니 至義差緩하여 不若大之盛也니 聖人이 於尊卑之辨에 謹嚴如此하시니라 萬物이 資乾以始하고 資坤以生하니 父母之道也라 順承天施하여 以成其功하니 坤之厚德이 持載萬物은 合於乾之无疆也라.
의뢰하여 생겨나는 도(道)는 크다고 말할 만하나, 건(乾)을 이미 크다고 칭하였으므로 곤(坤)은 지극하다고 칭하였으니, 지(至)는 뜻이 다소 느슨하여 대(大)처럼 성(盛)하지 못하다. 성인(聖人)이 존(尊)·비(卑)의 분별에 있어서 근엄함이 이와 같다. 만물이 건(乾)에 의뢰하여 시작하고 곤(坤)에 의뢰하여 생겨나니, 부모(父母)의 도(道)이다. 하늘의 시행을 순순히 따라 공을 이루니, 곤(坤)의 후한 덕(德)이 만물을 잡아 실어 줌은 건(乾)의 무강(无疆)에 합한다.
含弘光大하여 品物이 咸亨하나니라.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위대하여 만물이 다 형통하다.
【本義】 言亨也라 德合无疆은 謂配乾也라.
형(亨)을 말한 것이다. 덕(德)이 무강(无疆)에 합한다는 것은 건괘(乾卦)와 배합함을 말한다.
牝馬는 地類니 行地无疆하며 柔順利貞이 君子攸行이라.
암말은 땅의 부류이니, 땅을 걸어감이 끝이 없으며 유순하고 이정(利貞)함이 군자(君子)의 행하는 바이다.
【傳】 以含弘光大四者로 形容坤道하니 猶乾之剛健中正純粹也라 含은 包容也요 弘은 寬裕也요 光은 昭明也요 大는 博厚也니 有此四者라 故로 能成承[一作順]天之功하여 品物[一作類]이 咸得亨遂라 取牝馬爲象者는 以其柔順而健行하여 地之類也라 行地无疆은 謂健也라 乾健坤順하니 坤亦健乎아 曰 非健이면 何以配乾이리오 未有乾行而坤止也라 其動也剛하나 不害其爲柔也라 柔順而利貞이 乃坤德也니 君子之所行也라 君子之道合坤德也라.
함(含)·홍(弘)·광(光)·대(大) 네 가지로 곤도(坤道)를 형용하였으니, 건괘(乾卦)의 강(剛)·건(健)·중(中)·정(正)·순(純)·수(粹)와 같다. 함(含)은 포용함이요, 홍(弘)은 너그러움이요, 광(光)은 밝게 빛남이요, 대(大)는 넓고 두터움이니, 이 네 가지가 있으므로 능히 하늘을 받드는 공용(功用)을 이루어서 만물이 모두 형통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암말을 취하여 상(象)으로 삼은 것은 유순하고 굳건히 걸어가서 땅의 부류이기 때문이다. ‘행지무강(行地无疆)’은 굳셈을 말한 것이다.
“건(乾)은 굳세고 곤(坤)은 순한데, 곤(坤) 역시 굳세단 말입니까?”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굳세지 않으면 어떻게 건(乾)에 짝할 수 있겠는가. 건(乾)이 행하는데 곤(坤)이 멈추는 경우는 없다. 그 동함이 강(剛)하나 유순함이 됨에는 무방하다. 유순하고 이정(利貞)함이 곤(坤)의 덕(德)이니, 군자(君子)가 행하는 바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곤(坤)의 덕(德)에 합한다.”
【本義】 言利貞也라 馬는 乾之象而以爲地類者는 牝은 陰物而馬又行地之物也일새라 行地无疆은 則順而健矣요 柔順利貞은 坤之德也라 君子攸行은 人之所行이 如坤之德也라 所行如是면 則其占이 如下文所云也라.
이정(利貞)을 말한 것이다. 말은 건(乾)의 상(象)인데 땅의 부류라고 한 것은 암말은 음(陰)의 물건이고 말은 또 땅을 걸어가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땅을 걸어감이 끝이 없음은 순하고 굳센 것이고, 유순과 이정(利貞)은 곤(坤)의 덕(德)이다. 군자(君子)가 행하는 바란 것은 사람의 행하는 바가 곤(坤)의 덕(德)과 같은 것이다. 행하는 바가 이와 같으면 그 점(占)이 아랫글에서 말한 바와 같을 것이다.
