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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55권 / 숙종조 15 / 40년(갑오, 1714)
○ 8월. 송 나라 조정의 여섯 현인(賢人)을 문묘(文廟) 대성전(大聖殿) 안에 올려 배향하였다.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는 위공(魏公) 복상(卜商) 아래에 봉안하였고,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는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아래에 봉안하였고,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는 도국공 주돈이 아래에 봉안하였고,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은 예국공 정호 아래에 봉안하였고, 미백(眉伯) 장재(張載)는 낙국공 정이 아래에 봉안하였고,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는 신안백 소옹 아래에 봉안하였다. 전우를 개조하지 않고 상탁(床卓)과 교의(交椅)의 크기를 조금 줄여 밀어서 봉안하였다. 이 일은 임술년에 이미 명이 내렸던 것인데, 그럭저럭 미루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말을 인하여 대신에게 논의하여 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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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1657년(효종 8)~1723년(경종 3) 宋奎濂장남
玉吾齋集卷之十二 / 頒敎文 / 宋朝六賢陞配頒敎文
王若曰。羣賢優入聖域。位次久歉於彝章。縟禮實循輿情。腏食新擧於廟殿。肆颺十行之綸綍。誕告八方之衿紳。惟夫子聖德如天。實萬世道統之祖。由顔曾至思孟。一貫之妙訣相傳。先德行後學文。十哲之親炙無異。嗟乎七十子旣沒。久矣千百載長湮。幸天運
若環相循。故宋賢應期輩出。光風霽月。茂叔洒落之胸襟。立雪坐春。程氏嚴和之氣像。太極通書之奧旨。發前人未發之機。居敬窮理之大方。傳絶學不傳之緖。而橫渠極醇無雜。曁康節旣安且成。證頑明理一分殊。盖秦漢以來所未有。經世論意言象數。雖羲文復起亦何加。若考亭尤有大焉。殆上天所以命者。三才五常之大道。綱擧目張。六經四子之微言。毫分縷析。尊德性道問學。內外交致其工夫。明天理淑人心。巨細咸歸於牖廸。其敎則博文約禮。其功則繼往開來。接眞派之淵源。衆流宗海。揭昏衢之日月。大明中
天。猗玆六賢之宏規。均爲吾道之正嫡。穿章鑿句。奚數歷代之羣儒。入室升堂。無媿聖門之高弟。第於廟享之列。尙在廡位之間。縱時世之因循。莫之能改。然道德之高下。豈若是班。曩有先正之上陳。仍見國論之大定。緣時詘擧贏之議。歷三紀而未遑。顧名正理得之辭。雖百世而可質。事若有待。主張亶在於予衷。文不在玆。表章宜急於今日。乃於本月初七日。以宋朝六賢陞配大成殿內。道國公周敦頤。奉於魏公卜商之下。豫國公程顥。奉於穎川侯顓孫師之下。洛國公程頤。奉於道國公周敦頤之下。新安伯邵雍。奉於
豫國公程顥之下。郿伯張載。奉於洛國公程頤之下。徽國公朱熹。奉於新安伯邵雍之下。殿宇則姑仍舊貫。床椅則稍殺前模。位分東西。並四科而齊列。道同前後。明一統之傳承。事擧而章甫爭歡。禮成而祀典克正。于以修千古之曠闕。奚但聳一時之瞻聆。於戱。斯文自此增光。國脉賴以潛壽。典刑風範。孰無觀感之心。棫樸菁莪。庶致作新之化。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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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7월 22일 辛酉 1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사과 이이만의 송조 육현을 승배(陞配)하는 일에 대한 상소
사과(司果) 이이만(李頤晩)이 소를 올려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하는 일을 논하기를,
