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쌀 몇 되박을 머리에 이시고 절로 가시는 할머니의 치마자락을 부여잡고 찾았던 작은 암자. 그때는 울긋 불긋한 색동웃을 입은 것 같은 단청이 너무 무서워 법당안에는 얼씬도 못하고 절입구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흙에 집,소,개등을 그리면서 지루함을 달랬는데, 한참이 지난후에야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띠시면서 자식들 잘되라고 빌고 또 빌었을 할머니께서는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산등성이를 넘어 집으로 오곤 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학창시절에 설악산 등반중에 봉정암 산장에서 하루밤을 자게 되었는데 너무나 힘들고 다리가 아파서 잠을 자는지 마는지 어렴풋이 꿈속에서 산사를 울려퍼지는 이상야릇한 목탁소리에 이끌려 산중을 헤매다가 깨어보니 목탁소리는 들리지 않고 몸은 잠잘때 그대로인데, 너무 신기하여 그후에도 여러번 봉정암 산장을 찾아가 봤지만 그 오묘한 소리는 못 듣고...
20여년이 지나 통도사를 찾은 나는 수련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을 청하기는 했는데 잠은 오지 않고 뒤척이다가 잠깐 잠들었을까 새벽 아침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20여년전에 봉정암에서 들었던 아련한 추억을 이곳 통도사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이또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바쁘다는 핑게로 내 팽기쳐진 나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통도사 홈페이지를 년초부터 뒤진끝에 그리도 가고싶던 통도사 여름 수련회 3차에 신청을 해놓고 휴가까지 내 놓았는데... 통도사 입소 2일을 남겨놓은 날 부장님께서 "구과장 휴가가 언제부터인가" "모레 부터 인데요" "사실은 임원회의가 있어서 자료 작성 때문에 그런데 휴가를 다음주로 연기하면 않되겠는가" 아풀싸 나는 뭣좀 할려고 하면 꼬이기만 하고, 짧은 순간이지만 머리속은 부장님 지시와 나(我)라는 존재 앞에서 고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나를 찾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해 왔다. 조직을 위하고 상사의 지시라면 조금은 불이익이 될지언정 따르는 성격이었는데.. 그러나 이번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휴가 계획을 미리 짜 놓은 거래서 않되겠는데요" 순간 부장님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볼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사실 부장님은 개신교의 투철한 신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있는 터라 "시골로 갑니다. 홀로계신 어머니 농사일도 도울겸...." "알았서요 그럼 할 수 없지" 조금 찜찜 하기는 했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통도사 수련회를 졸지도 말고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내것으로 만들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두뼘반의 좌복에 앉아서 10분도 않 되어 그것은 하나의 욕심일뿐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차라리 무릎과의 싸움이었고, 후회로 이어졌다. 10년만에 찾아왔다는 살인적인 더위는 산속 산사에서는 예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법복을 적시기에 충분했고, 앞에서 우리들을 위해서 무었인가 한가지라도 더 가르켜주시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강사스님,습의사 스님에게 민망할 정도로 무릎을 바꾸고 허리를 비틀고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쏟아지는 잠은 허벅지를 꼬집어도 무겁기만 한 눈꺼풀은 어쩔수 없었다.
저녁공양 시간은 더욱 나를 힘들게 했다. 입제식에 늦지 않기 위해서 점심도 거른채 한걸음에 달려와서 인지 뱃속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밥 달라고 날리인데... 밥을 앞에다가 놓고도 침만 삼키자니... 이를 어쩌나 공양을 시작은 했지만 절차가 복잡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습의사 스님의 "소리내지 마세요" "어시바루에 수저가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등 훈계중에도 밥은 넘어가고, 드디어 공포의 퇴수물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습의사 스님께서는 이번 기수는 발우공양하는 태도에서부터 퇴수물에 음식물 찌꺼기가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퇴수물을 전체 다 나누어 마시세요" 퇴수물은 앞에서 뒤로 보내지고 차례로 어시바루에 나누에 부어지고 있었다. 7조1번인 나는 오늘 아침 통도사행 버스 라디오에서 음악과 더불어 소개했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투병들은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가 진행중이었는데 무더운 날씨에 수통에 물은 바닥이 나고 적에게 포위까지 당해 기진맥진해 있을때 소대장이 물이 가득찬 수통을 꺼내어 소대원들한테 돌렸다. 꿀꺽 꿀꺽 소대원들은 수통에 입을 대고 돌려 마시고 마지막으로 소대장한테 왔을때 빈통이라고 생각했던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였다. 이에 탄복한 소대장은 기지를 발휘해 소대원 전원이 탈출에 성공했다」면서 아나운서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래! 설마 퇴수물이 제일 앞에 있는 나에까지 올려고... 그러나 그건 하나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앞에 도달한 퇴수통에 물은 어시바루를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었다. 다행이 선본스님의 배려로 적당히 마시는 것으로 일달락 되었지만 7조 도반님들이 1번인 내가 물이 몹시 곱을까봐 일부러 남겨두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이자리를 빌어 고맙게(?) 생각하는 바 입니다.