先하면 迷하여 失道하고 後하면 順하여 得常하리니 西南得朋은 乃與類行이요 東北喪朋은 乃終有慶하리니,
먼저 하면 혼미하여 도(道)를 잃고 뒤에 하면 순하여 떳떳함을 얻으리니, 서남(西南)은 벗을 얻는다는 것은 동류(同類)와 함께 행함이요, 동북(東北)은 벗을 잃는다는 것은 마침내 경사가 있다는 것이다.
【本義】 東北喪朋이나,
【본의】 동북(東北)은 벗을 잃으나
【本義】 陽大陰小하여 陽得兼陰이나 陰不得兼陽이라 故로 坤之德이 常減於乾之半也라 東北은 雖喪朋이나 然反之西南이면 則終有慶矣리라.
양(陽)은 크고 음(陰)은 작아서 양(陽)은 음(陰)을 겸할 수 있으나 음(陰)은 양(陽)을 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곤(坤)의 덕(德)이 항상 건(乾)의 반으로 줄어든다. 동북(東北)은 비록 벗을 잃으나 서남(西南)으로 돌아온다면 끝내는 경사가 있을 것이다.
安貞之吉이 應地无疆이니라.
안정(安貞)의 길함이 땅의 무강(无疆)에 응한다.”
【傳】 乾之用은 陽之爲也요 坤之用은 陰之爲也라 形而上曰天地之道요 形而下曰陰陽之功이라 先迷後得以下는 言陰道也라 先唱則迷하여 失陰道하고 後和則順而得其常理라 西南은 陰方이니 從其類는 得朋也요 東北은 陽方이니 離其類는 喪朋也라 離其類而從陽이면 則能成生物之功하여 終有吉慶也라 與類行者는 本也요 從於陽者는 用也라 陰體柔躁라 故로 從於陽則能安貞而吉하여 應地道之无疆也니 陰而不安貞이면 豈能應地之道리오 彖有三无疆하니 蓋不同也라 德合无疆은 天之不已也요 應地无疆은 地之无窮也요 行地无疆은 馬之健行也라.
건(乾)의 쓰임은 양(陽)이 하는 것이고, 곤(坤)의 쓰임은 음(陰)이 하는 것이다. 형이상(形而上)을 천지(天地)의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음양(陰陽)의 공(功)이라 한다. ‘선미후득(先迷後得)’ 이하는 음(陰)의 도(道)를 말한 것이다. 선창하면 혼미하여 음도(陰道)를 잃고, 뒤에 화답하면 순하여 떳떳한 이치를 얻는다. 서남(西南)은 음(陰)의 방위이니 그 동류(同類)를 따름은 벗을 얻는 것이고, 동북(東北)은 양(陽)의 방위이니 그 동류(同類)를 떠남은 벗을 잃는 것이다. 그 동류(同類)를 떠나 양(陽)을 따르면 사물을 생성하는 공을 이룰 수 있어서 마침내는 길함과 경사가 있게 된다.
동류(同類)와 더불어 행하는 것은 근본이고, 양(陽)을 따르는 것은 쓰임이다. 음(陰)의 체(體)는 유순하고 조급하다. 그러므로 양(陽)을 따르면 능히 안정(安貞)하고 길하여 지도(地道)의 무강(无疆)함에 응한다. 음(陰)으로서 안정(安貞)하지 않으면 어찌 지도(地道)에 응할 수 있겠는가. 〈단전(彖傳)〉에 세 무강(无疆)이 있는데, 모두 같지 않다. ‘덕합무강(德合无疆)’은 하늘의 운행이 그치지 않음이고, ‘응지무강(應地无疆)’은 땅의 무궁함이고, ‘행지ㅣ무강(行之无疆)’은 말이 굳건히 걸어감이다.
【本義】 安而且貞이 地之德也라.
편안하고 또 정(貞)함이 땅의 덕(德)이다.
象曰 地勢坤이니 君子以하여 厚德으로 載物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지세(地勢)가 곤(坤)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후(厚)한 덕(德)으로 사물을 실어준다.”
【傳】 坤道之大猶乾也니 非聖人이면 孰能體之리오 地厚而其勢順傾이라 故로 取其順厚之象而云地勢坤也라 君子觀坤厚之象하여 以深厚之德으로 容載庶物하나니라.