"문묘(文廟)의 제도는 모두 황조(皇朝)의 전례(典禮)를 모방하여 사성(四聖)061) 은 전(殿) 안에 종향(從享)하고, 십철(十哲)은 좌우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문(孔門)에서 친히 배워 승당 입실(陞堂入室)062) 한 사람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감히 가감(加減)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열향(列享)한 제현(諸賢)의 좌차(坐次)는 한결같이 세대(世代)의 선후를 따라 그 위차(位次)를 정한 것이니, 이 어찌 후대에 감히 의정(議定)할 바이겠습니까. 비록 《고사촬요(考事撮要)》가운데에 기록된 바를 보더라도 정백자(程伯子)와 소강절(邵康節)은 한유(韓愈)의 아래에 있고, 주염계(周㾾溪) 이하 사현(四賢)은 범영(范寗)의 뒤에 있으니, 도덕(道德)의 고하(高下)를 추론(追論)하여 위치를 변경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다만 이 육현(六賢)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十哲)에 견주어 혹 말할 만한 등차(等差)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모두 동무·서무에 배열(排列)하고 대성전 안에 오르지 못한 것은 어찌 세대(世代)가 현격하여 친히 성문(聖門)063) 에서 배운 자와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묘(聖廟)의 사전(祀典)은 지극히 엄중하여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하고 옛 전장(典章)을 따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새로운 규식(規式)을 세워 경솔히 옛 전장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3백 년 동안 명현과 거유(巨儒)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이 이런 논의가 있었음을 듣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신은 그것이 과연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풍문으로 듣건대 지난해 여러 신하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다고 하는 데, 성묘(聖廟)의 막중한 전례(典禮)에 대하여 황조(皇朝) 이전에 없었던 제도를 어찌 한때의 의논으로 가볍게 변경하여 후세(後世)의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에게 다시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제 이 육현(六賢)을 대성전 안에 승배(陞配)하는 것은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하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경사이다.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성명(成命)을 내린 지 이미 30년이 지났으니, 내가 바야흐로 지금까지 천연(遷延)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그대의 상소 가운데에 또한 ‘육현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에 견주어도 말할 만한 등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도 억지로 이의(異議)를 세우니, 이는 또한 홀로 무슨 뜻인가. 작년에 저 청나라에서도 주자를 승배(陞配)하는 거조가 있었으나 이의가 없었는데, 이런 저지(沮止)하는 의논이 도리어 우리 나라에서 나오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註 061] 사성(四聖) : 안회(顔回)·증삼(曾參)·공급(孔伋)·맹가(孟軻)를 말함.
[註 062] 승당 입실(陞堂入室) :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 학문을 닦으면 결국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비유한 말.
[註 063] 성문(聖門) : 공자의 문하(門下).
○辛酉/司果李頣晩上疏, 論宋朝六賢陞配事曰:
文廟之制, 悉倣皇朝典禮, 四聖從享於殿內, 十哲分配於左右, 是皆親炙孔門, 陞堂入室之人。 從古及今, 未敢增損, 而東、西廡所餟食諸賢坐次, 一循世代先後, 定其位次, 此豈後代之所敢定議者哉? 雖以《攷事撮要》中所錄者見之, 程伯子、邵康節, 在於韓愈之下, 周濂溪以下四賢, 列於范寗之後, 則固未嘗追論道德高下, 變定其位次也明矣。 顧此六賢之學問、道德, 方諸十哲, 未或有等差之可言, 而其竝列廡位, 不躋殿內者, 豈非世代懸遠, 有間於親炙聖門之人而然耶? 聖廟祀典, 至嚴至重, 惟當一意敬遵, 率由舊章而已。 何敢創立新規, 輕改舊章哉? 且念祖宗朝以來, 三百年間, 名賢、宏儒, 非不多也, 曾未聞有此等議論, 而至于今日, 猝有是擧, 臣未知其果合於禮制、義理耶? 側聞曩歲, 有諸臣獻議之事云, 而聖廟莫大之禮, 皇朝以前所無之制, 豈可以一時義起, 率爾更變, 以貽後世之譏議乎?
