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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 - ①안경신,②윤희순, ③권기옥,④조화벽,⑤남자현,⑥안맥결,⑦유관순,⑧제주해녀항일운동,⑨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⑩김마리아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 목 차
●[머릿말]주목해야 할 잊혀진 여성광복군 - 광복의 빛이 되고 해방의 별이 되다
1.여자 폭파범으로 불린 독립투사 ‘안경신’ - "내가 가야 의심받지 않는다" 폭탄 갖고 뛰어든 임신부
2.여성의병장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윤희순-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있겠는가!
3.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 “3·1운동 이후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4.양양 3·1운동 불씨 지핀 조화벽 - 독립선언서 목숨 걸고 고향에 전달…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
5.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 남자현 - 남자와 똑같이 총 들고 손가락 잘라 혈서 써내려간… ‘만주벌 여걸’
6.‘여성독립운동가’에서 ‘서울여자경찰서장’이 된 안맥결 - 3·1운동·군자금 모금, 애국계몽운동 활동
7.3·1운동 대표 유관순 - "대한독립만세"...16세 소녀의 외침 ‘삼천만을 하나로’
8.제주해녀항일운동 - 거친 바다와의 사투보다 더 거셌던 대일투쟁
9.안중근 장군 어머니 조마리아 - "나라 위해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10.(끝) 김마리아 - “내 나라 내 주권 찾겠다는 마음 당연하지 않나요?”
[머릿말] 주목해야 할 잊혀진 여성광복군 - 광복의 빛이 되고 해방의 별이 되다
조국을 찾으리라 목숨 건 투혼이女 - 광복군 제1~5지대 등서 무장 투쟁
中·만주·임정활동서도 ‘종횡무진’ - 292명이 여성 독립운동가 서훈
삽화= 유환석 화백
처칠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는 없다는 뜻이지요. 과거 없는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이에 국방일보가 광복 72주년을 앞두고 국군 장병과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고, 안보 의식을 높이기 위해 여성의 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획했습니다.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짚어보면서 잊혀져 가는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비롯해 국내외 항일운동 및 의열투쟁, 광복군 활동 등에서 여성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활약상을 인물 중심으로 집중 재조명합니다.
35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많은 독립투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이 처한 환경의 제약을 뛰어넘어 저항 대열에 섰던 그들. 암울한 역사의 한 자락에서 마주했던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대할 때면 늘 놀라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들 중에는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한다!
비록 자료와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 또한 소리 없는 영웅이었다.
특히나 관심을 끌었던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은 역사 속 한국 여성에 대해 각인된 이미지를 과감히 무너뜨렸었다. 긴 머리를 모자 속에 감춘 채 장총을 어깨에 메고 적진을 향했던 여성!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이 물었다. “정말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성도 총칼을 들었을까?”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그들이 실존인물이었다고 말한다.
2017년 3월 1일 기준, 여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대상자는 292명이다. 의병활동부터 3·1운동, 국내 항일·의열투쟁, 학생운동·문화운동, 만주방면·노령방면·중국방면·임시정부·미주방면을 비롯해 광복군 활동에 이르기까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범위는 매우 넓다.
그중에 여성 광복군으로 활약한 29명은 전체 광복군 서훈자 중 19%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광복군 제1지대부터 제5지대, 그리고 무장투쟁의 일선에서 여성이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들 외에도 중국·만주에서의 활동과 임시정부 활동을 포함해 직간접적으로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투사는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군복을 입은 소녀, 조국을 생각하다!
결연한 표정이 자못 삼엄하게 느껴지는 사진 한 장. 가운데 자리 잡은 백범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양쪽에 군복을 입은 이들이 앉아있다. 사진 한편에 놀랍게도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쓴 소녀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창설요원이었던 김정숙, 민영주, 신순호, 오광심, 조순옥, 지복영 등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사천성 중경에서 각 지역의 군관학교 간부들과 독립군, 한인 청년 등이 모인 가운데 창설됐다. 광복군 대원들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 대륙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활약을 펼쳤다.
부족한 병력문제에 직면하면서 임시정부는 흩어져 있던 한인 청년들을 모집했고 광복군 대열에 여성도 투입했다. 그것은 창설과정에 함께했던 여성 대원에서 알 수 있다. 여성 광복군은 독립운동 및 광복군 지도자의 자녀 또는 부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고귀한 자의 의무)’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한국광복군은 타국에서 공식적으로 창설한 뒤에 재정 마련과 병력 모집에 나서며 군대의 편제를 갖춰나갔다. 1941년 11월 28일 발표한 한국광복군 공약 1조는 “무장활동으로써 적의 침략세력을 소멸하려는 한국 남녀는 … 한국광복군의 군인 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이라고 밝히며 남녀 구분 없는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여성 대원은 남성과 활동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광복군으로 배치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여성도 군복을 착용했고 군사훈련에 참가했으며 적진에 바로 투입됐다. 주로 심리작전 활동이나 초모(招募) 활동, 정보 수집, 대적 방송, 특수훈련, 의무대 활동 등을 하면서 독립운동의 전후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광복군,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들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첩보활동에 투입돼 활약했던 여성 광복군은 1963년 최초로 서훈을 받은 전흥수 여사를 포함해 많은 여성투사의 활약이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해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암울한 현실을 뚫고 일어섰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은 어떤 경계도 없었다. 황해도, 평안도, 서울,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 출생지를 두었던 그들이었지만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믿음은 오직 하나였다.
식민지배의 경험과 근대화의 흐름은 여성으로 하여금 주체의식 회복을 통해 독립운동 대열에 서게 했다. 여성 대원으로 활약했던 여성 광복군을 비롯해 일선 교육현장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애국계몽운동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손에 태극기를 쥐고 거리로 나섰던 여학생, 존중과 국권회복을 설파했던 여성 구국단체, 그리고 남편과 아들의 독립운동을 뒤에서 묵묵히 지원했던 어머니들. 그들 모두가 진정 나라를 사랑했던 한국의 어머니이고 한국의 여성이 아니었을까.
그 잊혀진 이야기를 광복을 위한 투쟁의 역사 일면에서 주목해보자. 비록 그들의 자료와 기록이 부족할지라도 한국 여성의 뜨거운 조국애가 역사 속에 숨 쉬고 있고, 올곧았던 나라사랑 정신이 선명했다는 것을 찾아가야 한다. 다음 주부터 여성 광복군과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그 활약상을 소개한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1.주목해야 할 잊혀진 여성광복군-광복의 빛이 되고 해방의 별이 되다 / 국방일보, 2017. 8. 6.