곤도(坤道)의 위대함이 건(乾)과 같으니, 성인(聖人)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체행하겠는가. 땅이 두텁고 지형은 순히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순하고 두터운 상(象)을 취하여 지세(地勢)가 곤(坤)이라고 말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곤(坤)의 두터운 상(象)을 관찰하여 깊고 두터운 덕(德)으로 만물을 용납하여 실어준다.
【本義】 地는 坤之象이니 亦一而已라 故로 不言重而言其勢之順하니 則見其高下相因之无窮하여 至順極厚而无所不載也라.
땅은 곤(坤)의 상(象)이니, 역시 똑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중곤(重坤)’이라 말하지 않고 그 세(勢)가 순하다고만 말하였으니, 그 높고 낮음이 서로 인하여 다함이 없어서 지극히 순하고 지극히 후하여 싣지 않는 바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初六은 履霜하면 堅氷至하나니라.
초육(初六)은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
【傳】 陰爻稱六하니 陰之盛也라 八則陽生矣니 非純盛也라 陰始生於下하니 至微也로되 聖人이 於陰之始生에 以其將長으로 則爲之戒라 陰之始凝而爲霜하니 履霜則當知陰漸盛而至堅氷矣라 猶小人始雖甚微나 不可使長이니 長則至於盛也라.
음효(陰爻)를 육(六)이라 칭하니, 음(陰)이 성(盛)한 것이다. 팔(八)은 양(陽)이 생성한 것이니 순수하고 성(盛)한 것이 아니다.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니 지극히 미약하나, 성인(聖人)은 음(陰)이 처음 생겨날 때에 그 장차 자라날 것을 경계하였다. 음(陰)이 처음 응결(凝結)하여 서리가 되니, 서리를 밟으면 마땅히 음(陰)이 점점 성하여 단단한 얼음에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소인(小人)이 처음에는 비록 매우 미약하나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니, 자라나면 성(盛)함에 이르는 것과 같다.
【本義】 六은 陰爻之名이니 陰數는 六老而八少라 故로 謂陰爻爲六也라 霜은 陰氣所結이니 盛則水凍而爲氷이라 此爻는 陰始生於下하여 其端甚微로되 而其勢必盛이라 故로 其象이 如履霜則知堅氷之將至也라 夫陰陽者는 造化之本이니 不能相无요 而消長有常하니 亦非人所能損益也라 然이나 陽主生하고 陰主殺하니 則其類有淑慝之分焉이라 故로 聖人作易에 於其不能相无者엔 旣以健順仁義之屬明之하여 而无所偏主하고 至其消長之際, 淑慝之分하여는 則未嘗不致其扶陽抑陰之意焉하시니 蓋所以贊化育而參天地者니 其旨深矣라 不言其占者는 謹微之意 已可見於象中矣일새라.
육(六)은 음효(陰爻)의 이름이니, 음수(陰數)에서 육(六)은 노음(老陰)이고 팔(八)은 소음(少陰)이다. 그러므로 음효(陰爻)를 육(六)이라고 말한다. 서리는 음기(陰氣)가 맺힌 것이니, 성(盛)하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된다. 이 효(爻)는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서 그 단서가 매우 미약하나 그 기세는 반드시 성(盛)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이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장차 이르름을 아는 것과 같다.
무릇 음양(陰陽)은 조화의 근본이니 서로 없을 수 없고, 소장(消長)이 일정함이 있으니 역시 사람이 덜어내고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양(陽)은 생성을 주장하고 음(陰)은 죽임을 주장하니, 그렇다면 그 부류에 선악(善惡)의 분별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을 적에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에는 이미 건(健)·순(順)과 인(仁)·의(義)의 등속으로 이를 밝혀서 편벽되게 주장한 바가 없고, 소장(消長)의 실제와 선악(善惡)의 구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양(陽)을 붙들어주고 음(陰)을 억제하는 뜻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화육(化育)을 도와서 천지에 참여하는 것이니, 그 뜻이 깊다. 점(占)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은미함을 삼가는 뜻이 이미 상(象) 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이다.
象曰 履霜堅氷은 陰始凝也니 馴致其道하여 至堅氷也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는 것은 음(陰)이 처음 응결한 것이니, 그 도(道)를 순치(馴致)하여 단단한 얼음에 이른 것이다.”
