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80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도 부처님 법문에 의지하면,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제2의 석가(釋迦)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이 그런 문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어려운 문은 우리가 경을 배우고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받들어 가지고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그러나 쉬운 문은, 경을 외우지 말라 또는 참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소중하나 그러한 어려운 작업을 안 하더라도 가는 문입니다. 팔만장경을 누가 다 볼 수가 있습니까? 또 좌선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오십 년 이상 참선을 했지만,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쉬운 문은 별로 어렵지가 않으니, ‘자기 마음이나 모든 우주의 존재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요, 하나의 부처다.’ 그렇게 믿고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공부하기 쉬운 염불입니다. 이것이 쉬운 문인데, 제2의 석가 용수보살이 그 체계를 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다 염불을 제대로 하시고 계시겠지요? 그것이 제일 쉽습니다. 내가 부처고 또는 우주 본래의 자리,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이거늘, 부처의 이름을 외우는 것같이 더 쉽고 절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마음에다 우주의 훤히 열린 그런 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우주를 다 비추고 있습니다. 자기가 미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김씨라는 마음도 우주를 비추고 있고, 박씨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분의 마음도 모두가 다 끝도 갓[邊]도 없이 조금도 거리낌이나 장애를 받지 않고[無障無碍] 우주를 비춥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성자, 무위진인이 보면 우주는 이 사람 저 사람, 이것 저것의 광명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주 자체가 바로 무량의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원통하게도 우리 중생들이 무명에 가려서, 우주가 다 하나의 부처이고 하나의 광명이라는 진리를 모르는데, 그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대승 경전도 구절마다 모두가 하나의 법문이라, 이른바 일원론(一元論)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상을 보면,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상대로만 보지요. 이런 이원론(二元論)이나 삼원론(三元論)이 아니라, 우주는 본래로 일원론(一元論)이라, 하나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뭐라 이름을 불러야 되겠는데, 가장 절실한 이름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모두가 다 그런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이름 하나만 지었으면 공부하기가 참 쉬울 것인데, 그렇게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령대로 우리 공부에 손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 맞고 소중하니까, 이것저것 다 불러야 공부가 더 많지 않겠는가? 이런 것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고 혼란스럽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생각하니까, 참 하나로 간단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주 모두를 포함하다 보니까,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는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지금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 다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총 대명사를 부르는 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인데, 너무 이름을 많이 불러 놓으면 관념도 헷갈립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하시도록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벌써 보살 지위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 자리이고, 보살 지위가 아니더라도 본래로 하나의 생명 자리입니다. 그 보살들 이름은 모두 뿔뿔이 몸뚱이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나의 덕명(德名), 공덕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도 조금 똑똑하고 자리가 높으면 호가 여러 가지 있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무슨 회장, 무슨 회장 그런 이름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똑같이 부처님 자리도 만덕을 갖춘 자리라, 그냥 몇 가지 개념으로는 그 덕을 다 표현을 못해요.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 원행(願行) 쪽으로는 보현보살, 그렇게 붙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별명은 하나의 공덕명입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 본질은 바로 아미타불이라, 그래서 경전에서도 ‘나무본사 아미타불’이라고 읽습니다.
그러기에 신라 때 원효스님도 마을에 다닐 때, 표주박을 때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많이 불렀습니다. 고려 초기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대사(義天大師)도 그렇게 했고, 또 보조국사(普照國師)도 「염불요문」을 보면 그렇게 했고, 나옹대사ㆍ태고대사 다 그렇지요. 그런 분들은 될수록 복잡한 것을 다 합해서, 하나의 진리로 마음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도 아미타불로 하시고, 거기다가 나무(南無)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 우리 모든 생명이라든가 역량 모두를 아미타불로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본래 아미타불인 것이고 아미타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쪽에다 자기의 온 정력과 정성을 다 바쳐야 되겠지요.
그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아미타불에 대한 관념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부를 것인가? 그냥 이름만 부르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여태까지 익히고 배우고 습관성을 붙여 놔서, 자꾸만 잡스러운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의 소재를 어디다가 둘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데, 아미타불은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박한 단계에서는 부처님 상호를 관찰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모양 상호는 만덕을 갖춘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 부처님 얼굴은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지혜로 보나 덕으로 보나 또는 능력으로 보나, 만능의 상징으로 부처님의 상호가 나왔습니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삼아승지겁이라는 무수한 세월 동안 몇 천번도 넘게 자기 몸을 일반 중생한테 희생하고 순교했습니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겁劫 동안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라는 그런 근본 상호를 이루기 위해 모든 복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상호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닮아야 하겠구나 하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직 상(相)을 덜 떠난 염불인 것이고,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은 우주 어디에나 언제나 무엇이나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의 광명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무량광명 아닙니까? 아미타불 별명 가운데 무량광불도 있습니다. 또 아미타불은 바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우주의 생명 자체, 영생의 생명이기 때문에, 무량수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공덕을 다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름과 더불어서 부처님 공덕을 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한도 끝도 없이 잘 생긴 얼굴을 관상하면서 나도 닮아야 되겠구나, 나도 만덕을 다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시시때때로 자기라는 관념을 줄이고 정말로 공평무사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나 한도 끝도 없이 빛나는 아미타불을 외우시면 좋습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말하면, 우주의 참다운 모습을 담아서 하는 염불이기 때문에, 실다운 실[實]자, 모습 상[相]자,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또는 법신염불(法身念佛)이나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고 하는데, 실상염불과 다 같은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철학적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상호를 관찰하는 것은, 아직 상을 두어서 철학적인 염불은 못 되고 하나의 방편염불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모아져서 하나로 통일되면, 그때는 깊은 염불삼매라,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거기에 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소박하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 이름만 외다가 우리 마음이 오직 하나로 통일되는 게 염불삼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상상하면서 염불삼매에 들어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교학도 많이 배우시고 ‘조금 철학적으로 정말로 우주의 실상에 맞게끔 염불해야 되겠구나.’ 그런 분들은 실상염불ㆍ법신염불ㆍ진여염불을 하면서, ‘우주의 끝도 갓[邊]도 없이 만덕을 갖춘 진리가 어디에나 충만해 있구나.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하면, 이것이 이른바 가장 고도의 철학적인 염불이 됩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얼마나 공부를 해야 그렇게 될 것인가, 그런 의심을 품으시겠지요. 사실은 그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염불은 할수록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작업은 너무 지나치게 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마음도 피로해지지요. 그러나 염불이라는 것은 꼭 소리를 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소리를 내도 좋고 안 내도 좋고, 또는 가만히 앉아서 가부좌를 해도 좋고 걸으면서 해도 좋고, 또는 반쯤 앉아서 하든 반쯤 서서 하든 어떻게 하나 좋습니다. 조금도 제한이 없습니다. 또는 누워서 해도 무방합니다. 염불은 조금도 피로함이 없습니다. 우리 건강 상황에 따라서 편리한 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 거기에 다른 잡념이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통일되어서 삼매에 들어갑니다. 꼭 염불삼매에 들어가야 공덕이 나옵니다. 염불삼매에 안 들어가면 참다운 공덕은 미처 못 나옵니다. 한 번 하면 한 번 한 만큼 공덕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삼매에 들어가야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참다웁게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그러한 성자(聖者)가 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디.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