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 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 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 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기천서원(沂川書院) 선조(宣祖) 경진년에 건축하여 인조(仁祖)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 자세한 것은 모두 경도(京都) 묘정(廟庭) 편에 보라.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인데 당성인(唐城人)이다. 벼슬은 증 영의정 당양부원군(贈領議政唐陽府院君)이다. 정엽(鄭曄) 광주(廣州) 편에 보라. 이원익(李元翼) 경도(京都)의 묘정 편을 보라. 이식(李植) 자는 여원(汝園), 호는 택당(澤堂)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고산서원(孤山書院) 숙종 병인년에 세우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은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이었는데, 대사성(大司成)을 추증하였다. 조한영(曺漢英)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대로사(大老祠) 정자(正字) 을축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송시열(宋時烈) 경도(京都)의 묘정편을 보라.
○ 현암서원(玄巖書院) 순조(純祖) 갑오년에 세우고 사액하였다. 김조순(金祖純) 경도의 묘정편을 보라.
........................
일성록 > 정조 > 정조 9년 을사 > 8월 27일
정조 9년 을사(1785) 8월 27일(갑진)
09-08-27[10] 여주(驪州)의 유생 이성익(李聖翊) 등이 상소하여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조한영(曺漢英) 등을 종향(從享)하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증 이조 판서 하흥군(夏興君) 문충공(文忠公) 조한영은 젊어서부터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에 있어 사림의 촉망을 받은데다 명절(名節)로써 더욱 스스로를 면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종(英宗)께서 병자년(1756, 영조32)에 척화(斥和)한 제신(諸臣)에게 사제(賜祭)할 때 연석의 하교에서 ‘김상헌(金尙憲), 조한영과 삼학사(三學士)는 생사는 비록 다르지만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의리를 지킨 점에 있어서는 실로 차이가 없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봄가을로 제향할 때 아직 그럴 만한 사우(祠宇)가 없습니다. 신들이 살고 있는 곳은 바로 조한영이 생장한 곳이고, 고려(高麗)의 충신 이존오(李存吾)의 사우가 마침 조한영의 구택(舊宅)이 있는 고을 내에 있는데 이것이 숙종조(肅宗朝)에 사액(賜額)된 고산서원입니다. 외로운 충심과 곧은 절개는 전후로 짝하여 아름답고 유사(遺祠)와 옛 집터가 매우 가까이 같은 고을에 있으니, 여기에 추배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또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의 신하 안성 군사(安城郡事) 윤충보(尹忠輔)는 고려의 운이 끝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은둔하였으니 이는 길재(吉再), 서견(徐甄) 같은 현인들과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그는 고려처사(高麗處士)라 자호(自號)하고 날마다 높은 언덕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분향(焚香)하고 절하여 축원하였는데, 후인들이 그 언덕을 왕망현(王望峴)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고택(故宅)이 고산(孤山)의 북쪽에 우뚝 홀로 남아 있습니다. 옛날에 ‘향선생(鄕先生)이 죽으면 사묘(社廟)에 제사 지낸다.’라고 하였는데, 윤충보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존오, 조한영과 더불어 모두 한 마을을 아름답게 하였고 똑같이 백세토록 빛나니 삼현(三賢)의 지조와 절개는 한 사우에 같이 제향하는 데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두 현인을 모두 고산서원에 종향(從享)하도록 특별히 명하시어 충절을 권장하고 명성을 세우게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계속 추배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서인숙 (역) | 2006
....................
국조보감 제80권 / 순조조 5 / 26년(병술, 1826)
○ 1월. 하교하기를,
“지난 가을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경기와 호서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 가는지 모르겠다. 옛사람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오히려 자신의 수치로 여겼는데, 하물며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사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즐겁게 살도록 하지 못하고, 흉년과 기근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쓰러져 죽어도 이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쌀밥과 비단옷이 맛있고 편안하게 느껴지겠는가. 저 헐벗고 굶주려 부황 든 백성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서 이어 눈물이 흐른다. 이제 겨우 곡식을 운반하여 구제를 베풀도록 명을 내렸으나, 나의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마음은 진정 잠깐이라도 잊을 수가 없다. 이에 내탕고의 은자(銀子) 1천 냥과 전문(錢文) 5천 꿰미, 다목[丹木] 3천 근, 백반(白礬) 1천 근을 내리어 경기 및 호서와 사도(四都)의 진휼 물자에 보태주어, 감히 잊지 못하는 나의 뜻을 표한다.”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조한영(曺漢英)을 고려 충신 이존오(李存吾)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추배(追配)할 것을 명하였다.
........................