【傳】 陰始凝而爲霜하니 漸盛則至於堅氷[一有也字]이라 小人雖微나 長則漸至於盛이라 故로 戒於初라 馴은 謂習이니 習而至於盛이니 習은 因循也라.
음(陰)이 처음 응결하여 서리가 되니 점점 성하게 되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 소인(小人)이 비록 미약하나 자라나면 점차 성(盛)함에 이르른다. 그러므로 초기에 경계한 것이다. 순(馴)은 익힘을 말하니 익혀서 성함에 이르름이니, 습(習)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本義】 按魏志에 作初六履霜하니 今當從之라 馴은 順習也라.
〈위지(魏志)〉를 상고해 보면 ‘초육이상(初六履霜)’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한다. 순(馴)은 순히 익힘이다.
六二는 直方大라 不習이라도 无不利하니라.
육이(六二)는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傳】 二는 陰位니 在下라 故로 爲坤之主라 統言坤道하니 中正在下는 地之道也라 以直方大三者로 形容其德用하니 盡地之道矣라 由直方大라 故로 不習而无所不利하니 不習은 謂其自然이니 在坤道則莫之爲而爲也요 在聖人則從容中道也라 直方大는 孟子所謂至大至剛以直也라 在坤體라 故로 以方易剛하니 猶貞加牝馬也라 言氣則先大하니 大는 氣之體也요 於坤則先直方하니 由直方而大也라 直方大는 足以盡地道하니 在人識之耳라 乾坤은 純體니 以位相應이로되 二는 坤之主라 故로 不取五應하니 不以君道處五也요 乾則二五相應하니라.
이(二)는 음(陰)의 자리이니, 아래에 있으므로 곤(坤)의 주체가 된다. 곤도(坤道)를 통합하여 말했으니, 중정(中正)하면서 아래에 있는 것은 땅의 도(道)이다. 직(直)·방(方)·대(大) 세 가지로써 그 덕(德)과 쓰임을 형용하였으니, 땅의 도(道)를 다하였다.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불습(不習)’은 자연함을 말한 것이니, 곤도(坤道)에 있어서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이요, 성인(聖人)에게 있어서는 종용히 도(道)에 맞는 것이다.
직(直)·방(方)·대(大)는 맹자(孟子)가 말씀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고 곧다.〔至大至剛以直〕”는 것이다. 곤체(坤體)에 있기 때문에 방자(方字)를 강자(剛字)와 바꿨으니, 정(貞)에 암말을 가(加)한 것과 같다. 기로 말하면 대(大)를 먼저 말하였으니 대(大)는 기운의 체(體)이고, 곤(坤)에서는 직(直)과 방(方)을 먼저 말하였으니 직(直)·방(方)으로 말미암아 커지기 때문이다. 직(直)·방(方)·대(大)는 땅의 도(道)를 다할 수 있으니, 사람이 이것을 앎에 달려있을 뿐이다. 건(乾)과 곤(坤)은 순체(純體)라서 자리로써 서로 응하는데, 이(二)는 곤(坤)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오(五)의 응을 취하지 않았으니, 군도(君道)로써 오(五)를 처우해 주지 않은 것이다. 건(乾)은 이(二)와 오(五)가 서로 응한다.
【本義】 柔順正固는 坤之直也요 賦形有定은 坤之方也요 德合无疆은 坤之大也라 六二柔順而中正하고 又得坤道之純者라 故로 其德이 內直外方而又盛大하여 不待學習而无不利하니 占者有其德이면 則其占如是也라.
유순하고 정고(正固)함은 곤(坤)의 곧음이요, 형체를 부여함에 일정함이 있는 것은 곤(坤)의 방정함이요, 덕(德)이 무강(无疆)에 합하는 것은 곤(坤)의 위대함이다. 육이효(六二爻)는 유순(柔順)하며 중정(中正)하고 또 곤도(坤道)의 순수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덕(德)이 안은 곧고 밖은 방정하며 또 성대하여 굳이 배워 익히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점치는 이가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 그 점(占)이 이와 같을 것이다.
象曰 六二之動이 直以方也니 不習无不利는 地道光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이(六二)의 동함이 곧고 방정하니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지도(地道)가 빛남이다.”