仍請更詢於大臣、宰臣、三司諸臣, 答曰: "今玆六賢之躋配殿內, 允合於禮制、義理, 而實是斯文之慶也。 寧容異議於其間耶? 成命之下, 已過卅載, 予方以至今遷就爲歉然矣。 爾疏中亦曰: ‘六賢之學問、道德, 方諸十哲, 未或有等差之可言’, 而强爲立異, 抑獨何哉? 昨年彼中有朱子陞配之擧, 而未有異議。 此等沮戲之論, 反出東國, 極可慨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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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20년 병진(1796) 9월 17일(기미)
20-09-17[08] 관학(館學)의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 830명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거듭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려 허락하고, 영의정을 추가로 증직(贈職)하고 문묘에 올려 배향할 때에는 사제(賜祭)하고 반교(頒敎)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여러 도와 열읍(列邑)에서는 금년 안에 거행하되 예(禮)가 이루어진 데 대한 제사는 혁파하라고 명하고, 또 사판(祠版)을 조천(祧遷)하지 말고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며, 시호를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 상소의 대략에,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가 도학(道學)ㆍ절의(節義)ㆍ문장(文章) 세 가지를 모두 겸비하여 치우치지 않았으며 정미(精微)한 경지에 나아가 실천한 것은 선정(先正)과 제유(諸儒)가 자세히 갖추어 논술하였고 지극히 존경하며 사모하였습니다. 신들이 두 번의 상소에서 차례로 들어 분명하게 아뢴 것도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편지에서 인용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碑文)의 내용에서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물의 연꽃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이라고 한 데서는 출처(出處)의 올바름과 경학(經學)의 정심(精深)함에 대해 각각 한 모서리를 가지고서 전체의 묘용(妙用)을 유추해 알 수 있는데 또 무엇 때문에 전하께 번거롭게 아뢰겠습니까.
종합해서 논하면 도가 아래에 있게 된 것은 공 부자(孔夫子)로부터 시작되어, 안자(顔子)ㆍ증자(曾子)를 지나서는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에게 있게 되었고, 자사와 맹자에서 터득하여 주자(周子)ㆍ정자(程子)가 되었으며, 주자ㆍ정자에게서 배워 자양(紫陽) 주자(朱子 주희(朱熹))가 송(宋)나라 천하에서 그 도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이 바름을 잃게 되면서부터 도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있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 사문(斯文)을 크게 밝히고 그 도통을 잘 이은 사람은 모두 높이 보답하며 존중하여 제사하고 문묘의 성무(聖廡)에 철식(腏食 제사(祭祀))하였습니다.
오직 저 김인후는 홀로 대의(大義)를 보아 곧바로 정맥(正脈)을 찾아 깊이 나아가고 두텁게 쌓아서 정밀하고 정대한 경지에 이름으로써 한 몸으로 삼재(三才) 조화(造化)의 묘리(妙理)를 포용하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綱常)의 중임을 맡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비와 자식,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각기 바르게 되어 천륜과 인륜이 해와 별처럼 환해졌습니다. 그 덕과 그 공으로 성대하게 백대의 스승이 되었으니 이런 사람을 문묘에 종사하는 제현(諸賢)의 반열에 올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은 전하의 학문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계시는 바요 깊이 감동하시는 바일 것이니 어찌 후생 말학이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며 끝없이 호소하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한 번의 윤허를 미루고 계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들은 불안하게 서성이며 진실로 감히 성상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미 성인이 나시어 사도(師道)가 밝아졌는데도 유독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속론(俗論)이 점점 침체되어 돌이킬 수 없고 인심은 이미 고질적으로 굳어져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갈수록 대도(大道)에 등을 돌리고 공의(公議)와 날을 세워 다투며 스스로 기꺼이 음사(陰邪)한 소인의 무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뇌성벽력 같은 위엄으로 고무하고 비와 바람 같은 은택으로 적셔 주는데도 받들지 못하는 사물이 있고, 솔개와 물고기까지 이루어 주는 덕을 베푸는데도 교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들은 천하에 이런 이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인과 