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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신 자들의 끈질긴 기도
2019년 6월 2일 / 누가복음 18:1-8
눅 18:1-8 / [과부와 재판관]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깔보는 재판관 한 사람이 있었다. 3) 그런데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가 늘 그를 찾아가서 자기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려 달라고 탄원하였다. 4-5)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말을 무시해 왔으나 귀찮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6) 나는 하나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자가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구니 그의 소원대로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나를 찾아와서 견디지 못하게 할 테니까' 하고 생각하였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비록 악한 재판관이라도 이처럼 들어주는데 7)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주시지 않겠느냐? 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기도하는 삶이어야함을 아셨다. 그런데 종종 원함의 기도제목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의 간격으로 응답이 더디거나 아직도 기다려야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을 낼 것을 아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1)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비유의 말씀을 주시는데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주제를 붙여 말씀하셨다. ‘항상’이라는 말은 언제든지 어떤 경우에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하여 무기력하게 된다. 또한 영적인 민감성이나 통찰력도 사라져서 분별력이나 통제력을 상실하여 욕망에 이끌리고 시험이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낙망하게 되면 마음이 연약해지고 피곤한 생각이 들어 기도할 힘을 잃게 된다. 여러 모양으로 회의와 불신이 올 때 결국에는 기도를 포기하게 된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낙망은 큰 문제이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2-5)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다. 로마 당국에 의해 임명된 압제자의 재판장으로 식민지 백성을 업신여겼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자들로 분류한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여인을 쫓아냈다. 그러나 이 과부는 매일 법정 앞에 나아가서 슬피 울며 끈질기게 간청했다. 과부의 원한은 하늘에 사무칠 만큼 절실했다. 재판장은 스스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으나 이 과부의 끈질긴 간청은 견디기 힘들다고 독백하면서 그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비유이다.
하물며(6-8)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말하는 핵심은 하물며 하나님이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비교하여 택하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속마음을 보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무정하지도 무자비하지도 않으시고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응답이 더디 와도 참고 인내하며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구한 것보다 더 좋은 선물들을 위로부터 주신다. 종말론적으로 성도의 기대보다 주님이 더디 오심으로 낙망하여 포기할 자들도 있음을 경고한다.
■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는 높이 48m 너비 900m에 이르는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매력 중 으뜸은 폭포 위에 걸려 있는 무지개 다리(Rainbow Bridge)로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 연결되었다. 이 다리는 1847년, 현수교 설계시공 전문가인 찰스 엘렛 주니어(Charles Ellet Jr)가 연을 띄워 연줄로 다리 양쪽을 연결한 후 연줄에 코일을 매달아 잡아당겼고, 다음에는 아주 가는 코일에 약간 더 강한 철사를, 철사에는 다시 밧줄을 매달아 당겼다. 마지막으로 밧줄에 케이블을 매달아 잡아당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쇠줄을 이용해 다리를 놓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무지개다리가 놓이게 됐다. 이 모든 것은 가느다란 한 가닥 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 설 교 >
기도하다 낙심하지 말라
1. 불쌍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하고, 어려운 환경이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바로 기도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엘리야처럼 야베스처럼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으면 낙심이 된다. 하나님께 섭섭한 것이다. 삐진 것이다.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까지 하며 기도했는데, 다른 사람들 기도는 응답이 잘 되고 내 기도는 응답이 안 될 때 낙심이 된다.
기도하다 낙심하고 시험에 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애들이 화가 나면 ‘나, 밥 안 먹어!’ 하며 반항하는 것처럼, 기도하다 시험 들면 ‘하나님, 더 이상 기도 안 하겠습니다.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는데 뭐 하러 기도합니까?’라고 한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지금 그런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낙심하고 있는 사람에게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기도하기를 격려하신다.
1절 /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인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들어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 당시 과부는 우리 시대의 과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돈도 연줄도 권력도 없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은 물론, 생계의 위협까지 느끼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과부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누누이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셨다.
시 146:9 /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그렇지만 하는 짓마다 못된 짓뿐인 것들은 내쳐 버리신다.
약 1:27 /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순수하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님 앞에 늘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는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마저 당하고 있다. 그래서 과부는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재판장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 재판장은 악한 사람이었다.