【傳】 承天而動은 直以方耳니 直方則大矣라 直方之義는 其大无窮이라 地道光顯하여 其功順成하니 豈習而後利哉리오.
하늘을 받들어 동함은 곧고 방정한 것이니, 곧고 방정하면 위대하다. 직(直)과 방(方)의 뜻은 그 큼이 무궁하므로 지도(地道)가 빛나 그 공이 순히 이루어지니, 어찌 익힌 뒤에야 이롭겠는가.
六三은 含章可貞이나 或從王事하면 无成有終하리라.
육삼(六三)은 아름다움을 머금음이 정(貞)할 수 있으나, 혹 왕사(王事)에 종사하면 이룸이 없어도 종말은 있다.
【本義】 含章可貞이나 或從王事하면 无成有終하리라.
【본의】 아름다움을 머금음이 정(貞)할 수 있으나, 혹 왕사(王事)에 종사하면 이룸은 없어도 종말은 있을 것이다.
【傳】 三居下之上하니 得位者也라 爲臣之道는 當含晦其章美하여 有善則歸之於君이라야 乃可常而得正이니 上无忌惡(오)之心하고 下得柔[一作恭]順之道也라 可貞은 謂可貞固守之요 又可以常久而无悔咎[一作吝]也라 或從上之事하여 不敢當其成功하고 唯奉事以守其終耳니 守職以終其事[一有者字]는 臣之道也라.
삼(三)은 하괘(下卦)의 윗자리에 있으니, 지위를 얻은 이다. 신하의 도리는 마땅히 아름다움을 머금고 감추어서 잘한 것이 있으면 군주에게 돌려야 떳떳하여 정도(正道)를 얻을 것이니, 윗사람은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고, 아랫사람은 유순한 도(道)를 얻는다. ‘가정(可貞)’은 정고(貞固)하게 지킬 수 있고 또 항상하고 오래하여도 뉘우침과 허물이 없을 수 있음을 이른다. 혹 윗사람의 일에 종사하여 감히 성공을 차지하지 않고 오직 받들어 끝마침을 지킬 뿐이니, 직분을 지켜 그 일을 끝마치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다.
【本義】 六陰三陽이니 內含章美하여 可貞以守라 然居下之上하여 不終含藏이라 故로 或時出而從上之事면 則始雖无成이나 而後必有終이니 爻有此象이라 故로 戒占者有此德則如此占也라.
육(六)은 음효(陰爻)이고 삼(三)은 양위(陽位)이니, 안에 아름다움을 머금어서 정고(貞固)히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하괘(下卦)의 윗자리에 거하여 끝내 머금고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혹 때로 나와서 윗사람의 일에 종사하면 처음에는 비록 성공이 없으나 뒤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을 것이니, 효(爻)에 이러한 상(象)이 있다. 그러므로 점치는 이에게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 이 점괘와 같다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含章可貞이나 以時發也요.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아름다움을 머금어 정(貞)할 수 있으나 때에 따라 발할 것이요,
【傳】 夫子懼人之守文而不達義也하여 又從而明之하시니라 言爲臣處下之道는 不當有其功善이요 必含晦其美라야 乃正而可常이라 然義所當爲者는 則以時而發이요 不有其功耳라 不失其宜는 乃以時也니 非含藏終不爲也라 含而不爲는 不盡忠者也라.
공자(孔子)는 사람들이 글을 지키기만 하고 뜻을 통달하지 못할까 저어하여, 다시 따라서 이것을 밝히신 것이다. 신하가 되어 아랫자리에 처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 공과 잘한 것을 차지하지 말고, 반드시 그 아름다움을 머금고 감추어야 정고(正固)하고 떳떳할 수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경우에는 때에 따라 발할 것이요, 다만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을 뿐이다. 마땅함을 잃지 않는 것은 때에 따라 하기 때문이니, 머금고 감추어 끝내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머금고 하지 않는 것은 충성을 다하지 않는 이이다.
或從王事는 知(智)光大也라.
혹 왕(王)의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지혜가 밝고 큰 것이다.”
【傳】 象은 只擧上句로되 解義則幷及下文하니 他卦皆然이라 或從王事而能无成有終者는 是其知之光大也니 唯其知之光大라 故로 能含晦라 淺暗之人은 有善이면 唯恐人之不知하나니 豈能含章也리오.