1.여자 폭파범으로 불린 독립투사 ‘안경신’
- "내가 가야 의심받지 않는다" 폭탄 갖고 뛰어든 임신부
1920년 8월 3일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 - 독립의지 세계에 알려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연락조직원으로 활동
중세시대에는 유죄와 무죄를 무장 대결의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결투재판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결투재판을 할 수 없는 어린이·여성·노령층의 경우 투사(鬪士)가 대신 싸우기도 했는데, 우리 역사에서 일제가 남긴 상흔(傷痕)만큼이나 탄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폭탄을 투척했던 여성, 안경신(安敬信·1888~?)도 있었다.
1920년 ‘독립전쟁의 해’ 선포한 임시정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던 임시정부는 100여 명의 미 의원단에 항일투쟁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국제 여론을 환기(喚起)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원 13명을 선발해 3개 결사대로 나누어 국내에 밀파했다. 그들 중에는 장덕진·박태열·문일민·우덕선을 비롯해 안경신이 소속된 결사대 제2대도 있었다. 폭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대원들은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평양부청에 폭탄을 투척하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먼저 8월 3일 밤 9시30분쯤 문일민과 우덕선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일제는 평양의 경계태세를 한층 강화했다. 밀파된 대원들이 삼엄해진 경계를 뚫기 위해 고심하던 중, 당시 임신부였던 안경신은 자신이야말로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동지들을 설득한 뒤 과감히 적진에 들어갔다. 움직이기도 힘든 임신부의 몸으로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임무까지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빗물에 젖은 폭탄은 불발로 그쳤다.
이날 이후 8월 15일과 24일, 9월 1일 선천역·선천경찰서를 잇따라 폭파하는 등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이와 동시에 평양거리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전 광복군사령부)의 인장이 날인된 경고문과 격문(檄文·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부추기는 글)이 뿌려졌다. 이에 일제 경찰은 폭파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평양 시내를 샅샅이 뒤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여자 안경신’ 동아일보 1921년 6월 21일 자 사진.
갓난아이 안고 법원에 들어선 안경신
평남경찰부 폭탄 거사에 함께했던 대원들은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서간도로 귀환했다. 하지만 임신 7개월로 몸이 무거웠던 안경신은 대원들의 안전과 몸에 무리가 될 것을 염려해 조국에 머물렀다. 대원들이 귀환한 뒤에도 안경신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원에게서 폭탄 한 개를 건네받은 그녀는 다시 거사를 도모하려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잠시 몸을 피해 일제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함경남도 이원군 최용주 집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돼 안경신은 1921년 3월 20일에 체포됐다.
함경도에서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안경신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12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됐다.
폭파범으로 주목받던 안경신의 행적은 조사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1919년 평양 서소문 일대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경찰에 체포돼 29일간 구금된 사실이 밝혀졌다.
평남도청 폭파 사건 주역으로 징역 10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안경신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 3·1만세운동부터 애국 투쟁 대열에 들어섰다. 그는 백범 김구의 동지이자 평양교회 목사였던 도인권(임시정부 군사국장 활동)과 1919년 평양 3·1만세운동을 총지휘했던 이승훈(3·1운동 민족대표 33인), 대한애국부인회를 함께 했던 안정석(송죽결사대 조직)과 함께 무장항쟁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3·1운동,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에 이어 평남도청 폭파 사건의 주역이 된 그의 이름은 1920년 11월 4일 조선소요사건의 ‘대한애국부인회 검거서류’에서도 확인된다.
안경신은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지회의 교통부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지방 연락조직원으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이런 안경신의 적극적인 행적이 확인될수록 그에 대한 조사가 길어졌고,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윽고 1921년 5월 10일 위증 혐의로 징역 1년 구형에 이어 6월 4일 형사부 법정 제2호실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결국 사형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소(抗訴)한 안경신은 1922년 4월 8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남도청 폭탄범 안경신 아이를 품에 안고 감옥에’라는 제목의 1921년 5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전해주지 못한 훈장
징역 10년의 세월 동안 안경신은 태어난 지 12일 된 아기와 헤어졌다. 출옥 후 3년 뒤에는 친정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시는 등 슬픈 일을 겪었다. 이윽고 형을 몇 달 남긴 채 출옥해 8살이 됐을 아이를 찾아 나섰다.
어렵게 찾은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돼 있었다. 참담하리만치 힘겨웠을 안경신의 생애는 그 시대 나라를 잃고 설움에 북받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모습과도 같지 않았을까.
평남도청 폭파범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주목받았던 안경신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폭파범으로 잡혔을 당시 그녀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수감 기록, 신문 보도자료 몇 점이 전부다.
독립투사 안경신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의 공적을 인정해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아직도 후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전해주지 못한 훈장! 그 시대 정의를 실천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떠올려 본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1.여자 폭파범으로 불린 독립투사 ‘안경신’ - "내가 가야 의심받지 않는다" 폭탄 갖고 뛰어든 임신부 / 국방일보, 2017. 8. 11.
2.여성의병장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윤희순
-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있겠는가!
정미의병 때 ‘안사람 의병단체’ 결성…의병운동 25년·독립운동 15년
국권 상실 후 中 망명…항일 인재 양성기관 ‘노학당’ 만들어 교장 부임
남편·자녀·손자까지 독립투사…여장부 이전에 자애로운 어머니이기도
“저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한민족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한국의 국권을 찾기 위해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한 여성의 비장한 연설은 가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쪽 찐 머리에 움푹 파인 이마 주름, 그리고 핏발 선 눈에는 강인한 여인의 의지가 느껴졌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쏟아내는 그의 연설에 걸음을 멈춘 이들은 간간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있겠는가!”라고 외쳤던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한말(韓末) 최초의 여성의병장으로 활약한 ‘윤희순 의사(1860~1935)’이다.
사실 필자가 여성독립운동 연구를 시작한 것도 윤희순 의사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의병운동 25년과 독립운동 15년, 40년간 독립활동에 투신하며 집안 4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던 여장부의 존재에 필자는 단숨에 매료됐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지배했던 유교 사회에서 ‘안사람 의병단체’를 이끈 여성의병장, 그리고 중국에서는 ‘노학당’의 교장으로 애국 인재 양성에 투신했던 그의 행적을 추적할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윤희순 의병장 영정.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윤희순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에는 계모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아픈 성장기를 보냈다. 16세가 돼 집안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화서학파의 고흥 유씨 집안과 혼인을 했지만,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고흥 유씨 집안은 조선 후기 국권수호운동 및 구국운동인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의 주역을 다수 배출했다. 시백부 유인석은 초기 항일 의병운동을 이끈 13도 창의군 도총재, 시아버지 유홍석은 제천의병장, 남편 유제원도 의병활동을 하는 등 집안 전체가 의병운동에 투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시행에 반기를 들었던 을미의병과 1907년 고종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저항했던 정미의병에서 항일 의병운동에 투신했던 시댁 집안의 영향은 윤희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윤희순은 을미의병에서는 의병가사 제작·배포와 의병 뒷바라지를 했고, 정미의병에서는 춘천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안사람 의병단체’를 조직해 화약과 탄약 제조, 군사활동, 정보수집 등 여성의병활동을 주도하면서 여성의병장으로 주목받았다.