의로 군신과 부자의 법칙을 삼고 예와 악으로 위엄을 보이고 만물을 이루는 용(用)을 삼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며 북돋아 주고 격려해 주어 이 교화가 한 시대에 행해지게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문묘를 열어 대유(大儒)의 제사를 의논함으로써 정론(正論)을 밝히고 사설(邪說)을 누르며, 과감한 윤음을 내리시어 우주를 청명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시어 특별히 문묘에 종사하는 예전을 거행하도록 하여 그로써 정도를 호위하고 사문의 대통(大統)을 확정하며, 그로써 대의를 붙잡아 모든 백성에게 인륜이 있음을 밝히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선정 문정공은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 두 정자와 장자(張子)ㆍ주자(朱子)를 먼저 문묘에 배향하였는데 주자만 종사하는 반열에서 누락되게 한다면 두 정자와 장자ㆍ주자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편치 않겠는가. 그대들이 오늘 청한 내용은 바로 조 문정공(趙文正公),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 문성공(李文成公), 송 문정공(宋文正公)의 마음이다. 윤허를 지금까지 늦춘 것은 그 예를 중시하고 그 일을 신중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세 번이나 상소가 올라왔으니 무엇을 어려워하며 미루겠는가. 그대들이 청한 선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선왕(文宣王)의 묘정(廟廷)에 배식(配食)하는 일은 시행하도록 허락하고, 예관(禮官)에게 지시하여 전례(典禮)를 살펴보고 날짜를 가려서 거행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가 도덕, 문장, 절의, 공화(功化)를 겸비하여 치우침이 없다는 것을 우리 성상께서 수백 년 뒤에 깊이 느끼시고 특별히 문묘에 올려 배향할 것을 허락하시어 장차 성대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맑게 하는 방도로 삼으시니 듣고 보는 이가 모두 공경하고 있으며 사도에 빛을 더하는 일로 온 나라에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례(前例)를 살펴보니 임술년(1682, 숙종8)에 두 선정신을 문묘에 올려 배향할 때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비좁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예조 당상과 성균관 당상이 함께 나아가 봉심(奉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임술년에 십위(十位)를 출향(黜享)했고 또 갑오년(1714)에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을 전내(殿內)에 올려 배향했기 때문에 동무와 서무에 모두 여유가 있으므로 따로 봉심할 일은 없습니다. 종사할 길일(吉日)을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10월 7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하루 전에 대성전(大成殿)에 고유(告由)하고, 예전부터 승배할 때에는 으레 예관을 보내 사제하고 본가의 사당에 교서를 내리는 규례가 있으며, 또 종사한 다음 날에는 팔도에 반교(頒敎)하였으니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선정신 김인후를 문묘에 올려 배향하는 일은 서울과 지방에서 한꺼번에 거행해야 하겠지만 사정상 그럴 경황이 없습니다. 팔도 각 지방은 거리가 같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는 모든 제구(祭具) 또한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고, 또한 모름지기 태학의 규모를 먼저 확정한 뒤에야 거행하도록 통지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방의 향교에서는 내년 봄 석채례(釋菜禮)를 올릴 때에 가서 고유하고 봉안(奉安)하되 위판(位版)을 만들 밤나무 또한 전례에 따라 개성부(開城府)와 강화부(江華府)에서는 스스로 마련하고 팔도에서는 각 감영에서 미리 꼼꼼하게 만들게 하여 일시에 봉안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팔도와 사도에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여러 도의 열읍은 모두 올해 안에 거행하도록 하라. 고유하는 절차는 특별히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면 대략 서울에 있는 문묘의 동무와 서무에 작례(酌禮)하는 고사를 모방하여, 선성(先聖)의 신위에 고유하고 당위(當位)에 치유(致侑)하게 하라. 제수(祭需)는 잔 하나에 청주(淸酒)를 담고 두(豆) 하나에 근저(芹菹)를 담고 변(籩) 하나에 시과(時果)를 담도록 후록(後錄)하여 내려보내 예가 번거롭고 일이 번독하다는 탄식이 없게 하라. 전일에 듣건대, 지방에서는 예가 이루어진 데 대한 제사를 별도로 설행한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니 이번부터 규례를 만들어 하루속히 잘못된 습속을 혁파하도록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에 들으니 종향하는 선정 중 도덕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상상(上相)을 증직한다고 하였다. 경은 전례를 살펴보고 왔는가?”