〈상전(象傳)〉은 다만 윗구절만 들었으나 뜻을 해석한 것은 아래 글까지 미쳤으니, 다른 괘(卦)도 모두 그러하다. 혹 왕사(王事)에 종사하여 이룸이 없고 종말이 있는 것은 그 지혜가 밝고 크기 때문이니, 오직 지혜가 밝고 크기 때문에 능히 머금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이 얕고 우매한 사람은 잘한 일이 있으면 행여 남이 알아주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어찌 아름다움을 머금을 수 있겠는가.
六四는 括囊이면 无咎며 无譽리라.
육사(六四)는 주머니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으며 칭찬도 없으리라.
【本義】 括囊이니
【본의】 주머니끈을 묶음이니
【傳】 四는 居近五之位而无相得之義하니 乃上下閉隔之時니 其自處以正은 危疑之地也라 若晦藏其知하여 如括結囊口而不露면 則可得无咎요 不然則有害也라 旣晦藏이면 則无譽矣리라.
사(四)는 오(五)와 가까운 자리에 있고 서로 얻는 뜻이 없으니, 바로 상하(上下)가 막혀있는 때이므로 정도(正道)로써 자처함은 위태롭고 의심받을 수 있는 처지이다. 만약 그 지혜를 감추어 주머니끈을 묶듯이 하여 드러내지 않는다면 허물이 없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해로움이 있을 것이다. 이미 감추어 숨는다면 칭찬이 없을 것이다.
【本義】 括囊은 言結囊口而不出也라 譽者는 過實之名이니 謹密如是면 則无咎而亦无譽矣리라 六四는 重陰不中이라 故로 其象占如此하니 蓋或事當謹密이어나 或時當隱遁也라.
‘괄낭(括囊)’은 주머니의 입을 묶어 나오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예(譽)는 실제보다 지나친 이름이니, 삼가하고 치밀함이 이와 같으면 허물도 없고 또한 칭찬도 없을 것이다. 육사효(六四爻)는 거듭된 음(陰)이고 중(中)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으니, 혹 일이 마땅히 삼가고 은밀해야 하거나 혹 때가 은둔할 때를 만난 경우이다.
象曰 括囊无咎는 愼不害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주머니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삼가면 해롭지 않은 것이다.”
【傳】 能愼如此면 則无害也라.
삼가기를 이와 같이 하면 해가 없다.
六五는 黃裳이면 元吉이리라.
육오(六五)는 황색(黃色) 치마처럼 하면 크게 길(吉)하리라.
【本義】 黃裳이니 元吉하니라.
【본의】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
【傳】 坤雖臣道나 五實君位라 故로 爲之戒云 黃裳元吉이라 하니 黃은 中色이요 裳은 下服이니 守中而居下면 則元吉이니 謂守其分也라 元은 大而善也라 爻象에 唯言守中居下則元吉이라 하니 不盡發其義也라 黃裳이 旣元吉이면 則居尊은 爲天下大凶을 可知라 後之人未達하여 則此義晦矣니 不得不辨也라 五는 尊位也니 在他卦엔 六居五가 或爲柔順하고 或爲文明하고 或爲暗弱이요 在坤則爲居尊位라 陰者는 臣道也요 婦道也니 臣居尊位는羿莽是也니 猶可言也어니와 婦居尊位는 女媧氏武氏是也니 非常之變[一作大]이니 不可言也라 故로 有黃裳之戒而不盡言也라 或疑在革엔 湯武之事도 猶盡言之어늘 獨於此不言은 何也오 曰 廢興은 理之常也요 以陰居尊位는 非常之變也라.
