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탐진안씨 오성군파를 넘어 순흥안씨 탐진군파로 넘어가서 생리적 불일치를 공부해 보고자 한다.
1742년년부터 족보가 제작 되면서 탐진안씨와 순흥안씨 탐진군파는 각자 시조 찾기에 노력하여하였다. 그 결과는 오성군 안우장군을 시조호 모시는 탐진안씨 오성군파와 시조를 알지 못하지만 안도 (탐진안씨 헌납공파)와 안례(탐진안씨 상장공파)가 있다. 헌납공파와 상장공파는 후에 탐진군으로 봉군을 받은 안원린을 시조로 모시고 순흥안씨 탐진군파로 본관을 바꾼다. 이 일들은 조선말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고려시대에는 거주지가 곧 본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왕으로부터 봉군을 받아야 본관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자 탐진안씨 오성군파의 일부도 오성군 안우 위에 탐진군 안원린을 시조로 얹어 대성인 순흥안씨 탐진군파로 이관하게 된다.
우선 1680년 경 조중운의 씨족원류에 보면 안우, 안기, 안지가 나온다 우와 기·지는 느슨한 형태의 인척이다. 덕린파는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상장공파와 헌납공파는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 1742년 탐진안씨 오성군파 등장과 생리적 불일치
우선 기파가 1742년에 첫 족보를 발간한다. 족보에는 시조가 필요하다. 이 때 고려말 최고의 명사이고 오성군을 봉군 받은 안우를 시조로 모시게 된다. 그리고는 약 30년 후 1777년에 동생인 지파가 합쳐서 족보를 발간하게 된다.
그런데 안우 정군의 아들까지 같이 서조로 모시다 보니 30년에 3대가 출생하는 커다란생리적 불일치가 생긴다. 여기가 1차 생리적 불일치이다.
2. 1850년 순흥안씨 탐진군파의 등장과 생리적 불일치
1883년 강진안씨 족보에 드디어 탐진군 원린의 이름의 시조가 등장한다. 죽성군 원형과 탐진군 원린은 순흥안씨 안목의 둘째와 셋째 아들로 만들어진다.
1917년 오성군파도 안원린을 왕시조로 모시고 족보를 발간한다. 여기서 2차 생리적 불일치가 출발된다.
아래는 탐진군파 계파도 그림이다.
①은 1차 생리적 불일치이다. 우에서 바로 윤기로 내려와야하는데 현이 들어가면서 생긴 30년 사이에 3대 출생의 불일치이다.
②는 2차 생리적 불일치이다. 부자가 역전된 상황이다.
3. 해결책
1) 탐진안씨 오성군파의 생리적 불일치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원래 취지대로 안우장군을 시조로 모시고 왔으므로 시조 안우 장군 아래에 바로 윤기를 놓으면 된다. 그러면 안우장군 아래에는 아들 윤기와 현이 있다.
2) 안원린과 안우의 생리적 불일치는 답이 없다. 안원린은 안종채님과 안상천님의 합작으로 꾸며진 유령인물이기 때문이다.
4. 원숭·원형 · 원린 삼형제론
- 위 세 명의 삼혈제론은 안종채님과 안상천님께서 주장해서 나왔다. 하지만 후에 개성왕씨 묘지 등에서 발굴된 묘지명에서 목은 이색 글에서 안원숭은 형제가 없음이 밝혀졌다.
- 후에 묘지명에서 안원형은 죽산군을 봉군 받은 것이 아니라 광란군을 봉군 받은 기록이 나와서 기존의 기록과 일치하였다.
- 위 삼형제는 1341년에 동시에 문과급제했다고 주장하나, 1341년에는 원형의 아들면이 목은 이색, 안종원과 함께 급제한 해이다. 위 삼형제의 등과가 있었다면 이색이 이 사실을 기록 안할 리가 없다.
- 원숭과 원형은 실존인물이고 원형은 최소 20살 위이다. 안원린은 그 기록이 없다.
5. 족보에 대한 이해
- 족보는 80%가 엉터리라고 한다. 역사적 기록이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제대로 살려야 한다. 특히, 탐진안씨 처럼 작은 그룹의 족보는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더 높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지금의 시대. 비록 규모는 크진 않지만 제대로 된 몇 개의 소중한 역사적 기록을 간직하면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