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 나주목(羅州牧)
【누정】 무이루(撫夷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비 개인 뒤 산빛 고운 것이 상심(傷心)되고, 취한 후 봄빛은 얼굴에 가득 뜨누나. 풍경이 아름다우나 내 고장 아니니, 이제부터 고원(故園)에 돌아가 쉴까보다.” 하였다.
동루(東樓) 곧 성의 동문루(東門樓)이다.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읍 성을 증축할 때 중수(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 안에 있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도전(道傳)이 회진(會津)으로부터 귀양와서 나주를 지나칠 때 동루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ㆍ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때의 도움과 수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순수할 제, 이 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등하게 했다.
아, 도전이 남쪽으로 떨어져 와서 서울과 멀어졌으나 조종의 공덕의 갸륵함을 듣고 이 누에 올라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아 당시의 천승만기(千乘萬騎)가 이 안에 주둔했던 것이 상상된다. 또 혜종의 사당이 찬란하게 있는 것을 보니, 외로운 신하의 간절한 회포를 위로해 준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이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다.
은행정(銀杏亭) 무이루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주의 남쪽 2리쯤에 있다.
망화루(望華樓) 객관 남쪽에 있으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연꽃 마루[芝栱]와 비늘같은 기와지붕이 자색 노을을 스치는데, 사군(使君)은 날마다 서울을 바라보네. 벽오동 천 열매는 봉이 깃들기에 알맞고, 화각(畫角) 세 소리에 날은 저물어 까마귀 날아드네. 생선 파는 바다 저자[海市] 시끄럽고, 우차(牛車)는 디굴디굴 마을로 돌아가누나. 한 지방의 도회(都會)에 누대(樓臺)도 좋으니, 금장(金章 고관의 복색)으로 해변에 머무름을 한하지 말라.” 하였다. 『신증』 ※이유인(李有仁) ?~1492년(성종 23) 1459년(세조 5) 식년문과 급제
金宗直 1459년(세조 5) 식년문과 급제
빙허정(憑虛亭) 무이루 동남쪽 성 위에 있다. ○ 남곤(南袞)의 시에, “풍진(風塵) 밖에 높이 솟았고, 성벽(城壁) 사이에 우뚝하네. 나무는 평야에 의지하여 짧고, 하늘은 해문(海門)을 향하여 넓도다. 형승(形勝)은 사람 때문에 있으니, 빈붕(賓朋)이 마음껏 즐기도다. 저녁 때 그림으로나 그릴 만한 이곳은 낙조(落照)가 구름낀 산마루에 비치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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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集卷之二十二 / 詩 / 羅州李大使 諱有仁。新作南樓。扁以望華。索賦。
芝栱鱗簷拂紫霞。使君日日望京華。碧梧千乳宜棲鳳。畫角三聲已暝鴉。
蝦菜喧喧通水市。牛車轆轆返村家。一方走集樓臺勝。莫恨金章滯海涯。
성종실록 202권, 성종 18년 4월 12일 辛巳 2번째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李有仁嘉善羅州牧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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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叔舟 | 1417 | 1475 | | | 高靈 | 泛翁 | 保閑齋, 希賢堂 | 文忠 | 高靈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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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역옥(乙亥逆獄) : 일명 나주괘서(羅州掛書)의 변(變)이라고도 함. 영조 31년(1755) 윤지(尹志)의 모역사건으로, 윤지는 영조 즉위년(1724) 김일경(金一鏡) 옥사에 연좌되어 제주를 거쳐 나주에 유배된 자로서 인심을 동요시키고 기회를 이용하여 범궐(犯闕)하려고 김황(金况) 형제 등과 불편 분자를 모집, 나라를 비방하는 벽서를 나주의 객사(客舍) 망화루(望華樓)에 붙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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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망화루