곤(坤)은 비록 신하의 도리이나 오(五)는 실로 군주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경계하기를 ‘황색 치마처럼 하면 크게 길하다’고 말하였으니, 황(黃)은 중앙의 색깔이요, 치마는 아래에 입는 옷이다. 중도(中道)를 지키고 아래에 거하면 크게 길할 것이니, 분수를 지킴을 말한 것이다. 원(元)은 크고 선(善)한 것이다. 효(爻)의 상(象)에 오직 ‘중도를 지키고 아래에 거하면 크게 길하다’고만 말하였으니, 그 뜻을 다 밝히지 않은 것이다. 황색 치마가 이미 크게 길하다면 존위(尊位)에 거함은 천하의 대흉(大凶)이 됨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사람들이 통달하지 못하여 이 뜻이 어두워졌으니,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오(五)는 존위(尊位)이니, 다른 괘(卦)에 있어서는 육(六)이 오(五)에 거함은 혹 유순함이 되고 혹 문명(文明)함이 되고 혹 어둡고 약함이 되나, 곤괘(坤卦)에 있어서는 존위(尊位)에 거함이 된다. 음(陰)은 신하의 도리이고, 부인의 도리이니, 신하가 존위(尊位)에 거한 것은 후예(后羿)와 왕망(王莽)이니 오히려 말할 수 있거니와, 부인이 존위(尊位)에 거한 것은 여와씨(女媧氏)와 무씨(武氏)가 이것이니, 비상한 변고라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황색치마의 경계만 있고 다 말하지 않은 것이다.
혹자가 “혁괘(革卦)에 있어서는 탕(湯)·무(武)의 일도 오히려 다 말하였는데 유독 곤괘(坤卦)에 있어서만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의심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라가 폐하고 흥함은 이치의 떳떳함이요, 음(陰)으로서 존위(尊位)에 거함은 떳떳하지 못한 변고이기 때문이다.”
【本義】 黃은 中色이요 裳은 下飾이라 六五以陰居尊하여 中順之德이 充諸內而見於外라 故로 其象如此而其占爲大善之吉也니 占者德必如是면 則其占亦如是矣리라 春秋傳에 南蒯將叛할새 筮得此爻하고 以爲大吉이라 한대 子服惠伯曰 忠信之事則可어니와 不然이면 必敗하리라 外强內溫이 忠也요 和以率貞이 信也라 故로 曰黃裳元吉이라 하니 黃은 中之色也요 裳은 下之飾也요 元은 善之長也라 中不忠이면 不得其色이요 下不共(恭)이면 不得其飾이요 事不善이면 不得其極이라 且夫易은 不可以占險이어늘 三者有闕하니 筮雖當이나 未也라 하더니 後에 蒯果敗하니 此可以見占法矣로다.
황(黃)은 중앙의 색이요, 치마는 아래의 꾸밈이다. 육오효(六五爻)가 음(陰)으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여 중순(中順)한 덕(德)이 내면에 충적되어서 외면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 상(象)이 이와 같고 그 점(占)이 크게 선(善)하여 길함이 되니, 점치는 이의 덕(德)이 반드시 이와 같으면 그 점(占) 또한 이러할 것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남괴(南蒯)가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할 적에 점을 쳐서 이 효(爻)를 얻고는 “크게 길하다.”고 말하니, 자복혜백(子服惠伯)이 말하기를 “충신(忠信)의 일이라면 괜찮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패한다. 밖은 강하고 안은 온순한 것이 충(忠)이요, 화(和)로써 정(貞)을 따름이 신(信)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황상원길(黃裳元吉)’이라고 하였으니, 황(黃)은 중앙의 색이요, 치마는 아래의 꾸밈이요,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중심(中心)이 불충(不忠)하면 그 색(色)을 얻지 못한 것이요, 아랫사람이 공손하지 않으면 그 꾸밈을 얻지 못한 것이요, 일이 선(善)하지 않으면 그 극(極)을 얻지 못한 것이다. 또 무릇 역(易)은 험한 것을 점쳐서는 안 되는데, 세 가지가 결함이 있으니, 점(占)이 비록 이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안 된다.” 하였는데, 뒤에 남괴(南蒯)가 과연 실패하였으니, 여기에서 점치는 법을 볼 수 있다.
象曰 黃裳元吉은 文在中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황상원길(黃裳元吉)’은 문(文)이 중(中)에 있는 것이다.”
【傳】 黃은 中之文이요 在中은 不過也라 內積至美而居下라 故로 爲元吉이라.
황(黃)은 중앙의 색이요, 중(中)에 있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음이다. 안으로 지극한 아름다움을 쌓고 아랫자리에 거하였으므로 ‘원길(元吉)’이라 한 것이다.
【本義】 文在中而見於外也라.
문(文)이 속에 있어서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上六은 龍戰于野하니 其血이 玄黃이로다.