2002년 8월 1일 중국 환인현 조선족 역사연구회와 환인현 보락보진인민정부에서 노학당 창립 90주년을 맞아 세운 윤희순 공적비. 필자 제공
왜놈 대장 보거라!
윤희순의 담대한 행동은 한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집안 전체가 의병으로 출정한 뒤에 그는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 그렇게 쓴 글은 일본군 대장에게 전달됐는데, 일본에 대한 경고와 확고한 저항 의지를 담은 격문이었다.
격문은 ‘왜놈 대장 보거라…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으로 당당히 이름을 밝혀 일본군의 공분을 샀다. 이외에도 윤희순은 ‘의병군가’ ‘병정가’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사와 서간문, 일생록 등 16편을 제작해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의 활약은 국내 의병운동에 그치지 않고 국권 상실 이후 중국 망명생활에서 더 적극적으로 드러났다.
애국 인재 양성학교 ‘노학당’과 무장투쟁을 한 ‘조선독립단’
중국 환인현으로 이주한 뒤 윤희순은 애국계몽운동의 열의를 가지고 독립운동가들과 ‘노학당’을 세우고 교장으로 부임했다. 교실과 운동장, 식당, 기숙사를 갖춘 노학당은 ‘문화지식이 있고 애국정신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 교육기관이었다.
역사·국어·수신·한문·작문 등을 비롯해 이화·산술·창가로 교과를 편성했고 인근 동창학교 교사였던 신채호·박은식·장지연 등도 수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은 개교한 지 3년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3·1 만세운동 이후 1920년 2월에는 ‘경신년 대토벌’을 감행해 서·북간도의 한인 3600여 명을 학살하고 3200여 채의 가옥과 학교·교회 등에 방화했다.
이에 독립단체는 일본군 공격에 무장투쟁으로 맞섰는데, 그때 윤희순은 흩어진 의병 동지와 애국지사에게 연락해 180여 명의 단체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독립단’이다. ‘조선독립단’은 한·중 연합투쟁을 펼치는 등 일제에 맹렬히 저항하는 무장투쟁 활동을 했다.
‘일생록’에 조국 독립을 염원한 마음을 담다
시백부·시아버지·남편에 이어 자녀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생존한 손자는 광복 이후 광복회에서 활동하며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집안 4대에 걸쳐 독립정신을 꿋꿋이 계승한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윤희순이 있었다.
일생을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해 항일투쟁의 현장에 섰던 윤희순은 여장부이기 이전에 자녀와 손자를 책임졌던 어머니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였지만 장남 유돈상이 무순(撫順)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하자 ‘일생록’을 지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충·효·의·예의 가르침을 적어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오직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그의 일생은 진정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2.여성의병장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윤희순-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있겠는가! / 국방일보, 2017. 8. 18.
3.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 “3·1운동 이후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온통 독립 위한 삶… 日 ‘용의 조선인 133’ 지목
늘 부국강병이 소원 ‘첫째도 둘째도… 교육’ 강조
중국군 비행사에서 임시정부의 주역으로 활약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에 대해 질문을 한다. 내가 만난 후손분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알리기 위해 시간을 쪼개 활동하는 후손들, 그들은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휘날리는 독립청년이었다.
교육 강조한 그, 전 재산 장학금으로
독립운동 관련 연구를 하다보면, 책에 담긴 지식보다 현장에서 가슴으로 배우는 때가 많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한국의 어머니들, 그들은 광복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광복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권기옥 여사의 후손 ‘권현 선생님’과 연락을 했다. 그가 기억하는 권기옥 여사는 “나는 늘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교육, 둘째도 교육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1975년부터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시작해서 1985년에는 전 재산을 정리해 대학 장학회에 기부했고, 2015년까지 서울대 학생 등 140여 명에게 ‘권기옥 장학금’으로 전달됐다는 것이다.
3·1운동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삶
광복 이후에도 독립정신을 실천한 권기옥.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19살 3·1운동 때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이후는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권기옥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시 숭의여학교에는 학내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대가 있었는데, 바로 송죽(松竹)결사대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기 있는 여학생이 모여 태극기를 제작,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그들은 평양 3·1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19세 소녀였지만 3·1운동 참여로 체포·고문을 당했고, 구류에 이어 6개월 수감되지만 이후의 활동은 더 가열했다. 그는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했던 ‘결백회’와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한 ‘면려회’, 순회 민중계몽활동에 주력했던 ‘브라스 밴드단’과 함께 평남도청 폭파지원, 여자 전도대를 조직하며 전국 강연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상해 망명의 길에 오른다.1
최초 여류비행사의 또 다른 이름, ‘용의 조선인 133’
권기옥의 치열했던 삶은 독립운동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주 감시 대상이었다는 것이 「용의 조선인 명부」에 기록된 ‘용의 조선인 133번 권기옥’에서도 드러난다. 1920년 평남도청 폭파사건에서 폭탄 제조를 도왔던 권기옥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상해로 망명하면서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많은 임시정부 요원들과 만나는데, 특히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미국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던 노백린과의 만남은 그가 잊고 있었던 비행사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하면 비행사의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부푼 비행사의 꿈을 안고 중국 비행학교의 문을 두드린 지 수차례, 드디어 권기옥은 1923년 말 중국 윈난항공학교의 제1기 학생으로 합격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비행기에만 몰두하며 학업에 열중하기를 여러 해, 1925년 2월 28일 첫 한국인 여류비행사로 소식을 알렸다.
중국군 비행사에서 임시정부, 한국애국부인회의 주역이 되다
타국의 비행사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의 감시와 타국의 설움,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으로 많은 책임을 감내해야 했다. 중국 항공처 부비행사, 국민정부 동로항공사령부 비행사 등 중국에서 그의 입지가 높아질수록 일본은 물론 중국의 감시는 격해졌고 간첩 혐의로도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남편 이상정이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권기옥의 활동도 임시정부 활동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한국광복군의 한·중연대와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 힘을 쏟았으며 여성독립운동가 단체결성에 앞장섰다.