사가시집 제3권 / 시류(詩類) / 의주(義州)에 머무르다.
예전엔 압록강이 있음을 들었더니 / 昔聞鴨江水
지금은 몸소 망화루를 올라왔네 / 今上望華樓
대지는 중하와 가까이 연접했고 / 大地連中夏
큰 번진은 요해처를 눌러 있도다 / 雄藩控上游
양관의 산은 떠나는 손을 보내고 / 陽關山送客
요야의 달빛엔 시름이 뻗치었네 / 遼野月連愁
백발의 어버이가 아직 계신지라 / 白髮親猶在
공명 위해 멀리 노닐기 부끄럽네 / 功名愧遠遊
[주-D001] 양관(陽關) : 옛 관명(關名)인데, 고인(古人)들이 흔히 이곳에서 손을 전송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시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니, 객사는 푸르고 푸르러 버들 빛이 새롭구나. 한 잔 술 더 기울이라 그대에게 권한 까닭은, 서쪽으로 양관 나가면 친구가 없기 때문일세.〔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라고 하였다.[주-D002] 백발(白髮)의 …… 부끄럽네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부모가 계실 적에는 먼 데에 가서 노닐지 말 것이며, 노닐더라도 반드시 방소를 두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고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論語 里仁》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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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집(晩羲集) 양진영(梁進永)생년1788년(정조 12)몰년1860년(철종 11)자경원(景遠)호만희(晩羲), 만희재(晩羲齋), 재원(梓園), 학음(鶴陰)본관제주(濟州)
晩羲集卷之五 / 詩○七言四律 一百九十一首
紀行 玄冬往來。自笑困極。不顧工拙。發口成吟。聊以忘勞。○二十三首
白首詞塲蟻戰回。望華樓下亦風埃。沙邊岸出綾陽路。眉際潮生錦館盃。千里雲山暝色合。萬家砧杵歲寒催。歸鄕未必柴門揜。揚馬猶爲作賦才。
右自羅州抵光山
左海茫茫一粟浮。浮生白髮又逢秋。學追東魯思先進。文逼西京愧下流。碧落瞻星齊拱極。靑雲問路試登樓。功名亦是須臾事。季子云何弊黑裘。
右登拱北樓
彪虎文章爛陸離。大家猶得一斑奇。功完舊史賢爲弟。養備專城孝就兒。雲物漸隨風土異。星霜便覺旅心悲。有才不妨貞閒操。終使昭明選此辭。
右曹大家東征
南國悲凉有大夫。我安從適忽焉虞。固知博謇今人笑。未必明良異代無。梧岫獨憐靈不昧。桂樽應鑑穆將愉。忠臣怨恨湘流咽。竟渡千年起感吾。
右屈三閭南征
火起焚林鳥乃翔。長安西望客懷長。帝王塵跡經秦漢。京兆治聲擬趙張。古往今來人事變。宦成名立髩毛蒼。一篇秋興能知戒。何不迴車早返鄕。
右潘安仁西征
詩莫如唐獨出羣。杜陵千載有聲薰。一生短褐身爲客。萬國愁眉志在君。渭水終南長結戀。貞觀武德輒攸云。北征忠義懸星日。不啻詞華艶見聞。
右杜工部北征
雲水館西峽路長。遊筇百里易斜陽。神龍淹窟波深黑。猛虎依林樹鬱蒼。客子逢秋驚絡緯。英雄自古困風塵。脩眉喜帶鄕山色。今夜郵亭且進觴。
右任實逢道常
皤皤五老鶴成羣。千里相隨不暫分。噩夢夜浮滄海帆。幽情時入薜蘿雲。衣經錦館溫如襲。酒到壺山冷未醺。歲暮旅行心轉急。抵京從此幾朝曛。
右礪山路
尋常雲物摠關情。四韻詩成日日程。得喪有幾憑塞馬。扶搖無際擬溟鵬。霜前古木重湖界。雨後靑山百濟城。伊昔紅顔渠見否。壚娥勸我一盃傾。
右恩津店
皇華亭北是平原。百里周回勝地存。彌勒西來仍石立。尼邱東徙仰山尊。三南冠盖趨京路。一道魚塩近海門。使我餘年天假壽。橐金隨意置田園。
右魯城
聰明只信賦洪匀。粤若吾生降戊申。燕市金高寧賣骨。禹門雷動愧蟠鱗。靑年南國文章士。白首西行雨雪辰。天意庶鑑竆道恨。夢中奇兆卜來寅。
右生辰。感而賦詩。
千里關山已近畿。窓間初旭上征衣。名如雞筋疑風味。髩似蝟毛抗雪威。弘慶有碑寒草沒。素沙開店遠烟微。幽人慣識林泉趣。何故衰齡未息機。
右素沙路
華城南北啓重門。別有分司壯寢園。長樂壽尊追孝養。奉明歌吹慰靈魂。柳殘輦路曾行處。水退宮池舊漲痕。想象龍旂猶入眼。先朝遺老至今存。
凌寒千里冒風霜。要試男兒老且強。玉漏殘更趨學士。羅帷何處睡明妝。驛亭熟歇憑溫酒。冰谷融光喜太陽。一擧登雲無足怪。也知題柱卽仙郞。
右華城有感○ 二首
小春時候已堅冰。歲暮那堪白髮增。千里追程生足繭。三更取火展衣稜。廣陵城遠靑山色。隋府樓高白雪層。汔可詞塲終結局。凌雲意氣尙騰騰。
右果川
朔氣連空白日昏。山川一色六花繁。天憐北海零旄齧。地認東坡着棰痕。世路氛埃埋已盡。天寒光景爽難言。南征皓首猶無𧏮。欲把狂歌擬郢門。
右回路
白首勞勞向驛亭。端居愧不養心靈。平沙睡起咬咬鴨。遠浦光搖靨靨星。出處未分爲小草。生涯一任似浮萍。尋常旅食寧求飽。腹笥便便貯五經。
右早發草浦
五日風埃七日泥。行人未辨路東西。從桴恨不浮滄海。探穴安能到會稽。報國難憑三尺劒。扶身幸有一杖藜。平生苦癖詩難廢。幾向郵亭壁上題。
右恩津
千里偕來似一身。不惟同姓又同鄰。歸裝落拓無知己。髩髮參差合寫眞。魔蠍未須談運命。弊貂何事困風塵。行人不識功名念。謂是商山四皓倫。
右與三老同行
伊昔江南卄載居。趨京千里路猶餘。風情每倚耽羅馬。旅味時供錦水魚。何處論文同李白。至今病暍有相如。衰年百感渾無益。且向紅壚問酒釃。
右參郵望右路
完山南下幾崇朝。竆谷升陽雪半消。世事不惟行路險。京塵已是夢魂遙。忠臣抱玉情難暴。俗子橫金意便驕。可惜元龍淮海士。西遊十載髮蕭蕭。
右全州
默運龍蛇制勝籌。敦經宿業達兵流。寒樓草檄先聲振。宴席傾盃獨見優。當日羣巒皆設覆。至今峭石似騰矛。將軍去後旂常績。何不鐫銘此地留。
右伐亭
黃花未老出山扉。今我來思雨雪霏。車駟靑雲收妄念。薜蘿寒月返初衣。琴樽在座還爲友。洋泌當門庶忘機。一部羲經關性命。年雖遲暮絶編韋。
右還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