상육(上六)은 용(龍)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
【傳】 陰은 從陽者也라 然이나 盛極則抗而爭이라 六旣極矣하니 復進不已則必戰이라 故로 云戰于野라 하니 野는 謂進至於外也라 旣敵矣면 必皆傷이라 故로 其血玄黃이라.
음(陰)은 양(陽)을 따르는 이다. 그러나 성(盛)함이 지극하면 항거하여 다툰다. 육(六)이 이미 극에 있으니, 다시 나아가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양(陽)과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들에서 싸운다고 말하였으니, 들은 나아가 밖에 이름을 말한다. 이미 양(陽)과 대적하면 반드시 모두 상한다. 그러므로 그 피가 검고 누른 것이다.
【本義】 陰盛之極하여 至與陽爭하여 兩敗俱傷하니 其象如此라 占者如是면 其凶可知라.
음(陰)의 성함이 지극하여 양(陽)과 다툼에 이르러 둘이 모두 패하고 상하니, 그 상(象)이 이와 같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으면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象曰 龍戰于野는 其道窮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용이 들에서 싸우는 것은 그 도(道)가 궁극한 것이다.”
【傳】 陰盛하여 至於窮極이면 則必爭而傷也라.
음(陰)이 성(盛)하여 궁극함에 이르면 반드시 다투어 상한다.
用六은 利永貞하니라.
육(六)을 씀은 영구(永久)하고 정고(貞固)함이 이롭다.
【傳】 坤之用六은 猶乾之用九하니 用陰之道也라 陰道柔而難常이라 故로 用六之道 利在常永貞固하니라.
곤괘(坤卦)의 용육(用六)은 건괘(乾卦)의 용구(用九)와 같으니, 음(陰)을 쓰는 방법이다. 음(陰)의 도(道)는 유순하여 일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육(六)을 쓰는 방법은 이로움이 상영(常永)하고 정고(貞固)함에 있다.
【本義】 用六은 言凡得陰爻者 皆用六而不用八하니 亦通例也라 以此卦純陰而居首라 故로 發之하니 遇此卦而六爻俱變者는 其占如此辭라 蓋陰柔而不能固守어늘 變而爲陽이면 則能永貞矣라 故로 戒占者以利永貞하니 卽乾之利貞也라 自坤而變이라 故로 不足於元亨云이라.
용육(用六)은 무릇 음효(陰爻)를 얻은 이는 모두 육(六)을 쓰고 팔(八)을 쓰지 않음을 말했으니, 역시 통례이다. 이 괘(卦)는 순음(純陰)이면서 처음에 거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밝힌 것이니, 이 괘(卦)를 만나고 육효(六爻)가 모두 변한 것은 그 점(占)이 이 말과 같다. 음유(陰柔)로서 굳게 지키지 못하는데, 변하여 양(陽)이 되면 영구(永久)하고 정고(貞固)할 것이다. 그러므로 점치는 이에게 ‘영구하고 정고함이 이롭다’고 경계하였으니, 건괘(乾卦)의 이정(利貞)과 같다. 곤(坤)으로부터 변하였으므로 원형(元亨)에는 부족한 것이다.
象曰 用六永貞은 以大終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용육영정(用六永貞)’은 종말을 크게 하는 것이다.”
【傳】 陰旣貞固不足이면 則不能永終이라 故로 用六之道는 利在盛大於終하니 能大於終이라야 乃永貞也라.
음(陰)이 이미 정고(貞固)함이 부족하면 영구히 끝마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용육(用六)의 도(道)는 이로움이 종말을 성대하게 함에 있는 것이니, 능히 종말을 성대하게 하여야 이에 영구하고 정고(貞固)할 수 있다.
【本義】 初陰後陽이라 故로 曰大終이라.
처음은 음(陰)이고 뒤에는 양(陽)이 되었다. 그러므로 종말을 크게 했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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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象曰 黃裳元吉은 文在中也라." 이것을 토정선생은 黃裳元吉 에서 裳 을 빼고 그 자리에 文在中也 에서 中 을 넣어놓으신 거지요.
裳 은 아랫도리 복장을 의미하는데 그 색깔이 천지현황의 황을 본받아서 색깔을 黃 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黃裳 이라고 한답니다. 윗도리는 衣 라고 하지요...이 색깔은 玄 으로 했답니다. 이 일을 한 사람이 황제라나 어쨌다나......뭐 그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