1943년 2월에는 ‘3·1운동 정신 계승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여성항일운동 참여, 남녀 평등한 지위획득과 향유’ 등을 내용으로 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문’ 발표를 통해 여성독립운동가로 국내외에서 활약했다. 또한 임시정부 군무부 공군설계위원회 위원으로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작전 구상, 공군건설계획에도 적극 참여해 힘을 보태었다. 광복 후에도 그의 활동은 이어져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유일한 여성전문위원으로 초창기 한국군의 조직에 힘을 보탰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나라를 빼앗기는 건 한순간이었고, 다시 찾는 데는 36년이 아니라 50년이 걸렸다. 결국은 반으로 나뉘어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했구나…” 라고 탄식을 했던 권기옥이 평생 가슴에 품었던 나라는 부유하고 강한 나라! 다시는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였다. 늘 최초의 수식어가 따라다닌 당찬 신여성, 권기옥! 1911년 은단 공장의 여공으로 근무했던 그가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일선에 서며 주목받았던 이유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유와 평화를 갈망했던 순수청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3.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 “3·1운동 이후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 국방일보, 2017. 8. 27.
4.양양 3·1운동 불씨 지핀 조화벽
- 독립선언서 목숨 걸고 고향에 전달…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
1883년 9월 오하이오주 리베나(Revena)지방에서 이름 모를 노부인이 ‘한국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를 희망한다’며 2000달러를 헌금했다.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 1년 뒤에는 한국에 파견할 여성대표를 선정했는데 바로 스크랜튼 부인이다.
우리나라의 감리교는 1885년 미국 북 감리교의 선교사 파견과 함께 시작됐고, 한국여성의 배움은 미국 노부인의 귀한 뜻을 담아 실천한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
조화벽 애국지사
선교사 ‘캐럴’이 호수돈 여학교에 틔운 불씨
호수돈 학교를 창립한 캐럴(Mrs. Arrena Carroll Collyer)은 1902년 12월 원산으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는 1903년 6월 26일 원산 루씨여학교를 설립한 뒤, 1904년 12월에는 감리회 여선교사들과 함께 쌍소나무집 자리에 18명의 여학생을 받아들여 ‘개성여학당’을 설립했다.
1904년 12월 19일에는 정식 기숙여학교를 건립했지만 18명 중 2명은 나이가 어렸고 2명은 이사를 가서 평균 출석률은 14명, 기숙학생은 12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교육’ 의지 앞에 학생 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역의 목요동지회 학부모들이 교사의 월급을 지불했고 학교비용은 선교부에서 지원하는 ‘Eva 장학금’으로 충당되며 개성의 여성교육은 시작됐다. 하지만 아무도 이 작은 여학교에서 3·1운동의 불꽃이 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제의 조선교육령과 3·1운동의 준비
1911년 8월 23일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조선교육령 30조 중 제2조와 제3조, 제5조는 황국신민화를 위한 민족교육말살정책의 의지를 명확히 담았고, 여성교육은 제12조, 제15조, 제16조, 제17조로 규정해 남자교육과 차별을 담았다.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자 기독교계 학교의 선교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기독교계 선교연합회가 ‘기독교학교의 개정교육령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하자, 일제는 사립학교를 폐쇄하거나 관·공립학교로 전환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탄압을 시작했다. 그때 3·1운동도 비밀리에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양양정명학원 2회 졸업식(1914년 3월 25일) 필자 제공
호수돈 비밀결사대와 개성 3·1운동
3·1운동이 비밀리에 준비된다는 소식을 들은 호수돈 여학생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학생들은 거사일의 조직적인 활동을 논의하기 위해 저녁시간이면 교내 4층 기도실에서 밀회를 가졌다. 극비리에 기숙생 70여 명을 포섭해 연명선서를 만들었고, 밤새 4층 기도실의 커튼을 뜯어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외부와 접촉을 금하면서 만들어진 태극기는 기숙사에 보관했다.
3월 3일 거사일이 되자, 학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기도회를 향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분담했던 활동을 시작한다. 중부는 이향화, 동부는 조숙경, 서부는 권명범이 책임을 맡았다. 조화벽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은 대장의 암호를 따르며 다음 활동지시를 기다렸다. 대장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학생들은 기숙사 담을 뛰어넘어 대열을 이루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거리의 행렬에 일본 경찰은 총과 칼로 위협했지만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권애라(權愛羅), 장정심(張貞心), 조숙경(趙淑景)이 주도했고, 이향화(李鄕和), 권명범(權明範), 이영지(李英芝), 류정희(劉貞熙), 조화벽(趙和壁), 김정숙(金貞淑) 등이 대열을 이끌었다.
이윽고 한 학생이 민족자결주의를 연설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치자, 다른 학생들도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개성시민들도 합세하면서 만세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 규모로 확대됐고 개성 3·1만세운동의 불꽃은 시작됐다.
솜버선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독립선언서 전달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학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에 조화벽은 고향 양양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고 조국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비밀결사대의 맹약을 가슴에 담고 3·1운동의 상징적인 문서인 ‘독립선언서’를 고향 양양에 전달하기 위해 가죽가방을 들고 나섰다.
개성에서 경원선 열차를 통해서 원산에 도착한 뒤, 다시 뱃길로 대포항, 그리고 양양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서 조화벽은 독립선언서를 들키지 않기 위해 버선목 솜 사이에 숨기는 기지를 발휘하며 가까스로 삼엄한 검문을 통과했고 양양에 도착했다.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어린 소녀가 전달한 독립선언서는 강원 일대로 확산된 양양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유관순 열사 올케 ‘애국계몽운동가’
3·1운동 이후 조화벽은 투철한 국가의식을 가지고 교육계에 뛰어들었다. 공주 영명여학교에 이어 서울 배화여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원산 루씨여학교와 진성여고, 양양 정명학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봉급 중 일부를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원산에서 거주했던 7년 동안은 생활이 어려웠던 선박 노동자를 위한 ‘해원상구회(海員相求會)’의 부회장으로 선출돼 원산항 승선원들의 대책 마련에 앞장서기도 했다.
고향 양양으로 돌아온 1932년에는 양양 정명학원을 설립했다. 1935년 4월 8일 개원 이후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폐교당할 때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화벽은 유관순의 오빠였던 유우석의 부인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일생 동안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삶은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맹약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4.양양 3·1운동 불씨 지핀 조화벽 - 독립선언서 목숨 걸고 고향에 전달…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 / 국방일보, 2017. 9. 3.
5.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 남자현
- 남자와 똑같이 총 들고 손가락 잘라 혈서 써내려간… ‘만주벌 여걸’
19세 때 의병투쟁하던 남편 잃고 - 3·1만세운동으로 독립운동 투신
독립자금 모금·애국계몽에 열정 - 日 총독·대사 등 두 번의 암살 시도
불운과 밀정의 배신으로 실패 ‘분루’ - 임종 때도 ‘독립 염원’ 첫째 유언으로
‘만주벌 여걸’로 불렸던 여성! 가열한 독립운동,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남자현은 1000만 관객으로 흥행을 일으켰던 영화 ‘암살’의 모델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남자현은 정말 총독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을까? 그의 독립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자현 밀고자, 드디어 유죄판결을 받다!
