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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의미
信天함석헌
노아의 홍수를 생각케 하는 흐린 물결이 한강 철교에 찰랑찰랑 하던 날 나는 비가 좀 주춤하는 것을 보고 형편이 어찌 된 것을 살피려 앞 뒤 골이 다 잠겨 방주같이 서 있는 우리 집 언덕을 내려와 노아의 손을 떠난 까마귀처럼 물 위로 나갔다. 어둠이 벌써 내리기 시작했었다.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뉴스 소리가 각지의 끔찍한 모양을 보도하고 있다.
축대가 무너져 몇 가호가 묻혀버렸다. 사태가 나서 몇십 명이 몰살 했다.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데 물은 자꾸 불기만 한다.
그러나 그 뉴스가 끝나기가 바쁘게 언제나 허튼 수작으로 남의 돈이 아니라 혼을 왼통 뽑아먹는 그놈의 상품 광고가 여전히 나오고, 정신 빠진 젊은 남녀의 흔들어대는 궁둥이가 눈에 뵈는 듯한 그놈의 소위 음악이란 것이 무엇이 어쨌느냐 하는 듯 떠들어댄다.
오늘 같은 날은 좀 그만두지 못할까? 공자는 음악을 듣고 나서 석 달을 고기 맛을 몰랐어도, 사람이 죽어서 울었으면 그날은 노래를 안 불렀다는데, 방송국에는 사람은 없고 기계만 있나? 정부 사람은 귀가 없나? 물에 쫓겨 아우성을 치며 도망하던 사람들이 저 소리를 듣는다면 과연 어쩔까? 저놈의 저 스피커를 그냥 둘까? 물이 끼지 않은 데서는 먹고 마시고 놀대로 놀고 떠들 대로 떠들고 사람 잡을 계획 할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그 사람들이 그 라디오 그 신문 그 공문 통해 구제금 모아 보내면 그들이 고맙다고 받을까? 거지도 “엣다 먹어라”하고 발길로 차주면 아니 받아먹는다는데. 도리어 “이놈들아 이때껏 먹다 나온 저 흐린 똥물보다 더 더러운 너희 그 돈 그 마음 아니 받는다”하고 그 얼굴에 도로 팽개쳐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분결에 “죽어도 차라리 시체라도 자유 평등의 저 푸른 바다로 가련다”하며 그 흐린 물속으로 다시 뛰어들지나 않을까?
귓 곁에 「비가 오려거든 차라리 좀더 와서 아예 다 없애 버려!」하는 역정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 한두 번만 아니었다. 누구 아닌 나도 같은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벼락 맞을 생각!” 하고 목구멍에서 눌러버리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시금 다시금 되 올라오려 했다. 옛사람이 “저놈의 해는 왜 아니 없어지나, 너도 나도 다 같이 망해버렸으면 좋지 않아!” 했다는 심정을 알만 했다.
옛날은 그래도 천재(天災)가 내리면 악한 놈은 망하고 선한 사람이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것은 불쌍한 놈뿐이고 살아남는 것은 악한 놈일 것이다. 이 비가 심해져서 다 죽고 단 한두 사람이 남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람 잘 잡아먹는 악한 놈일 것이다. 그러니 시원하려면 다 망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며 어둠 속을 가노라니 갑자기 전기가 반짝하고 들어 왔다. 침수됐던 발전소가 수리가 되는 모양이지. 그런데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물 구경하던 아이들 어른들이 갑자기 “불 왔다, 불 왔다, 텔레비 보자, 텔레비” 하며 달려서 집으로들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삶이란 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이것은 비극이냐? 희극이냐?”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려고 딴 골목을 들어서니 방범대원들이 나와 침수된 구역을 감시를 하고 있었다. 새끼줄을 치고 사람들을 디리 쫓는데, 쫓아도 쫓아도 아니 들어가니 보고서 하는 말이 “어서 돌아들 가세요. 정말 아니 가시면 도둑질하러 온 줄로 알겠어요” 했다. 구경하는 심정도 심정이지만 감시하는 태도도 또 태도다. 나는 또 한 번 중얼거려야 했다 —글쎄, 웃으란 말인가? 울란 말인가?
그러나 어떻게 했든 간에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무슨 죄인지 모르게 죽고 나니 살아남은 놈은 다 도둑이 됐다. 어느 의미로나 도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내 집엘 가는 건가? 남의 집에 도둑질을 들어가는 건가? 내 집이 어디야, 내 집이 ?
물이 나니 모든 것이 다 잠기고 휩쓸려버렸다. 논, 밭, 철도, 고속도로가 잠기고 휩쓸린 것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꾀와 기술과 계획이 다 잠기고 휩쓸려 버린 것이다. 정치도 종교도 학문도 다 깜박해 버렸다. 인간의 면목이 없다. 그런데 오직 하나 괴물처럼 불쑥하고 드러나 나온 것이 있다. 인간의 마음 바닥이다. 드러나고 보니 참 추악하다. 평시라는 때에는 정치라는 똥물, 종교라는 썩은 물, 학문이란 흐린 물, 사업이란 찌꺼기 속에 묻혀 있어서 몰랐는데 하늘 청소부의 내리 붓는 물에 말끔히 씻겨 나가고 보니 비로소 그 밑에 엎디어 있던 그 추악한 모양이 마치 갈보의 얼굴에서 분을 긁어버린 것처럼 처참하게 드러났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위 정부 관청이란 것은 물론,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가 목청을 돋우어 불쌍하니, 참혹하니, 동포애니, 인류애니 하며 떠드는데, 한 사람도 그 끔찍한 일의 의미를 캐는 사람은 없으니 웬일일까? 어느 교회 구석 절간 구석에서는 혹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중의 집인 대지(大地)위 대공(大空) 밑에서는 없었다. 그리고 민중이 듣지 못한 것은 말이 아니다. 말은 나라의 주인인 민중의 귀에 들어가야 말이요, 그 입에서 나와야 말이다. 흥하는 것도 민중이요 망하는 것도 민중이다. 그러니 죽어도 죽는 의미를 모르는 이 민중의 얼굴이야말로 홍수에 죽은 시체의 꼴보다도 더 추악 더 처참한 것 아닌가?