하니, 민종현이 아뢰기를,
“근년의 예를 말씀드리면 병자년(1756, 영조32)에 종향할 때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게 특교로 상상을 추증했습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선정 문정공 송시열의 전례에 따라 선정 문정공(文靖公) 증(贈) 이조 판서 김인후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리나라에는 종사하는 유현(儒賢)들을 모두 조천(祧遷)하지 않지만 명백하게 정해진 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유년(1717, 숙종43)에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올려 배향할 때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과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이에 관해 진달했는데, 숙묘(肅廟)께서 특별히 조천하지 않는 전례(典禮)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번에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의 사판을 조천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경이 아뢴 바가 적합하다고 하겠다. 하물며 특별히 허락한 전례도 있으니 조천하지 않는 전례 또한 시행하라. 만약 대(代)가 다하여 사판을 이미 묻었다면 추가로 만드는 것은 비록 가볍게 의논하기는 어렵지만 특교가 있을 경우에는 또한 추가로 만든 일도 많으니 즉시 해당 도에 분부하여 속히 거행해서 사제(賜祭)하고 교서를 내릴 때에 맞출 수 있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올려 배향할 때 위차(位次)는 시대의 선후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예전에 선현을 종사할 때에는 봉사손을 녹용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를 종사하도록 명하였으니 그 사손(嗣孫)을 녹용해야 할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이름을 안다면 오늘 정사에서 거행하고, 모른다면 이조에서 도신에게 물어서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장계가 올라온 뒤 녹용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정신 김인후에게 숭보(崇報)하는 은전을 내리는 일은 수백 년 이래 실로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시호 중 ‘정(靖)’ 한 자에 대한 성상의 하교를 받들고 보니 더더욱 흠앙하며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개 ‘정’ 자는 ‘넉넉하고 안락하게 잘 마쳤다.