1949년 3월 29일 오후 3시30분. 형무관에게 이끌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법원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가 법원을 가득 채운 채 재판이 시작됐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항변했다. “공산당을 잡은 나를 재판해? 나는 반공투사였고 애국자였다!” 그를 쳐다보는 방청객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재판이 끝났고, 재판부는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피고 이종형은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서 … 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애국지사 50여 명을 체포, 그중에 17명을 학살했고 … 하얼빈의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밀고하여 옥사케 했다 … 이에 법원은 이종형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드디어 남자현의 밀고자, 그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 남자현.
광복하면 ‘독립축하금’을 나라에 바쳐라
“30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단식 9일 만인 지난 17일에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 12시 반경에 당지 조선려관에서 영면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7일 자-
김성삼(남자현의 아들)은 잡혀간 어머니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성삼에게 일본 경찰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해서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니 만주 적십자 병원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다.
1933년 8월 22일이었다. 김성삼은 아들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정도였다. 남자현은 죽음을 직감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이제는 됐다. 조선인이 하는 여관으로 옮겨다오.” 하얼빈 지단가에 조선인 조씨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남자현은 아들과 손자에게 감추어 둔 행낭을 내밀었다. 그 행낭에는 249원 80전이 들어 있었다.
“내 말을 남기건대,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을 바치도록 해라. 그리고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를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손자를 찾아서 교육을 시켜라….”
행낭을 전하면서 남자현은 마지막 유언을 했다. 죽음이 임박했던 순간까지 조국 독립만을 염원했고, ‘독립축하금’을 부탁했던 남자현. 그는 1933년 8월 22일, 만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북 영양에 있는 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
‘여자 안중근’이라 불렸던 남자현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렸던 남자현에 관한 일화는 많다. 19세에 의병투쟁에서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으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는가…”라며 그는 3·1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울 신촌에서 쪽 찐 머리에 한복을 입은 채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했을 당시는 47세였다.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내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만주 일대에서 독립자금을 모금, 여성의 구국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여자교육회와 관련 단체 20여 개를 조직했고, 민족정신 고취와 문맹 퇴치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으로 여자권학회(女子勸學會)를 조직하며 50세를 넘겼다.
1920년 8월 29일 국치 기념대회에서 동포끼리 대립과 분열이 격화되자, 왼손 엄지손가락을 베어 써내려간 혈서를 들고 거침없는 소리로 통합을 강조했던 단지(斷指)사건의 주인공 남자현은 ‘독립계의 대모’ ‘세 손가락 여장군’으로도 불렸다.
하얼빈 여관에서 막 숨을 거둔 남자현.
사진은 ‘여자 안중근’이라 불렸던 남자현의 곁에서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임종을 지키고 있는 모습.
영화 ‘암살’의 모델, 일본 총독 암살이 사실이었을까?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일본 사이토 총독. 1927년 4월 그녀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들고 일본 사이토 총독 암살을 계획했다. 사이토 총독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문화정치’란 미명하에 지식인을 변절시키고 역사를 왜곡해서 조선인의 정신적 근간을 뒤흔든 장본인이었다.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방문하는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앞서 청년 송학선이 마차에 탄 일본 고관 3명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으로 경계가 삼엄해지면서 눈물을 머금고 남자현은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암살 시도는 일본 전권대사. 만주국 수립 1주년이 되자, 일본은 자축행사로 들떠 있었다. 남자현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33년 3월 1일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려고 준비했다. 거사를 앞두고 도외구도가 무송도사진관에서 동지들과 모여 최후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2월 27일 남자현은 거사 장소를 확인한 뒤, 노파로 분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나섰다. 오후 4시 즈음 남자현은 무기와 폭탄이 든 과일 상자를 운반하기 위해 남강 길림가 4호 마기원 집 문 앞에 섰다. 상자를 들고 골목을 나서는 순간, 조선인 밀정의 발고(發告)로 숨어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33년 8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에는 “부토 대장 모살범”이란 제목 아래 남자현의 순국 사실이 보도됐다. 남자현은 모살범이었나? 무장투쟁의 일선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운동가, 권총을 거침없이 손에 쥐었던 여성,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며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던 남자현은 ‘여성 영웅’이었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5.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 남자현 - 남자와 똑같이 총 들고 손가락 잘라 혈서 써내려간… ‘만주벌 여걸’ / 국방일보, 2017. 9. 8.
6.‘여성독립운동가’에서 ‘서울여자경찰서장’이 된 안맥결
- 3·1운동·군자금 모금, 애국계몽운동 활동…일생을 조국 위해 헌신
3·1운동 등 구금 고초 겪으면서도 숙부 안창호 옥바라지 챙겼으며
서울여자경찰서장 부임 뒤에도 애국 인재 양성 위해 헌신해
2017년 8월 15일 기준 - 여성독립유공자 서훈받은 이는 296명
독립운동가 증명 자료 부족으로 명예 회복 못하고 있는 사람 많아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 그가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옆에서, 인근에서, 그리고 국내외에서 함께했던 남녀 애국 동지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 안맥결
내가 수녀님을 만난 것은 몇 년 전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어머니의 명예를 인정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조카였던 어머니로부터 많은 일화를 들으며 자랐고 임시정부 관련 분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머니 ‘안맥결’은 현재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17년 8월 15일 기준 여성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이는 296명, 인정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 수는 2300여 명에 달한다. 그런데 그중에는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소명 자료가 부족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가 다수였다. 안맥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안창호의 조카,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
안맥결(1901~1976)은 평남 강서군에서 부친 안치호(안창호의 형)와 모친 박치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우려는 열의가 강했던 안맥결은 1916년 4월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숭의여학교는 송죽결사대가 조직돼 3·1운동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곳인 만큼, 평양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과정에서 안맥결도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간 구금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부친 안치호도 만세시위를 한 명목으로 1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한 이후에도 안맥결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으로 지목되자 일본 동경의 나카무라여자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국내로 복귀한 뒤에는 함북 보흥여고 사감으로 부임해 애국계몽운동의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안맥결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갖춘 여성이었다. 1927년 9월 관서지방 탄포리 교회에서 열린 종교강연회에서 안맥결은 직접 단상에 올라 “무너진 집을 다시 건설하자”라는 주제로 울분을 쏟아내는 강연을 해 방청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당시 언론기사에 다루어질 만큼 안맥결의 열의는 대단했다.
그의 활동 중에서 지속적으로 해온 것은 군자금 모금활동이었다. 군자금 모금활동은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부터 고등학교 사감을 하는 동안 이어졌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연결책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육영사업을 전개했지만, 1936년 4월 군자금 조달 행적이 발각돼 다시 5개월간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숙부였던 안창호와 안맥결의 인연은 더욱 깊다. 1932년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일본 경찰은 친척에게만 접근을 허용했다. 그때 급히 상경했던 안맥결은 신경통과 소화불량으로 쇠약해진 안창호의 몸을 챙기며 옥바라지를 했다.