눅 18:2-3 / `어떤 도시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깔보는 재판관 한 사람이 있었다. 3) 그런데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가 늘 그를 찾아가서 자기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려 달라고 탄원하였다.
이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과부가 간곡하게 호소했지만 재판장은 전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과부의 간절한 하소연이 이어지지만 불의한 재판장은 귀찮기만 하였다. 사실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성실한 재판장이라고 해도 일이 많으면 귀찮아한다. 하지만 과부는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밤낮으로 찾아가 간청하기를 쉬지 않았다.
과부가 얼마나 끈질기게 간청했는지, 재판장은 업무를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재판장은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다가는 평생 괴롭힘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게 된다.
눅 18:4-5 /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2. 하나님 아버지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시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불의한 재판장이 하나님이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과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 과부처럼 떼를 쓰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귀찮아서라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시다. 또한 기도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것 얻어내려고 막 조르며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떼를 쓰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때도 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머물 때나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실 때는 그렇게 해주기도 하신다.
철없는 어린아이는 상점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하여 사달라고 조르는데 부모가 안 사주면 아예 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러면 부모는 창피해서라도 장난감을 사서 아이의 손에 쥐어주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속상하지만 철없는 아이의 요구를 그렇게라도 들어주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우리 영혼에는 별 유익이 없다.
시 106:13-15 / 그러나 그다지도 쉽게 그들은 주께서 하신 일 다 잊어버리고 주께서 무슨 일 하실까 기다릴 새도 없이 함부로 행동하였습니다. 14) 빈들에서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그토록 하나님께 까탈을 부리고 주께서 어떻게 하시나 보자고 시험까지 하였습니다. 15) 주께서는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저희들 가운데에 무서운 괴질을 퍼뜨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욕심을 내고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면서 떼를 썼는데, 결국 요구한 것을 받았으면서도 영혼이 쇠약해졌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였다. 왜 요구한 것을 받았는데도 영혼이 풍성해지지 않고 파리(쇠약)해졌을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응답의 내용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물 자체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장난감 못 갖는다고 떼쓰며 누워버리는 아이는 아빠 엄마가 남들 앞에서 얼마나 곤란해 하는지, 자기 장난감 사줄 형편이 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원하는 것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떼를 쓴다. 너무 어리고 자기 밖에 모른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서 그 아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지면 변하게 된다. 오히려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참을 줄 알고 인내를 배울 때 성숙해진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게 될 때 철이 들기 시작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떼를 써서 응답받는 기도는 자기가 영적 어린아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절히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도는 항상 간절해야 한다. 부르짖는 기도, 눈물의 기도, 때로는 생명을 건 기도도 필요하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그렇게 해야 한다. 아무 때나 막무가내로 조르거나 떼를 쓰는 기도는 유익하지 않다. 기도를 그런 식으로 오해하게 되면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는 낙심하게 된다.
▶ 그렇다면 과연 기도란 무엇일까? 계속 언급하는 바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친밀한 교제이다. 이 사귐 속에서 잘못을 고백하기도 하고, 그분을 찬양하기도 하며, 그분께 감사도 드리고, 그분의 뜻을 여쭈어보며, 필요를 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보면서, 하나님을 번거롭고 귀찮게 해드려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핵심은 그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뭐라고 결론을 내리실까?
눅 18:7-8 /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주시지 않겠느냐? 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물며 불의한 재판장도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과부의 간청을 번거롭게 여겨서 들어주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 값을 통해 구원하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택하신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와 그 관계 안에서 살라는 것이다.