예수가 뭐라 했던가?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했지. 그리고 그 말씀을 언제 했던가?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깨달음이 온 후 깊은 생각에 잠겨 40일 40야를 단식을 하고 나서 비로소 진정한 배고픔을 느끼고 그렇게 되니 비로소 천하 수없는 주린 씨의 다급한 사정이 눈에 보여. “이 돌을 명해 밥이 되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난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에 가본 사람은 알지만 거기는 돌밖에 없는 나라다. 그리므로 “저 돌이 만일 빵이라면 사람이 못살 리가 없건만……” 하는 소리가 자연히 나오게 돼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당연한 대답인데, 예수는 그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단연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야만 산다고 했다.
그럼 그 뜻이 무엇인가?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어서만 사람이 아니라, 뜻에 살아야 사람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모든 것에 의미를 붙여주는 영(靈)이다. 사람이 짐승됨을 면하고 사람이 된 것은 이 의미를 찾아 보람에 살려는 영기(靈氣) 하나 때문이다.
의미를 잊었기 때문에 일의 까닭을 캘 줄 모르고 까닭을 모르면 혼란이다. 수해의 원인은 잘난 듯이 따지는 사람이 많은데 그 까닭을 묻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점이 수해보다도 더 참혹한 점이다. 수해에 잃어버린 것은 다시 만들 수 있으나 역사의 의미를 한 번 잃으면 짐승이다. 원인은 물건과 짐승에도 있지만 까닭 의미는 사람에만 있다. 원인은 이성이 있으면 알지만 까닭 의미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임경업(林慶業)은 다 죽게 된 병인 같은 조국을 건지려 애를 태우다 어리석은 임금을 깨우치려 할 때에 “하늘이 재난을 내리시는 것은 임금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뉘우쳐 고치면 큰 복입니다” 했다. 그때보다도 더한 위기인 오늘에도 듣고 싶은 것은 이 한 마디인데 없다. 재난은 돈과 물자와 기술과 명령만으로는 못 이긴다. 감상적인 눈물조차도 아니다. 그보다도 역사를 뚫러 의미를 캐내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禍)를 변(變)해 복(福)으로 만드는 창조를 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이 감상에 빠져버리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우상 숭배에 떨어져버린다. 그러면 태평 속에서도 망하는데 하물며 재난 속에서일까?
옛날 탕(湯)은 7년 가뭄을 만났을 때 스스로 속죄제의 희생이 되어, “정치가 고르게 되지 못했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었는가? 궁실이 너무 화려한가? 계집을 너무 가까이 했는가? 뇌물이 오고갔는가? 쏠아 바치는 것들이 판을 치는가?” 여섯 가지로 자책하며 빌어서 비를 얻었다고 한다. 오늘날 정치나 종교에 그것이 있을까? 도리어 머슴에의 쑥대에 얻어맞은 독사의 대가리처럼 점점 더 일어서지나 않을까? 모든 신문은 불러 수마(水魔)라고 했다. 정말 마귀를 믿어서 하는 말인가? 아니 믿으면서 하는 것이라면 국민을 속이고 책임을 밀어치우는 요사스런 수단이다.
국민적인 회개가 초점이다. 기술의 개량이 아니라 양심의 바로 잡힘이다. 회개 없이 참 동정 없고, 참 동정 곧 같이 아파함 없이 새 마음의 발동 없고, 새 마음의 일어남 없이 역사 창조 없다. 말은 잘 하더라마는一새마을 운동은 새 마음의 운동이라고. 겸손히 아프게 뉘우치는 말은 일언반구(一言半句) 없으면서 새 마음은 어디 있을까?
50년 전 대일본제국이 한창 교만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나 대동경의 3분지 2가 하룻밤 새 재가 되고 30만 인구가 죽었다. 그 재난을 당하고 두 사람이 두 가지 해석을 내렸다. 우찌무라(內村鑑三)는 하나님의 책망이라 했고, 하천풍언(賀川豊彦)은 과학의 부족이라 했다. 대동아의 악전(惡戰)을 치르고 났을 때 뉘 신앙이 옳았던 것이 스스로 판명이 됐다. 그러나 오늘 일본은 누구의 말을 듣고 있을까? 우찌무라의 경고를 들었던들 저렇게 다시 군국화를 서둘지는 않을 것이다.
은감불원(股鑑不遠)이라, 앞의 수레가 거꾸러진 것은 결코 그저 된 것이 아니다. 남의 일로 알아서는 아니된다.
씨알의소리 1972년 9월 14호
저작집30; 7- 153
전집20; 5-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