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은 2022년 청계문학회 詞華集『청계의향기4집』에 게재된 수필입니다.
<개암/ 金東出 隨筆> 친구와 돋보기
일요일 오전에 친구 海村이 문병 오겠다며 나의 사정을 묻길래 점심 식사 후 오후에 오면 좋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요일이라 아내를 외출 보내고 나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어 심심한 터라 온 보고 싶었던 친구의 병문안 전화가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하지만 오랜 병원 생활에 지쳐서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무슨 핑계를 대며 다음 기회에 오면 좋겠다고 전화할까도 싶었지만, 어려울 때 竹馬故友한테 도움 좀 받으면 뭐 어쩌랴 싶어 다시 전화하여 염치 불고하고 대뜸 친구야 ‘나 돋보기 한 개 사다 줄래’ 부탁하며 눈에 맞는 도수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하여, 일요일 특식으로 나온 점심 식사를 거들떠보기도 싫어 환자용 식반을 그대로 내어놓고 그때부터 벽시계만 쳐다보며 친구 오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체격이 우람한 낯익은 초로의 신사가 병실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눈이 빠지라 기다렸던 죽마고우 내 친구였다. 두 손을 마주 잡는 그 순간 너무 반가워서 가슴이 떨렸다. 3년 만에 만나게 된 친구를 하필이면 병실에서 맞이하게 되니 괜히 쑥스러웠다. 친구는 양과자와 청포도가 든 무거운 짐보따리를 내 침상 아래에다 아무렇게 내려놓고 연신 땀을 훔치면서 양복저고리 호주머니에서 내가 부탁한 돋보기안경을 꺼내어 얼른 껴보자며 나의 얼굴에 금속 테 돋보기안경을 끼워주었다. 거기다가 심심할 것 같아 사 왔다는 시집도 한 권을 건네주기에 얼른 돋보기를 쓰고 펼쳐보니, 병실에 나도는 신문도 못 보던 내 시력이 금방 되살아나는 듯 시집의 글줄이 뚜렷하게 너무 잘 보였다.
친구와 나는 당직 간호사의 허락을 받아 입원한 후 처음으로 병실을 나와 야외의 광장처럼 넓은 병원 1층 만남의 광장 카페로 내려가 보았다. 답답한 병실을 나가고 싶은 내 마을을 알아차린 친구 도움이 없었으면 휠체어를 타고 앉아 철제 링거 폴더에 무거운 링거를 달고 있는 중환자인 나 혼자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모험이었다.
비어있는 벤치를 찾아 앉은 우리는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두 손을 잡고 그간의 안부를 나눈 후에 휴대전화기를 번갈아 넘겨 기념사진을 찍었다. 청춘남녀들의 소개팅도 아니건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휴대전화기에 담은 두 사람의 사진을 내어 보니 마치 어른과 아이가 뺨을 맞대고 있는 듯한 대조적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니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어색한 마음도 닫힌 말문도 술술 풀렸다.
먼저 내가 문병 온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여기까지 온 답답한 사연을 대충 얼버무려 말한 다음,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에 서로가 잘 몰랐던 친구들의 뒷담화와 고향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좀체 제 마음을 보이지 않는 친구는 나의 부질 없는 고향 이야기 끝에, 비행기를 타고 ‘동남공단으로 출장 갈 때마다 우리 고향 ‘거제도 상공을 돌아 김해 공항으로 접근하려고 선회할 때 창밖으로 부모님의 산소가 보인다.’라며 눈가를 적셨다. 우리는 30 여분에 불과한 짧은 해후를 아쉬워하며 나를 병실까지 데려다주고 나가려는 친구를 재촉하다 내가 그만 울먹이는 통에 친구의 바쁜 발길을 되레 붙잡고 말았다.
그렇게 친구를 보낸 후, 지난 1971년 3월에 처음 만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는 友情을 이어 오고 있는 친구 ‘海村’을 생각해 보았다. 세상을 먼저 산 맏형 같은 친구는 만날 때마다 푸근하고 여유가 있어 참 대하기 편하다. 그런 친구에게 평생 준 것 없이 받기만 하고 살았는데 오늘 또 친구의 신세를 지고 보니 팍팍하게 살아온 나의 교직 생활이 너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친구는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로 산업기계 볼베어링 제조회사에서 잔뼈가 굵어져 지금은 인천에 있는 한 산업 공구 전문 수입회사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몇 해 전 한겨울 창원공단으로 출장 온 길에 마산에 사는 우리 부부를 자신이 머물고 있던 창원의 번화가에 있는 호텔 내 양고기 전문식당으로 불러내어 평소 맛보기 힘든 양고기에다 반주로 유럽 출장길에 사 온 프랑스산 포도주까지 가져와 대접해 주었다.
친구는 거제도 장승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나와 같이 다녔다. 장사 수완이 좋은 부모님 덕분에 유년 시절을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성품이 넉넉하고 도량이 넓다.
내가 1981년에 두 번째 臨地로 거제시 장평초등학교에 발령받아, 비워 둔 교장 사택에서 곁방살이할 때 친구는 제대 후 D 전자 고현지점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그때도 친구는 신혼살림을 차리고 사는 우리 부부를 읍내로 불러내어 맛있는 저녁을 사주곤 하였다.
친구가 군대 생활할 때도 사흘이 멀다고 엽서로 서로의 안부를 나누었는데, 그 시절에 친구가 보내준 수십 장의 엽서는 고등학교에 다녔던 내 여제들의 글쓰기 교과서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들의 소중한 우정이 담긴 엽서가 대우조선 공단 배후도시 개발로 생가가 헐리는 바람에 모두 망실하고 말았다. 모두가 교직 생활 때문에 일찍 향리를 떠난 내 탓이다. <미라보다리의 추억> 등 '청년 시절의 낭만과 문학도로서 타고난 어진 心性으로 찾아낸 수십 편의 유명 詩와 수필과 名文이 적힌 그 엽서는 이미 사려져 아쉽기만 데, 오늘 친구가 사준 돋보기를 끼고 보니 신기하게도 그 엽서의 한장 한 장의 글귀가 되살아난다.
그때 친구가 보내준 논리정연한 짧은 글은 나를 비롯한 우리 男妹들의 知的 成長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로 인해 내가 文學의 白眉 詩와 隨筆을 알고 世上의 知性을 깨닫게 된 것 모두 내 친구 덕분이다.
친구가 가고 난 뒤에 친구가 사다 준 돋보기를 끼니 친구의 고마운 맘이 새롭게 보이고, 거의 외우다시피 한 명문의 글귀들과, 제대 후 그 시절 유행한 장발을 자랑하며 멋을 부렸던 청년 시절의 친구 모습과, 친구를 찾아가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었던 우람한 체구를 가진 친구네 가족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청년 시절에 친구와 즐겨 불렀던 ‘둘 다섯’의 ‘밤배’를 흥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2019년 8월 18일 병실에서)
첫댓글 일생에 마음 나눌 친구 한사람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하던데
선생님은 정말로 그에 합당하십니다.
교정하기 전의 원고를 올린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곳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