이후 1938년부터 안창호가 운영하는 점진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안맥결은 한국애국부인회의 간부로도 활동하며 광복에 힘을 보탰다.
안맥결
‘서울여자경찰서장’으로 헌신하다
광복이 되자 국내는 미 군정 시대를 맞이했다. 미 군정은 우선 민생치안 유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찰조직을 개편했는데, 그 과정에서 1946년 7월 1일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신설된다. 당시 서울과 부산·대구·인천 4개 도시에서 창설된 여자경찰서는 큰 주목을 받았다.
서울여자경찰서가 1947년 3월 1일 최초 개서돼 초대서장 양한나 총경에 이은 3대 경찰서장이 안맥결이다.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지역의 경찰서 근무를 거치며 경찰경력을 쌓았던 안맥결은 1952년에 서울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뒤에도 치안국 보안계장, 경찰전문학교 교수 등을 두루 거치며 애국 인재 양성에 헌신했다. 여성독립운동가에서 여자경찰서장으로 일생을 조국에 바쳤던 안맥결, 그의 가슴에는 늘 애국심이 가득했다.
안맥결의 후손들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앞줄 왼쪽 둘째)과 뜻깊은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필자 제공
도산 안창호가(家)의 용기 있는 여성들
안맥결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난 광복 72주년에 안창호의 손자인 로버트 안과 손자부 헬렌 안이 한국을 방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렸더니 안맥결 후손과 뜻깊은 상봉의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안창호 외에도 안창호가(家) 여성의 활약은 대단했다.
흥사단 깃발을 재봉틀로 직접 만들었던 이혜련이 여성독립운동가 1세대였다면 독립정신을 계승한 2, 3세대는 근현대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1942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 미 국가안보국(NSA)의 비밀정보분석요원으로 활약했고, ‘안맥결’도 부친 안치호와 함께 3·1운동과 군자금 모금활동, 여자경찰서장 등으로 활약하며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용기 있는 안창호가(家) 여성 ‘안맥결’을 통해 잊혀진 대한여성의 나라사랑을 떠올려 본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6.‘여성독립운동가’에서 ‘서울여자경찰서장’이 된 안맥결 - 3·1운동·군자금 모금, 애국계몽운동 활동…일생을 조국 위해 헌신 / 국방일보, 2017. 9. 17.
7.3·1운동 대표 유관순 - "대한독립만세"...16세 소녀의 외침 ‘삼천만을 하나로’
1919년 1월 美 윌슨 대통령 민족자결주의 주창 ‘기폭제’
유관순, 이화학당 학생 서클 ‘이문회’ 활동하며 애국혼 키워
마침내 같은 해 3월 1일 5인 결사대와 함께 만세 시위 주도
감옥서도 “대한독립만세”… 자유·평화 위해 ‘비폭력 저항’
3·1운동은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 모두가 자주독립을 외쳤던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수탈에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며 거리로 뛰쳐나왔던 이들은 남녀노소 모두가 태극기와 군중의 외침에 의지한 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날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오늘날 ‘세계평화를 향한 외침’과 같지 않았을까?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 여수감자 수형기록 카드에 나와 있는 수감번호가 적힌 옷을 입은 모습. 필자 제공
2·8독립선언과 이화학당 ‘이문회’
매년 3·1절이 되면 3·1운동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유관순’을 떠올린다. 전 국민이 기억하는 유관순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은 왜 3·1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 1919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열강으로부터 지배와 탄압을 받고 있던 제3세계 국가에 희망의 불씨가 됐다. 1919년 2월 28일 우리나라도 일본 도쿄 심장부에서 한국 유학생이 중심이 된 조선청년독립단이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며 저항의 불씨를 일구었다.
당시 2·8 독립선언에는 여학생도 참여했는데,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입국해 전국 여학생과 여성단체에 구국운동의 불을 지폈다.
3·1운동은 민족운동사적 의의도 있지만, 여성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학생들이 발휘한 순수한 애국심은 비폭력 저항운동의 빛으로 불을 밝혔다. 여기서 유관순이 수학한 이화학당의 학생 서클 ‘이문회’가 주목된다.
이문회는 선후배 간에 세계정세 관련 주제들을 토론했던 학생단체였다. 1907년 교사 프라이와 이성회의 주도로 조직돼 교사 김란사(金蘭史)가 이끌고 있었다. 이화학당에서 신마실라, 박인덕, 신준려, 김활란, 황애덕 등 졸업생과 김마리아, 나혜석 등 교내외 인사들과 토론을 하면서 애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3월 5일에 학생 주도의 학생연합시위도 전개했다. 당시 유관순은 서명학, 국현숙, 김복순, 김현숙 등 ‘5인 결사대’ 및 이정수 등과 함께 학교 담장을 뛰어넘어 만세시위의 대열에 합류했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일본 경찰의 몽둥이질을 피해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은 포승줄에 묶인 채 경무총감부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일본은 3월 10일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향했다.
유관순(원 안) 열사가 이화학당 재학 시절 동료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우내 장터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어진 절렬한 외침
충남 목천 출생의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모친 이소제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기독교 수용으로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늘 활달했던 유관순은 공주 선교활동을 위해 방문한 선교사 사애리시(Mrs Alise H. Sharp)와 인연이 돼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휴교 후 찾은 충남 지역은 가장 격렬했던 병천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이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유관순의 친인척은 대부분 참가했고 죽음을 맞았다.
그 광경을 보고 울분에 차 있던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체포돼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법정에 선 유관순은 일제의 법률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당당히 맞섰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라고 외쳤던 16세의 여학생. 그는 1심에서 3년 징역형이 선고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어윤희, 신관빈, 김향화, 김마리아 등 항일투쟁의 주역이었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수감돼 있었다.
어두운 밤, 한 감방으로부터 시작된 어린 소녀의 목소리 “대한독립 만세!”를 그들은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다. 2.65평, 1.23평의 작은 옥사에 수용돼 갖은 고문에 시달린 몸을 잠시 기대었던 저녁. 뜻하지 않은 만세 소리가 들리자 모두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 소리는 점차 번지면서 형무소 일대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이에 당황한 간수는 주범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옥사를 돌아가며 죽창과 쇠갈고리, 밧줄을 휘두르며 수감된 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누구냐, 선동자는?” 하고 외치자 한 귀퉁이 감방에서 “저예요. 제가 맨 처음 불렀으니 다른 사람은 때리지 마세요”라고 흥분에 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유관순이었다.
