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암 고영화
2022년 9월 19일 오후 02:43 -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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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지세포 출항 대일(조선)외교관, 조신(曹伸)의 생애와 한문학. 1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조선초기 적암(適菴) 조신(曺伸 1454~1529)은 조선최고의 대일외교관이었던 이예(李藝 1373~1445)를 뒤이은 외교의 실무자로써 그 역할을 다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성종과 중종 년간에, 명나라는 물론 대일통신사의 통역과 기록을 담당하였고, 게다가 거제시 지세포를 일본국 출항지로 이용한 외교관 중에 한분이었다. 그리고 서자(庶子)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 전반을 치열하게 살다간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일본과 명나라 역관(譯官)으로 사신단 일행에 참여하였고, 조선시대 의료기관 의사(醫司)에서 약리(藥理 약에 의하여 일어나는 생체의 생리적 변화)를 가르쳤으며, 내의원(內醫院)에 출사도 하였다. 그가 비록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교 문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아마도 조선전기 동안 서출(庶出)로 세상에 알려진 분으로는 어무적(魚無迹), 이효칙(李孝則), 어숙권(魚叔權), 권응인(權應仁), 이달(李達), 양대박(梁大樸) 등이 두드러졌는데 그중에도 그가 가장 국가에 쓰임이 컸다.
<서얼 출신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뛰어난 외교관 조신(曹伸)의 약력>
아무튼 그는 경북 김천이 고향이고, 유명한 유배가사 <만분가(萬憤歌)>를 지은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의 서출 동생(庶弟)으로서,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시호는 효강공(孝康公)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매형이자 스승이다.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조신(曺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형이다. 당시 조선은 적자(적실소생)와 서자(측실소생)의 차별이 엄중하여 서자로 태어나면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도 나가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났으며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 올라서도, 또 순행을 할 때에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하며 우애 깊게 지냈다. 두 형제분이 태어나고 같이 자란 곳이 경북 김천시 봉산면 율수재(聿修齋)이다. 적암 조신은 어려서부터 형인 조위(曺偉)와 함께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김종직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길렀다. 그는 중국어·일본어에 능하였으므로 자신의 신분과 재능을 살려 역관의 길을 걸었다. 조신은 김종직, 김안국(金安國), 남효온(南孝溫), 정여창(鄭汝昌), 박상(朴祥), 이행(李荇), 권민수(權敏手), 이항(李恒), 홍언필(洪彦弼) 등 당대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조신은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교 문서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며, 이에 성종은 여러 차례 그를 불러 시를 짓게 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상을 주었다.
1485년(성종 16)에는 의사(醫司)에 속하여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내의원(內醫院)에 출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조신이 학식이 깊고 음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성종에게 체아직(遞兒職)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형 조위가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1503년 11월 형인 조위가 유배지인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김천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지내고 우애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신은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 있다.
1543년(중종 38)에 중종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자 역관출신인 조신(曺伸)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남긴 저서로는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편찬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와, 그리고 《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 등이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외교관, 적암(適庵) 조신(曺伸)>
조선전기 우리나라는 대일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가 왜구의 노략질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마도주나 막부장군에게 통신사(회례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국왕사의 주(主)임무는 동(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 목적이기도 했다.
당시 조신(曺伸)은 문신으로 문장에 능하여 시도 잘 지었고 중국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해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서너 번 다녀왔다. 대일 통신사 일행으로, 기해년 1479년(성종 10년)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이 해(年)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등이 사행 길을 떠날 때 조신(曺伸)은 26살의 나이로 군관(軍官)으로 참여하여 거제시 지세포(知世浦)에서 일본 대마도로 향했다. 이 당시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거제시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나머지 일행 또한 모두 대마도에서 되돌아왔다. 그 뒤로도 두어 차례 더 일본을 왕래하면서 문장(文章)으로 일본의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던 이후에, 1509년 3월 중종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마도 통신사(通信使)는 말 잘하고 사리에 밝으며 숙련된 조사(朝士 조정의 신하)로 뽑아 차송(差送 어떤 임무를 맡겨서 보냄)하라."하여 그가 통신사 일행으로 다시 차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다음해 1510년 (중종5년) 대마도(對馬島) 통신사 종사관으로 차견(差遣)되어 무난히 임무를 다하고 돌아왔다.
한편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수행한 적도 일곱 차례나 된다. 중국 사행 당시 북경에서 안남국(現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 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정3품(당하관)의 사역원(司譯院) 정(正) 즉,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 관리에 특진되기도 했다.
--이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