발우공양을 통하여 물질의 소중함과 더불어 자연을 아끼고자 하는 지혜를 터득할 수가 있었으며, 밥한톨 음식찌꺼기 하나 남김 없이 비우고자 하는 습성은 하산한 후에도 생활에 꼭 접목 하여 지키리라 마음 먹었다.
또한 새벽예불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산천초목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잠들어 있는 새벽 3시, 청아하고 낭낭한 목탁소리가 산사의 정적을 일깨우고, 습의사 각심스님의 채근에 두눈 부비고 참석한 예불은 드라마 시작을 알리는 범종 소리와 함께 스님들을 비롯하여 수련생들은 두손 모두어 합장 대기하고, 범종소리는 끊어질듯 이어지다가 설법전 법당안으로 이어져 지심귀명례~~ 두뼘반 좌복에 이마를 대고 머리를 조아려 원하옵나니 부처님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무한한 가피를 주시옵소서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장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다닐때 집을떠나 자취를 할때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108참회 때는 2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어려운 삼림살이에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했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이고, 생활이 조금 나아졌지만 아버지께서는 하던일 놓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밭에서 살다시피 하셨는데, 저승가실때 바리바리 싸들고 가시지도 못하시면서 그렇게 일만 하시다가 가신 아버지... 이제 철이 들어 효도해 드릴려고 했는데... 한번가신 아버지는 다시는 뵈올수가 없고, 땀인지 눈물인지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은 좌복을 적시고, 예불이 끝난 뒤에도 쉽게 자리를 뜰수가 없었다.
삼보일배에 대한 기대는 수련회 참가하기 전부터 관심히 컷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에 봉착해 있을때나 환경보호를 위해서 최후의 돌파구를 찾기위해 행하는 삼보일배는 세인에 관심을 갖기에 충분 했었다. 수련회 참가를 위해 통도사 일주문으로 걸어온 이길을 삼보일배로 다시한번 부처님을 뵈올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오늘 드디어 두려움과 호기심에 삼보일배는 시작이 되고... 목탁에 맞추에 수련생 전원은 석가모니불~~ 땅바닥에 무릎꿀고 두손 모두어 머리를 조아리며 석가모니불~~ 시골에 홀로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간절히 빌었다. 이한몸 땅바닥에 나뒹굴어 무릎이 까지고 피가 흐른들 어머니의 외로움을 얼마나 갚을 수 있을까 하고요. 목이 매여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꺼억 꺼억 울었다. 어머니 이제는 자주 찾아 뵈올께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계셔만 주시옵소서 대웅전이 가까워오면서 포교국장 선오스님의 목소리가 드리기 시작했다. 수련생들이 안스러워 마중나오신 선오스님을 보고는 복받쳐 오는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다. 대웅전 틀앞 모래땅에서의 108배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힘든일이 있어도 참아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셨다.
회향하는 날 해냈다는 성취감 보다는 무언가 허전하다는 마음이 더 들었다. 뜻모를 아쉬움과 좀더 열심히 참여하지 못한 죄책감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광화문 네거리를 꽉 메운 자동차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미소를 짓는다. 귀에는 법고소리,범종소리,목탁소리,새소리,물소리.... 모든 것이 그립습니다. "차수하세요" "묵엄하세요" 까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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