유관순은 체포돼 끌려갔다.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냐”라고 질문하자, 변함없이 “나다!”라고 당당히 외친 16세 어린 소녀의 눈빛에 일본 경찰은 간담이 서늘했다.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돼 고등법원 상고심에서 7년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입감된 뒤에도 매일 밤 9시면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악형을 당하며 끌려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너희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라고 소리 지르는 소녀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다. 누구도 그를 면회할 수 없었고 사망했다는 소식에 시신을 인도받을 수도 없었다.
당시 이화학당 교사들은 일본의 잔학함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며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해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비밀리에 시신을 묻어버리려고 했던 일본은 세계 여론을 의식해 유관순의 시신을 전달했다. 그렇게 일제에 항거했던 소녀 유관순의 시신은 찢어진 몸으로 석유 궤짝에 담긴 채 전달됐다.
왜 우리는 유관순을 기억해야 하는가? 유관순은 우리 민족의 비폭력 저항운동 이유를 알려준 인물이다. 순수한 청년의 애국심으로 자유와 세계평화를 향해 거침없이 외쳤던 소녀 유관순의 외침은 진정한 독립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7.3·1운동 대표 유관순 - "대한독립만세"...16세 소녀의 외침 ‘삼천만을 하나로’ / 국방일보, 2017. 9. 22.
8.제주해녀항일운동 - 거친 바다와의 사투보다 더 거셌던 대일투쟁
‘일제의 부당함·암울한 민족 현실’에 울분 폭발
1932년 여성단체 최초·최대 항일운동 전개 - 해녀항일운동기념탑 세워 저항의 외침 기려
제주 해녀공로비.
2016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문화(Culture of Jeju Haenyeo)’. 산소탱크 없이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했던 해녀의 강인함은 일제강점기 해녀항일운동에서도 그 진모(眞貌)가 드러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제주
육지와 사뭇 다른 제주. 필자는 여러 해 전 여성항일운동 자료조사차 제주를 찾으면서 제주해녀의 활약에 주목하게 됐다. 제주는 역사적·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과 우수한 해산물은 일찍부터 상품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1900년경부터 일본 무역상이 제주해산물을 주요 수입원으로 지목하면서 해산물과 함께 수급을 담당하는 제주해녀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제주해녀가 주목받을수록 해녀의 활동지도 확대됐는데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의 다롄, 칭다오, 대만, 러시아 인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생산 활동을 했다.
생계 위협·나라 잃은 설움 참담해
제주해녀들이 부당한 대우와 관련 기관의 부패로 생계를 위협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나라를 빼앗긴 뒤 해녀를 모집하고 감독하는 객주도 바뀌었다. 그러자 일제의 침탈과 비리, 부당한 착취 및 결탁으로 해녀의 노동력 착취가 극대화됐다.
제주해녀들은 스스로를 구제하고 보호하기 위해 1917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 설립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6일에 조합 설립 인가를 받은 뒤, 제주해녀들은 활동 기반을 조직적으로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제는 제주경제에서 독보적 수익 창출원이었던 제주해녀를 대상으로 입거 수수료와 각종 세금을 과하게 징수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서 해녀노동력 착취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해녀들은 그런 부당한 현실에서도 삶의 희망을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와 참담함은 커져만 갔다. 1932년 제주해녀들은 최초의 여성단체 항일운동으로 일제에 맞섰다. 그런 제주여성의 강인함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제주예청’의 당당함이 저항정신으로
예부터 제주는 섬 지역의 특성상 여성의 적극적인 활동이 절실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제주에는 여군(女軍)의 성격을 띤 예청(女丁)이 있었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자발적으로 방어에 나선 여성으로 구성된 단체였던 제주예청은 이미 남사록(1601)에 “성을 지키기 위해 건강하고 씩씩한 부녀자를 뽑아 화살받이터에 보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미 왜적을 방어하는 일선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강인함이 제주여성을 일제의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1932년 1월 12일. 제주시 세화리 장터에 인근 해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주시 구좌면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와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 등 6개 마을에 거주하는 해녀들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부당한 착취 현실에 맞서기 위해 1월 7일 300여 명이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 행진을 한 데 이어 2차 시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제주에 부임한 제주도사 다쿠치 데이키가 세화장날 시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해녀들은 본격적인 해녀항일투쟁을 ‘세화장날’로 맞춘 것이었다.
제주해녀들은 제주도사에게 공식 항의하며 부당한 상황을 고발했다. 그리고 11개 항으로 된 개선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1월 24일 해녀 1500명은 세화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 의지를 피력했다. 당시 해녀항일투쟁의 주도자였던 김옥련(하도리 소녀회 회장)과 부춘화(하도리 청년회 부녀부장), 부덕량(해녀조합 시위 주도 해녀)은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제주해녀를 비롯해 많은 제주민이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을 펼쳤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단순한 저항시위가 아니었다. 제주 여성의 생존권 확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일제의 부당함과 암울한 민족의 현실에 울분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여성단체로는 최초의 항일운동인 해녀항일운동이 제주에서 전개됐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해녀의 저항은 국내 최대의 여성항일운동으로서 일제에 맞서 싸우는 가열찬 한국 여성의 모습을 대변했다.
현재 구좌읍 상도리에는 해녀항일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제주해녀항일운동! 그 저항의 외침에는 제주 여성의 소리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의 강인한 저항정신과 민족의 숨결이 담겨 있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8.제주해녀항일운동 - 거친 바다와의 사투보다 더 거셌던 대일투쟁 / 국방일보, 2017. 10. 15.
9.안중근 장군 어머니 조마리아 - "나라 위해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개화·독립에 관심 있던 집안 - 국채보상운동 계기로 - 구국운동 대열에 뛰어들어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 의연금 출연 사실 실리기도
안중근의 사형 앞두고 - “비겁해져서는 안 된다” - 아들의 마음 다잡게 해
‘타인보다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서 남들을 이끄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한다. 또 ‘보통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도 영웅이라고 말한다. 영웅은 주로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나타났고 난세를 치세로 전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2017년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매년 국가보훈처에서는 ‘올해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 뜻을 기리고 있는데, 올해는 안중근 장군의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가 선정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기억하지만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1862∼1927)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부친 배천 조씨와 모친 원주 원씨의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순흥 안씨의 3남인 진사 안태훈과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안태훈은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 지식인이었다.
남편 안태훈이 1896년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조마리아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그 영향은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개화와 구국, 독립에 관심이 높았던 집안 분위기와 1906년 1월 남편 안태훈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조마리아를 사회 일선으로 뛰어들게 했다.
1907년 5월 2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안중근 장군의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가 국채보상의연금을 기부한 내용이 실렸다.