요 15:4-8 /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게 하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살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만일 누구든지 나를 떠나면 필요 없는 가지처럼 버려질 것이요, 말라서 다른 것과 함께 묶인 채 불에 태워질 것이다. 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살며 내 말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거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내 참제자가 된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 본문 7절에서 중요한 말이 무엇인가?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늘 부르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되면, 기도가 당장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믿는다면 떼를 쓰기보다는 간절히 아뢰며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를 향한 그분의 선한 뜻을 믿기 때문이다. 나를 자녀로 삼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분명히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요 15:14-17 /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나는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은 종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내 친구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모든 말씀을 너희에게 다 말하였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그러니 세상에 나가 항상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 17)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기도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어떤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본문 문맥상으로 볼 때 ‘기도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항상 대화하고, 말씀드리며,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다. 내가 원하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그렇게 믿음으로 간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도 응답이 안 되어도 끈질기게 기도하며 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본다. 인내가 부족하다. 아니,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한 것이다. 커다란 열매는 원하는데 가지의 굵기는 1mm도 안 된다면 문제가 아니겠는가? 커다란 열매라도 열리게 된다면 가지가 지탱하겠느냐는 말이다. 커다란 열매를 원한다면 최소한 1cm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믿는 것인지, 무엇을 믿는 것인지 모른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 잘 듣는 알라딘의 램프 거인과 같은 하나님을 만들어내어 경우가 참 많다. 바로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가진 ‘내가복음’이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리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이 잘 안 되면 쉽게 포기하거나 분노하거나 낙심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말을 들어야 하는데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은 주인이 뭐라고 하든지 화가 날 이유도 없고 실망할 이유도 없다. 내 의견을 말씀드리고 그것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고, 그것보다는 다른 것을 하라고 하면 주인의 뜻을 존중하며 그대로 행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종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니 문제이다. 하나님이 내 종인데, 종이 감히 주인인 내 말을 안 들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지연될 때 낙심이 되고 화가 나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즉 마지막 날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을 보겠느냐고 되물으시는 말씀이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지만 정작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당시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을 예수님은 미리 다 아셨습니다.
눅 6:46-49 / 너희는 내 말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왜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느냐?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그렇다면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 뜻이나 내 타임 테이블대로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며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겸손히 구하며 그분과의 관계에 힘쓰는 사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는 사람이다. 그런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 세상 끝날 예수님이 오실 때 그런 믿음의 사람을 찾으실 것이다.
혹시 기도하다가 응답이 오지 않거나 거절당했다고 생각하여 낙심한 상태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두 가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❶ 지금 나는 과연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❷ 누가 정말 내 삶의 주인인가?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정직하게 찾는다면,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3. 여호와로 쉬시지 못하게 하라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10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 10년의 걱정거리가 10분의 기도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기도의 능력이 강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기도의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 같은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기도를 귀찮아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으시다. 오히려 우리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기만을 기다리신다.
사 62:6-7 / 예루살렘아, 내가 네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워놓았다.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 부르짖는 파수꾼들을 내가 세워 놓았다. 쉬지 않고 여호와께 예루살렘을 상기시켜 드리는 임무를 내가 그들에게 맡겼다. ‘너희는 어느 순간에도 편하게 쉬지 마라. 7) 너희는 동시에 하나님에게도 전혀 쉬시지 못하게 하여라. 주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시되 온 세상이 보고 찬양할 정도로 찬란하게 회복시켜 주실 때까지 너희는 주님을 조금도 쉬시지 못하게 하여라.’
하나님께서 자꾸 약속을 잊어버리셔서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자꾸 쉬려고 하시니까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니까 기도를 통해 말씀드리며 우리들 스스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즐거워하며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시도록 기도로 말씀을 드리라는 것이다.
시 121:3-4 / 너를 쓰러지지 않게 하시려 주께서는 너를 지키시며 졸지도 아니하신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신다.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왕하 19:30-31 / 나의 약속을 믿고 그때까지 살아 남는 유다 사람들은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식물과 같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31)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에는 남은 자들이 있고 그들이 유다 땅에서 다시 머물러 살 것이다. 나 여호와가 그렇게 작정하였으니 꼭 그대로 하겠다(나 주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기를 쉬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슬프시게 하고 근심하시게 만드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지 못하게 하고 날마다 쉬시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 너무나 일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하나님, 너무 설치지 마시고 저기 구석에 가만히 계세요. 이 일에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제가 다 알아서 하면 돼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많은 분들이 기도에 대해 오해한다.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다 알고 계시고 또 얼마든지 나를 인도해줄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내가 귀찮게 기도로 아뢰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나 자신의 기도를 넘어 이웃을 위한 기도,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위하여 주야로 깨어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기도가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 동참한다는 벅찬 감격과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다.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안 되더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기도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다. 마귀가 옆에서 “뭐 하러 기도하니? 응답되지도 않는데?”라고 속삭이는 유혹에 금방 넘어가서 기도를 멈추고 만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상 숭배로 황폐하게 된 이 땅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무릎을 꿇고 기도의 손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맺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 하자.
