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水村) 임방(任埅)1640년(인조 18)~1724년(경종 4) 대중(大仲) 우졸옹(愚拙翁) 풍천(豐川) 문희(文僖)
水村集卷之六 / 應製錄 / 禮山縣贈吏曹參判金絿祠宇賜額致祭文
惟昔休明。莫尙中廟。於斯爲盛。衆哲並造。猗嗟我卿。挺生此際。天賦旣粹。玉溫金麗。弱冠志學。操履篤至。節卓行懿。翰墨餘事。雙魁司馬。一擧高第。文正文簡。道義深契。羽儀朝端。三庵名世。明良應期。慶會千載。從頌經幄。啓沃靡替。致澤君民。志回三代。拭目雍煕。上下風動。處同芝蘭。出擬麟鳳。噫天將喪。奈不佑善。北門夜啓。鬼蜮潛煽。群賢騈首。一網誰脫。志氣彌厲。三木非怵。履危猶泰。視禍如榮。流離竄逐。十載南溟。元城嶺外。叔子涪陵。所守愈確。平昔可徵。蒙恩獲歸。托命桑梓。痛在蓼莪。情切追稅。廬于墓側。抆血以終。純忠篤孝。令聞無窮。允矣君子。誰與倫比。聖祖垂奬。貤加爵位。風聲益彰。激懦千億。士林推仰。願爲矜式。睠彼烏山。寔卿舊止。遺芳未沫。耿光猶在。衿紳合謀。廟宇斯屹。瞻依有所。享禮罔觖。爰錫新顏。庸示寵典。不昧英靈。庶歆明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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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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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 /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 김구 전(金絿傳)
김구는 무신생이고 자(字)는 대유(大柔)이다. 정묘년에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고,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부제학으로서 해남(海南)에 귀양갔고, 계사년에 왕은(王恩)을 입어 석방되었으나 곧 죽었다.
보유 : 갑술년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다가, 《강목(綱目)》에, 간특하고 숨어있는 죄[奸伏] 적발했다는 대목을 진강(進講)하게 되었을 때, 계하기를, “인신(人臣)은 백성을 성(誠)과 신(信)으로써 인도하고, 총찰(聰察)하는 것은 일삼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대개 풍자한 것이었다. 공은 정치의 원리[洽體]를 알아서, 어떤 일에든 바르게 간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림(士林)이 중하게 여겼다. 사화가 일어나자 제공(諸公)과 함께 조옥에 갇히어, 정암(靜庵)ㆍ충암(冲庵)과 같은 죄목으로 국문받았다. 공초하기를, “신은 나이 32세입니다. 성품이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습니다. 다만 옛사람이 스승과 벗끼리 돕던 일을 사모하여 뜻이 같은 사람과 교유했을 뿐입니다. 인물을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게 하는 것은 신같이 지위 낮은 자의 할 바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자를 미워하였습니다. 한갓 공정한 논의를 알아 서로 시비했을 뿐입니다. 붕당을 맺어 과격하게 하고 국론을 거꾸로 되게 하며, 나라 정사를 나날이 그릇되게 했다는 것은 신의 실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사형으로 정해 있었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곤장을 쳐서 유배하도록 하였다. 또, 대신이 고집하여 형장(刑杖)을 결행(決行)하고 개령(開寧)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7일에 다시 의금부에 모이도록 명하여 전지를 받고 떠났다. 김정전(金凈傳)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12월에 배소를 절도(絶島)로 옮기게 되어서 남해(南海)에 정배되었다, 경진년 봄에 부인 □씨가 한 필의 말로 짐 한 바리와 창두(蒼頭 종) 5, 6명을 거느리고 공의 배소에 뒤따라갔다. 이때는 김대성(金大成)이 도망중이어서 탐색이 엄중하였다. 갈림길을 지키는 군졸이 서로 바라보면서 수직(守直)할 정도이고, 무릇 나그네가 있으면 모두 수검(搜檢)한 뒤에 보내었다. 경상 감사 반석평(潘碩枰)이 길에서 여행하는 어떤 부인이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길가에 머물러 사정을 물어본 다음, 민망하고 측은하게 여겨서 양식과 물품을 찾아 주고, 또 하도(下道)로 가는 영리(營吏)를 시켜 배행(陪行)하게 하였다. 공은 드디어 죽림(竹林) 속에 집을 짓고 살았다.
신묘년 11월에, 임피(臨陂)로 옮겨졌다가, 계사년에 사(赦)를 입자 곧 예산(禮山)으로 달려가 부모의 무덤에 곡하고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대개 남해에 있을 때에 부모의 상을 당했던 것으로 추세(追稅 뒤를 좇아서 복을 입음)하는 정성을 펴고자 하였던 것인데, 병들어서 1년 만에 죽었다. 공은 필력이 경건(勁健)하여 종요(鍾繇)ㆍ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본받았다. 일찍이 중국 사람이 공의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드디어 쓰지 않았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드물다. 아들 김균(金鈞)은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