[寬樂令終]’라는 의미이니 선정신의 도학ㆍ절의ㆍ조예ㆍ공화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실상을 다 반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깊이 느끼시어 성대한 예전을 거행하는 시기를 당하여 선정신의 시호 중 ‘정’ 자는 널리 의견을 물어서 속히 고침으로써 밝은 시대에 유현을 존경하고 도를 높이는 예전을 빛나게 해야 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예조의 낭청을 보내 시원임 대신(時原任大臣)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물어서 때맞추어 거행할 수 있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종사할 때의 교서와 반교문은 모두 전례에 따라 문임(文任)이 지어 바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주-D001] 맑은 물의 …… 달 :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김인후(金麟厚)를 가리켜 “하서(河西)는, 맑은 물의 연꽃[淸水芙蓉]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다.”라고 하였다. 《栗谷全書 卷32 語錄》 하서는 김인후의 호이다.[주-D002] 두 선정신 :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으로, 두 사람은 1682년(숙종8)에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肅宗實錄 8年 5月 21日》[주-D003] 십위(十位) : 공백료(公伯寮), 순황(荀況), 마융(馬融), 왕필(王弼), 왕숙(王肅), 두예(杜預), 하휴(何休), 가규(賈逵), 오징(吳澄), 신당(申黨)이다. 《肅宗實錄 8年 5月 20日》[주-D004] 송조(宋朝)의 …… 배향했기 : 송조의 육현은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 미백(郿伯) 장재(張載),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를 말한다. 이들은 공자와 십철(十哲)을 모신 대성전(大聖殿)에 배향되지 못하고 각각 문묘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나누어 종사(從祀)되어 있었는데, 1714년(숙종40)에 와서 사과(司果) 이이만(李頤晩) 등의 발의로 대성전에 올려 배향되었다. 《肅宗實錄 40年 7月 22日, 8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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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0 (1796) 년 9월 17일 ( 기미 )
강 :
館學儒生洪準源等八百三十人陳疏申請文靖公金麟厚從享文廟賜批許之命加贈領議政陞配時賜祭頒敎仍命諸道列邑今年內擧行革罷禮成祭又命祠版不祧奉祠孫錄用改諡事問議于大臣儒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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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略曰先正臣文靖公金麟厚道學節義文章三者兼該而不偏精造而實踐則先正諸儒之論述備矣尊慕極矣臣等兩疏歷擧而洞陳亦無以加乎奉朝賀臣金鍾秀書中所引先正臣宋時烈所撰碑文之語矣至若淸水芙蓉光風霽月出處之正經學之精各就其一端而反隅于全體妙用者耳又何煩於黈纊之前哉總而論之曰道之在下自孔夫子始焉歷顏曾而在思孟得乎思孟而爲周程學周程而紫陽 