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곡성 옥터(곡성 성당)
도로주소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읍내11길 20
성춘향이 그네 뛰던 남원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20km 남짓한 거리, 파란의 역사를 간직하고 수려한 자태를 보이는 지리산 국립공원 산자락 아래 자리한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발상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 터가 있는 곳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러던 중 1827년 전라남도 곡성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그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순교 복자 한덕운 토마스(韓德運, 1752-1802년)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졌을 때, 거나하게 취한 한백겸은 신입교우인 주막집 주인 전씨의 부인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남편 전씨가 홧김에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그를 포함해 몇 명을 관가에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1958년 건립 후 2006년 개축공사를 통해 정해박해를 상징하는 옹기 가마터 모형의 돔형으로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한 성당 내부.곡성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피신하는 신자들을 따라 탄압의 손길이 퍼져 나가 급기야는 순창 · 용담 · 임실 · 장성 ·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데 전주 감영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그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김광문(金光文)이 추위와 더위,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장계 고을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박해 시초에 곡성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2001년 성역화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성당 뒷마당에 조성한 하늘못. 옹기를 구우며 신앙생활을 유지했던 선조들의 삶을 상징하는 연못이다.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 세례자 요한은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 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행적 중에 일부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뚫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1780-1802년)와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년)도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순교하였다.
믿음의 자유를 얻은 후 광주 교구는 1957년 순교의 현장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자수가 10명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해 당시 감옥 터였던 객사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여 1958년 8월 15일 본당 설립에 이어 그해 10월 6일 성당을 준공하였다.
2006년 성당 제대 뒤편 공간에 개관한 옥터 전시실 내부.2001년 곡성 성당은 성지 조성을 계획을 발표하고 성역화 사업을 본격화하여 이듬해 7월 정해박해 순교성지 기념 ‘하늘못’ 축복식을 가졌다. 하늘못은 당시 신앙 선조들이 생계와 신앙 유지를 위해 옹기를 구우며 생활해왔던 삶을 상징하는 옹기 형태의 연못이다. 하늘못 옆에는 자연석 제대를 마련하여 순례객들이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옥터 위에 세워진 본당 역사에 걸맞게 2006년 낡고 오래된 성당에 대한 개축공사를 실시했다. 성당 내부를 정해박해를 상징하는 옹기 가마터 모형의 돔형으로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했고, 쇠사슬에 묶인 예수님 성상을 제대 옆에 설치하여 박해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또 정해박해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옥터 전시실도 개관했다.
2007년 정해박해 180주년을 재조명하는 학술제를 개최하고, 2008년 10월 12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당 마당에 옥사(獄舍)를 복원하고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등 주변 공원화 사업을 펼쳤으며, 미산 가마터와 성당을 잇는 정해박해 기념성지를 조성하고 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와 1839년 기해박해 때까지 12년 동안 전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 등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9월 4일)]
정해박해로 체포되어 전라도에서 순교한 이들 중 이름이 밝혀진 분들
복자 이경언 바오로(1792-1827년)
‘종회’ 혹은 ‘경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경언(李景彦)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 냈다. 또 22세 되던 해에 한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범적인 인내로 이를 극복하였다.
평소에 이 바오로는 속병이 있어 자주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불평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화평한 얼굴로 생활하였으며, 자주 성경을 읽거나 깊은 묵상에 빠지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1819년에 순교한 조숙 베드로가 이러한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 바오로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를 이용하여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였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주느라 힘썼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이 바오로는 언제나 마음속에 순교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자주 묵상하였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천주를 위해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곤 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 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 관아에 고발되었다. 이내 전주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한양에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는 먼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앙을 고백한 다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되었는데, 이후의 사실은 그 자신이 전주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오직 형과 누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전주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세 통의 서한을 작성해 보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 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 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보편된 아버지께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느라 노력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약했던 이경언 바오로의 육체는 더 이상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으며,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하느님께 영혼을 바쳤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경언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대권 베드로(?-1839년)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은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였다. 그 사고 뒤에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김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 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김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김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차례 신앙을 증언한 김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김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대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신태보 베드로(1769?-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태권 베드로(1782-1839년)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뒤에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아홉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 나갔다. 또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천주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동생만을 피신시켰다.
과연 얼마 뒤에 포졸들은, 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났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베드로는,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권 베드로는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옥중 수기를 남겼다. 한편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태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일언 욥(1767-1839년)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李日彦)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관명(冠名)은 태문(太文)이었다.
이 욥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묵묵히 참고 따름으로써 참다운 신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관장의 허락 아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5년부터 이 욥은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하였다.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욥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에 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욥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바라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전주 관장은 이 욥을 처음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을 알아내고는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는 비록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없었지만, 신앙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 내 보는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곳에 있던 박해자들은 “우리가 그의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이 분명하이.”라고 수군거렸다.
문초와 형벌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욥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그를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이후, 이일언 욥은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동안, 이일언 욥은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들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일언 욥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의 손에 자라났다. 그는 관명(冠名)이 ‘만보’였으나, ‘태봉’이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디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정 바오로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 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때에 정 바오로는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이에 그의 마음에는 점차 순교의 뜻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는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 바오로는 무모함을 피하고자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가 자주 집에 들른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 바오로는 이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에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 바오로는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할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고, 이 사실을 깨달은 관장은 그를 투옥하도록 명령하였다. 정 바오로는,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정 바오로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이때에 정 바오로는 자신의 마음이 심약한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처형 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옥졸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정태봉 바오로는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지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정태봉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그 외에 김도명(金道明, 안드레아), 이성지(혹 李儒震, 세례자 요한), 이성삼(혹 李儒定, 요한)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