석탄집(石灘集) 이존오(李存吾)생년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몰년1371년(공민왕 20)자순경(順卿)호석탄(石灘), 고산(孤山)본관경주(慶州)특기사항정몽주(鄭夢周) 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
石灘集下 附錄補遺 / 附錄 / 孤山祠上樑文 己未十一月十日○趙錫周
숙종 | 3 | 1677 | 정사 | 康熙 | 16 | - | 驪州에 祠宇를 창건하다.(孤山書院으로 賜額) |
伏以倡道海東。咸仰廉頑而起懦。立祠江上。固宜揭虔而妥靈。遵鹿洞之舊規。闡鵝湖之新制。伏惟李長沙先生晚生勝國之末。寓居驪水之陽。簡重寡言。早負山斗之望。慷慨力學。溯求洙泗之源。奧在就傳之年。已知觀水有術。滔天浩浩。歎大野之皆沈。揷地巍巍。喜孤山之獨立。蓋其平生素志見在短篇。非如墨客騷人托此高興。故當許身之日。深堅報國之忱。陽城之居諫官。皆知有待。韓愈之除御史。誠當得言。屬妖僧無禮於王前。曁乃僚進諫於闕下。危言凜如霜雪。老髡下床。讜論觸於雷霆。群臣變色。纔就蕭傅之牢獄。又謫賈生之長沙。天怒少回。賴牧老伸救之力。春風苦憶。見圃隱許與之心。及夫病革之辰。益見疾惡之意。忠憤切於屬纊之際。乃曰予汝偕亡。先見驗於蓋棺之初。果然妖兇就戮。原厥抑邪扶正之義。可質蒼天。所以憂國愛君之誠。有如皎日。溯千載而罕有其比。奮百世而可以爲師。顧玆康成之舊閭。尙闕潮陽之新廟。高山仰止。孰無慕賢之懷。遺躅宛然。謾興弔古之念。道之弗行亦命也。縱遭窮阨於當時。歿而可祭斯人歟。寧使湮滅於後世。幸逢前後地主誠篤於崇德。乃與大小邑人謀所以建祠。捐官需之羨餘。所裨何量。副士林之輿望。俾訖其功。所恨連値乎無年。未能成就於不日。銖累▦積。幾多有司之勞心。規圓矩方。載見良工之運智。棟楹樑桷之用皆得。堂室序齋之位俱成。徂玆三百餘年。慨先輩有意而未果。賴彼一二同志。慶今日經始而粗完。年代雖遷。尙幸此山常在。英靈不昧。必記童子所遊。章甫之徒春秋駿奔。擧喜廟焉而饗。搢紳之人東西行過。皆思禮於其廬。不寧爲俎豆乎前賢。抑將以捍衛乎吾道。何患異端之說日新月盛。辭而闢之。試看先生之風山高水長。文未喪也。凡爲學者。可不勉哉。敬誦燕賀之辭。仰助虹樑之役。兒卽偉拋樑東。宿雲初敬日輪紅。雙峯莫詑中天立。爭似玆山捍水功。兒卽偉拋樑西。茫茫大野夕陽低。吾州自古多君子。六友遺基接鳳棲。兒卽偉拋樑南。馬巖層影倒江涵。風生渡口蒼煙斂。遙指長林五又三。兒卽偉拋樑北檻外晴巒淨如拭。一帶溪流抱桂林。行人尙識長沙宅。兒卽偉拋樑上。日月當中無寸障。大節堂堂不愧天。懸知百代神猶王。兒卽偉拋樑下。衮衮長江流不舍。多少靑衿執豆籩。緬懷懿範如親炙。伏願上樑之後。鬼神呵禁。山川胚胎。學者必有師。各勉升堂而鼓篋。邪說不得作。永絶惑世而誣民。威武不能屈。貧賤不能移。可見砥柱之屹立。君子有所恃。小人有所畏。佇致金矢之艱貞。鼓士氣於千秋。扶國脈於萬祀。自今伊始。有永彌昌。
先生墓在所已見於年譜中。而樂師院。一作藥師院。夫人墓亦在開城府南門外十里許虎峴之北
........................
奧在就傳전之年。已知觀水有術->奧在就傅부 / 況今元孫已過就傳부之年。若果不堪付托->就傅부
*전할전 傳, 스승부 傅
*《禮記》〈內則〉
凡生子에 擇於諸母與可者호되 必求其寬裕慈惠溫良恭敬愼而寡言者하여 使爲子師니라
十年이어든 出就外傅하여 居宿於外하며 學書計하며 衣不帛襦袴하며 禮帥初하며 朝夕에 學幼儀하되 請肄簡諒이니라
孝經注疏 第5券聖治章 第九
聖人이 因其親嚴之心하야 敦以愛敬之敎라 故出以就傅하고 趨而過庭하야 以敎敬也요 抑搔癢痛하고 懸衾篋枕하야 以敎愛也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