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14일(금) 예레미야 40:1-6 찬송 261장
1.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의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거나
네가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 (개역 개정)
- 예레미야의 재석방 -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함락을 전후로 한 예레미야의 선지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제34-44장까지 계속되는 일련 기사 가운데
예루살렘 함락 후로부터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정착할 때까지 일정 기간 동안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제40-44장까지 계속되는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으로,
예레미야의 재석방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본문은 예레미야가 다른 유다 백성들과 함께 포로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중에 라마에서 석방되어
미스바 그다랴에게로 가서 거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39:11-14의 내용과 부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예레미야가 시위대 들에서 석방된 것처럼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가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
라마에서 석방될 것처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즉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전쟁의 혼란 중에 다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거기서 사령관 느부사라단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석방된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가 다른 포로와 달리 이처럼 석방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 까닭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바벨론에 항복을
권유한 사실로 인하여 느부갓네살이 그를 친바벨론파로 오해한 까닭이다.
그런데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갈 경우
좋은 대우를 보장받을 것으로 나타난다.(4절)
그러나 예레미야는 친바벨론파도 아니며 일신의 안락을 위하여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고 항복을 권유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포한 것이요 근본적으로는 조국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다.
사실 그가 유다의 항복을 권유한 것도
백성들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사랑의 발로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에 대한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멸망한 지금 그는 영화가 보장된
바벨론 행을 포기하고 유다 땅에 남기로 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에 대한 백성들의 지금까지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며
백성들로 하여금 포로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바벨론행을 선택했다면
그의 예언이 진실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에 의해
거짓 선지자로 낙인 찍히며 그로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① 지도자는 언행이 일치될 때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과
② 우리들은 현실의 안일과 평안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 보장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마6:33)
4절)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그 중 한 길을 선택하라고 제안한다.
그 첫번째는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그 삶을 보장할테니
바벨론 땅으로 같이 가서 편히 지내자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가 원하는 아무 곳으로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그가 유다 땅으로 가고자 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래서 5절을 보면 그에게 그다랴에게 가서
그 백성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을 제안한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는 바벨론 땅이 아닌 유다 땅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이처럼 유다 땅을 향해 갔던 이유는
두 말할 필요없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끝마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의 끝나지 않은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으로 패망한 유다 땅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이다.
유다가 멸망하기 전 예레미야의 사명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면
유다가 멸망당한 후 그의 사명은 황량한 유다 땅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남은 백성들을 말씀으로 위로하며
심판의 역사 이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소망의 역사를 증거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남겨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 일신의 안위보다 소중하다고 믿었기에
느부사라단의 호의적인 제안을 거절하고
사명의 땅인 유다를 향해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로
그것을 끝까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되이 감당해야 했다.
한편 본문의 이면에서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 사이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 관련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느부사라단의 경우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스스로 사명을 중단할 수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갈 수도
혹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예레미야 스스로의 선택으로 취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명자로서 사명을 다하는 것, 사명의 땅에서 고난을 감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요, 반드시 감당해야 할 당위적 의무라고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유다 땅으로 간 것이다.
이러한 사명의식,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내 감당해야 한다는 굳은 의무감은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참으로 간직하고 붙들어야 할 바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명자들의 모습은,
사명을 감당하되 생명의 위협까지도 불사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목숨을 불사한다는 것은 사명을 다하는 것 외에
자신에게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사명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하였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자신의 안락과 안일을 위해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혹 사명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중도에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목숨을 다해 감당해야 하며
그것을 다 이루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있다.
하물며 하늘의 부름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