국채보상운동 시작으로 구국운동
충실한 내조자의 삶을 살았던 조마리아가 구국운동의 대열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바로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치욕적인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이후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시정 개선 차원에서 차관을 주선하면서 국가위기가 시작됐다. 1907년이 되자 대한제국은 적자예산인 상태에서 높은 이율의 국채 1300만 원을 상환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며 국가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1년 치 국가 예산과 맞먹는 금액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날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국가채무를 상환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됐는데, 그 구국운동의 대열에 조마리아도 있었다. 당시 개항장이었던 삼화항에서 안중근과 삼화항 사립영어삼흥학교 설립으로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던 시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삼화항 지역 여성들에게 구국운동을 독려하며 의연 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1907년 5월 12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평안도 지역의 국채보상의연금 수입액과 영어삼흥학교 의연금 기사가 함께 실렸다. 국채보상의연금 수입 총액 중 34원60전의 의연금 출연 내용과 함께 삼화항 패물폐지부인회의 기사가 실렸는데, 의연자는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1907년 5월 29일 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조마리아의 의연금 출연 사실이 실려 있다. 지역 유지 부인이 중심이 된 큰 규모의 단체였던 삼화항 패물폐지부인회와 조마리아의 국채보상의연금 출연 활동은 유지부인, 기독교인, 전직 관인 부인, 일반 부인, 기생 등으로 확산되며 평안도 여성에게 큰 자극이 됐다.
안중근 장군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
당시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장이었던 아들 안중근과 구국운동의 대열에 섰던 조마리아. 그 후 1909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주인공이 바로 안중근이었던 것. 그리고 사형 구형을 앞두고 안중근에게 강건한 태도로 대했던 조마리아의 일화는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지 않았던 조마리아. 그 강건함 뒤에는 피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 것이다.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흐트러짐 없이 일제의 법정에 섰고 누구보다도 당당했던 안중근. 그 아들의 뜻을 이어 조마리아는 아들 안공근·안정근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서 근검절약한 생활을 하며 동포들의 어려움을 함께했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영웅은 영웅이 일으켜 세운다
한국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집안에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이들이 많다. 백범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 여사, 김의환의 부인 정정화 여사, 김학규의 부인 오광심, 그리고 조마리아.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부인으로 몸소 독립운동을 실천한 이분들은 영웅을 일으켜 세운 여성영웅이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9.안중근 장군 어머니 조마리아 - "나라 위해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 국방일보, 2017. 10. 22.
10.(끝) 김마리아 - “내 나라 내 주권 찾겠다는 마음 당연하지 않나요?”
평등사상·근대교육 받았던 인텔리 - 조국독립에 투신한 친인척 보며 - 독립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
2·8독립선언부터 3·1운동 불씨 지피고 - 임시정부활동, 미주지역까지 활동
일생을 고문과 감시·옥고에 시달리다 - 1944년 3월 고문 후유증으로 생 마쳐
애국이란 무엇인가? 조국에 바치는 사랑의 감정, 내 조국을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로 건설하려는 의지이자 신념이다. 우리가 삶을 누리는 이 땅의 주권이 상실되고 일본에 강토가 짓밟혔을 때,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던 여성독립운동가,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어머니들이었다.
조국독립의 꿈
여성독립운동을 접했을 때 관련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의 꼬리를 추적해 가다 보면, 마치 실타래처럼 활동지가 연결되고 그다음 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이 독립활동에 뛰어드는 계기는 성장환경이나 교육환경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중에는 일찍 남편을 여읜 여성, 독신으로 산 여성, 자녀를 낳지 않은 여성이 다수였다.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도 그 대열에 있었다.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우리나라 최초 교회가 설립된 소래마을에서 태어났고 서구문물과 근대사상의 전파를 고스란히 느끼며 성장했다.
타 지역 여성이 인습의 울타리 속에서 교육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반면, 그는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근대여성교육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그로 인해 조국독립에 투신한 친인척들을 보면서 자신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김마리아와 도산 안창호 선생, 차경신이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의 유언! 김마리아를 독립운동으로
김마리아는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부터 3·1운동, 임시정부활동, 미주지역활동에 이르기까지 활동 폭이 넓었던 인물이었고 독립에 대한 신념도 투철했다.
김마리아가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유언 덕분이었다.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에 어머니를 여의면서 김마리아는 친척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
그가 열네 살이 됐을 때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삼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라도 막내인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숙부가 그 뜻을 받아들여 김마리아는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에 입학했고, 유학의 꿈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마리아가 학사모 쓴 모습.
꽃다운 정신여학생,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
정신여학교는 선도적 여성교육기관으로 생활교육과 전도, 인성교육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여성근대화에 공헌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교사 신마리아와 김원근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노백린의 자녀 노숙경과 노순경, 이동휘의 자녀인 이의순과 이인순, 조선YWCA를 창립한 김필례(김마리아의 고모), 김경희(김마리아의 이모), 이혜경 등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끈 주축 인물들이 정신여학교와 인연이 깊었으니 선도적이라고 보아도 타당할 것이다.
학교에 다닐 당시 김마리아는 “선생님, 내 나라 내 주권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당연하지 않나요?”라고 질문해 주목받기도 했다. 졸업한 이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8독립선언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 여인으로 변장하고 옷을 매는 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수백 장 복사한 뒤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불씨를 일구는 데 힘을 보탰다. 3·1운동 직후에 여성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계획했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 활동이 발각돼 5개월여를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출옥한 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뉴욕 근화회 조직해 한국 여성 존재 알려
김마리아는 일본,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파크대학에서 수학한 뒤 시카고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고, 특히 근화회(槿花會)라는 단체를 조직해 교포사회에서 한국 여성의 존재를 알렸다.
1928년 4월 5일 신한민보에 ‘이천만 성명, 도탄에 울고, 삼천리 빛 잃어 캄캄하도다. 주야로 그리는 우리 동산, 언제나 무궁화 다시 피랴. 나라의 자유, 민족의 복락의 길, 개척할 이 그 누구냐…’라는 내용으로 소개된 뉴욕 근화회는 국내 여성과 해외교민사회의 소통을 알리는 공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근화회는 1928년 1월 1일 김마리아를 필두로 황에스더, 이선행, 우영빈, 안헬른, 윤원길, 박인덕, 주영순 등 해외 유학으로 타국에 있지만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조직했다.
일편단심과 끈기, 섬세한 아름다움의 뜻을 담은 무궁화! 일생을 숱한 고문과 감시, 옥고에 시달렸지만 오직 독립만을 염원했던 김마리아! 하지만 그는 1944년 3월, 광복을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김마리아와 같은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이 끊임없이 꽃피웠던 아름다움의 행진을 무궁화에서 기억해본다.
[출처]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 - 10.(끝) 김마리아 - “내 나라 내 주권 찾겠다는 마음 당연하지 않나요?” / 국방일보, 2017.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