朱子統其道於有宋之天下則自陸王之學失其正而道遂在乎我東矣在我東而大闡斯文克紹其統者無不崇報而尊祀之腏食于文廟之廡則惟彼麟厚之獨見大義直尋正脈深造厚積以臻乎精密正大之域以一心而㴠三才造化之竗以一身而任萬世綱常之重於是乎父子君臣各得其貞天秩民彝炳如日星之德之功蔚爲百世之師者可不躋享于文廡諸賢之列乎以殿下之聖學知之久矣感之深矣夫奚待乎後生末學之一疏再疏陳籲不已而猶靳一兪者何歟臣等徊徨踧踖誠不敢知聖意之所在也嗚呼聖人旣作師道乃明而獨無乃俗論方墊而莫拔也人心已痼而難醫也駸駸然背馳大道角戰公議甘自歸於小人陰邪之徒則風霆鼓潤而物有不承鳶魚作成而人有未化臣等未聞天下有是理也今殿下以仁義爲君臣父子之則以禮樂爲風霆鳶魚之用導之齊之鼓之舞之而行是敎於一代之上則其事莫先乎開聖廡而議大儒之俎豆以彰正論以抑邪說揭絲綸之磊落廓宇宙於淸明者是也伏願殿下亟命攸司特擧從祀文廟之典以衛正道定斯文之大統以扶大義昭凡民之有倫焉批以先正文靖卽我東之周子也兩程張朱先侑聖廟而使周子擉漏於從祀之列在兩程張朱之心安乎否乎爾等今日之請卽趙文正 李文純 李文成 宋文正之心也允諾之姑徐至今意在重其禮愼其事而已疏旣三上更何持難爾等所請先正文靖公金麟厚配食文宣王廟廷事許施令禮官取考典禮卜日擧行○禮曹判書 閔鍾顯啓言先正臣文靖公金麟厚道德文章節義功化之兼有不偏我聖上曠感於數百年之後特許陞配將擧縟儀以爲明天理淑人心之道瞻聆俱聳斯道增光擧國之幸莫大於此取考前例則壬戌年兩先正陞配時以東西廡恐有狹窄之慮本曹堂上與成均館堂上有同詣奉審之擧而今則以壬戍年十位黜享及甲午年宋朝六賢陞配殿內之故兩廡俱有餘地別無奉審之事從祀吉日問於日官則今十月初七日爲吉云前一日告由於大成殿自前陞配之時例有遣禮官賜祭及敎書於本家祠堂之規又於從祀翌日頒敎八方請依此擧行從之又啓言今此先正臣金麟厚 文廟陞配事當一時擧行於中外而其勢自有未遑不但八路地方之遠近不同所入凡具亦難猝辦亦須先定太學規模而後知委擧行己有前例外方鄕校則待明年春釋菜告由奉安而位版所造栗木亦依前例開城府 江華府自辦八道則令各其監營先期精造使之一時奉安之意請知委於八道四都從之敎曰諸道列邑皆於今年內擧行而告由之節別無可據之例略倣京中文廟東西廡酌禮之故事告由於先聖位致侑於當位而祭品爵一盛淸酒豆一盛芹菹籩一盛時果事後錄下送俾無禮煩事瀆之歎曾聞外方則別設禮成之祭云無義莫甚自今爲例亟草謬習事嚴飭諸道敎曰曾聞從享之先正道德特異者另贈上相云卿果考前例以來乎鍾顯曰以近例言之丙子年從享時先正臣文正公宋時烈因特敎貤贈上相矣敎以依先正文正公宋時烈已例先正文靖公贈吏曹判書 金麟厚加贈議政府領議政又啓言我朝從祀儒賢竝皆不祧而未有明白定制故曾在丁酉年文元公 金長生陞配時其時故相臣 金昌集故判書 閔鎭厚以此陳達則肅廟特許不祧之典今此先正臣文靖公金麟厚柌版不祧事何以爲之乎敎曰卿之所奏可謂得體況有特許之已例不祧之典亦爲施行若或親盡埋版則追造一款雖難輕議或有特敎亦多追造者卽爲分付該道星火擧行俾及於賜祭賜敎書之時又啓言今此先正臣文靖公金麟厚陞配文廟時位次恐當以時代先後定次第奉安故敢此仰達矣從之又啓言在前先賢從祀之時有奉祀孫錄用之例矣今此先正臣文靖公金麟厚從祀命下之後其嗣孫恐當錄用從之敎以知其名則今日政擧行不知則令該曹問于道臣使之狀聞後錄用又啓言先正臣金麟厚崇報之典屢百年來實多未遑今以諡號中靖之一字伏奉聖敎尤不勝其欽仰激感蓋靖字是寬樂令終之義則其於先正道學節義造詣功化實有摸狀不盡者今當聖心曠感亟擧盛典之日先正節惠中靖字恐不可不博詢亟改以光昭代尊賢崇道之典臣意則發遣本曹郞廳問議于時原任大臣及在外儒臣以爲及時擧行之地恐不可已從之又啓言從祀時敎書及頒敎文竝依例令文任撰進恐合事宜從之
0129
강 :
召見禮曹判書 閔鍾顯及封章太學生疏頭洪準源等于誠正閣
목
準源等各奏姓名訖命聽批予敎鍾顯曰金文靖實我東之濂溪而今日特允配享之請予實喜幸鍾顯曰此實屢百年未遑之擧而今我聖上以尊賢重道之盛念克從士林之齊籲不惟斯文之幸實大有光於聖德矣予曰予於先正配享竊自有講明者久矣崔致遠 薛聰 安文成 鄭圃隱此四賢中鄭圃隱生於麗末始倡道學在我東爲箕子後一人其功甚大實合於腏食聖廟至於崔致遠 薛聰亦東方儒者之表著然其於從祀則予未知如何而崔致遠似或過矣安文成有大功於聖廟報以俎豆之典如四賢祠之別爲立祠則實爲允當惟金文靖則大學西銘微辭奧旨始爲發明居敬直內之工道學淵源之正實爲斯文之宗匠故予之曠感而欽歎者正以此也今之言文靖者皆以道學節義文章竝稱然配享重典只當以斯文道學論之而已至如節義文章猶屬其餘事以 金文靖之節義謂之猶屬餘事則其道學之尊尤可尙矣鍾顯曰聖學高明洞見斯文之頭腦臣實欽誦不已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