■ 미국에서 유명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저자가 마거릿 미첼은 다리가 절름발이가 된 후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7년에 걸쳐서 힘들게 썼는데 그 원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여러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딱지를 맞고 뒤돌아서야 했다. 정말 낙심천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는 한 출판사의 사장이 기차를 타고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역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원고 뭉치를 그 사장에게 건네주면서 간청했다. “제발 이 원고를 한 번만이라도 읽어주세요!” 사장은 하도 간청하기에 원고를 받아서 가방에 집어넣으며 속으로 “내가 뭘 이런 원고를 읽겠는고. 이름도 없는 무명의 여자가 쓴 작품을.” 그리고 사장이 다음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전보가 하나가 와 있었다. 마거릿 미첼이 보낸 전보였다. “제발 저의 원고를 읽어 주세요.” 사장은 웃으면서 전보를 찢어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또 전보가 왔다. “제발 내 원고를 읽어 주세요.” 그 다음날 또 전보가 왔다. 출장 다니는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전보가 왔다. 그러니까 귀찮아 견딜 수가 없었고 안 읽어 주면 전보가 한평생 따라오면 이것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그래서 그 원고를 저녁시간을 내서 읽었다. 너무 재미가 있고 감동이 돼서 새벽까지 안자고 읽었다. 드디어 그 원고를 출판했고 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가 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이 된 것이다.
■ 기도 생활이란 인내를 요구한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내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인내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한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의 성자하면 어거스틴을 꼽는다.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방탕아가 되어 술과 여자로 세월을 낭비하는 아주 엉망진창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색잡기에 빠져있는 아들을 놓고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것도 1년도 아니다. 10년도 아니다. 아들이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장장 30년 동안 기도했다. 물론 그녀의 마음에도 낙심이 찾아 왔을 것이다. ‘이 아들이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30년 동안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와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냥 예수만 믿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정립하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게 하셨다.
결 론
사람들이 기도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라고 하기보다 구걸이다. 기도는 특권이므로 당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한다.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달라고 한다.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해주시는 것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자식이 매어달리면 부모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고 매달려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택하심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고 그 권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특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롱에 넣어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특권은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 예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간단히 말씀하실 수 있지만, 이렇게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들 들어 말씀하신 것은 기도가 택함 받은 자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만이 갖고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할 권리가 있음을 알고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자.
■ 엘리스 그레이스라는 사람이 ‘내 인생을 바꾼 가족사랑’이라는 책을 썼다. 그녀는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5살짜리 딸이 아빠에게 다가와 다소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너무 더운데 수영장에 가면 안 돼?”, “나중에 가자꾸나.”, “왜 오늘은 안 돼?”, “아빠는 수영장에 갈 돈이 없어서 지금은 못 간다.” 그러자 딸아이는 아빠의 말을 듣자 “나는 하나님한테 부탁할 거야!”하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빠는 호기심이 생겨서 딸의 방문 앞에 서서 딸이 무엇을 하는지 엿들었다. “하나님, 여기는 오늘 너무너무 더워요. 진짜 너무너무 더워요. 그래서 나는 수영장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아빠는 돈이 없어서 저를 데려갈 수 없대요. 그러니 제발 하나님이 어떻게 좀 해 주실래요?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멘.” 기도를 마친 아이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수영복을 입었다. 목에다 수건까지 두르고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는 밖에 나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건지 기다릴 거야!” 딸아이는 무릎에 팔꿈치를 붙이고 손에 턱을 받친 자세로 현관 앞 계단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바로 그때 집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이웃집에 사는 부인이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친해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금 컨트리클럽으로 수영을 하러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가면 어떨까요? 저희에게 무료로 수영할 수 있는 표가 있거든요.” 이때 그 딸의 아빠는 얼른 대답했다. “좋지요! 그런데 언제쯤 가실 계획인가요? 저희가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요. ….” 그러자 이웃집 부인이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도 아직 준비가 전혀 안 됐거든요. 사실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영장에 갈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고 싶어서 전화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나이가 상관없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남자나 여자가 상관없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때와 장소가 상관없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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