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어느 슬픈 날에
까닭도 모르게 어느 사이 우수의 깊은 그림자가 슬쩍, 심장 가까이 찬 기운 한낮에도 내리면 운명의 장난이야, 우습지 무서워 하다가 얼굴도 뵙지 못한 외증조할아버지 산 고개 넘어 교회 다녀오는 길, 같은 자리 볼 일 보신 밭의 조 이삭 키가 한 뼘이나 더 컸다는 엄마의 이야기며 한가한 겨울에는 거문고 만드실 오동나무 구하러 먼 길 다녀오시는 증조할아버지 수레 바퀴소리 삼촌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울려 퍼지는 너른 마당 펼쳐지면 나도 움씬 재잘재잘 명랑한 저 황금물결, 수도꼭지 틀어 쌀을 씻는다 노르스름 기장쌀도 있지만 청차좁쌀 그 이삭은 쌀이나 보리 이삭하고 다른가 쌀에 섞은 좁쌀이 함박에서 쪼로록 뜨물에 씻겨 내리는데 자정이면 식구들 모두 깨워 농사지은 밤 야식으로 꼭 먹이시곤 했다는 엄마의 시아버지 시집살이가 풍비박산 피란길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그다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까닭 모르게 어느 사이 종종 우수의 깊은 그림자가 슬쩍, 슬퍼지는 가을 오래되어 손대지 못하는 서울 아파트 부엌 씽크대 앞에서.
(2012년 9월 25일 順)
첫댓글 허 참 간 큰 남자일세. 밥 한지 오래되어 잊어먹엇다고라... 부러우이 난 요즘도 자주 밥한다. 물의 양도 정확하여 결코 틀리는 법 없지, 이쯤되면 가히 '밥신'의 경지가 아닐까 자평해본다..ㅋㅋ (魯)
오랜만이군. 魯선생. 부산에서 잘지내는가. '슬퍼지는 가을(끊어 읽고) 오래되어 손대지 못하는 서울아파트 부억싱크대 (끊어 읽고) 앞에서.'로 읽어야 하는데 어찌 옛날 성미 그대로 급하게 읽어 싱크대 앞에 오랫동안 서보지 못했다고 해석 하는가. 게다가 결정적 실수는 順은 81이 아니라 85 여자 후배라는 점이야.